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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화 (102/161)

폭주 에스퍼 92화

애초에 직원 수가 적기에 마찬가지로 황량한 주차장 구석에 대충 수레를 둔 희록이 운전석에 올라탔다. 그리고 한참 동안 창밖을 살피고 나서야 조심스레 손을 뻗어 물방울이 맺힌 상자를 열었다.

“므아-”

작은 칭얼거림이 차내를 스쳐 지나갔다. 말똥말똥 눈을 깜빡이는 아기를 착잡하게 바라보던 희록이 부드러운 볼을 쓰다듬었다.

“안 울어 줘서 고맙다.”

“우?”

얼룩덜룩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피가 잔뜩 묻은 담요가 찝찝했으나 당장 대체할 만한 물건은 없었다.

“하아…….”

커다란 한숨을 내쉰 희록이 머리를 감싸며 고개 숙였다. 말도 안 되는 일에 휘말리고 말았다. 들키면 100% 확률로 희록의 남은 인생은 불행하게 된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다시 건물로 들어가 지나가는 직원에게 아기를 내밀 수는 없었다.

그가 이런 위험하고 돈도 안 되는 부탁을 들어준 이유는 단 하나다. 그야 고채경이 한 부탁이니까.

그 자식이 몰래 찾아와 떨리는 손으로 담요 덩어리를 내밀었을 땐 말문이 막혀서 따지지도 못했다. 평소엔 보는 둥 마는 둥 매점에 잘 오지도 않는 주제에 귀찮은 건 모조리 희록에게 맡기는 나쁜 놈.

언젠간 그 망할 선글라스를 반으로 부숴 버릴 거라고 다짐하며, 희록이 시동을 걸었다. 검은색 자동차는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유유히 C동을 벗어났다.

* * *

“아, 윽…….”

고통 어린 신음이 어두운 방을 울렸다. 평소처럼 그의 방이 아닌, 오로지 처벌을 위해 만들어진 독방에 갇힌 주현이 덜덜 떨며 한껏 몸을 웅크렸다. 어깨를 말며 팔을 끌어안아도 통증은 가시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환부를 덮은 거즈는 피로 흠뻑 젖어 있음에도 건들 수조차 없었다. 왼쪽 눈가 위를 맴돌던 창백한 손은 결국 머리카락을 쥐었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액체가 피인지 눈물인지도 구분되지 않았다.

이른 아침 집무실로 끌려간 날, 태석은 주현을 죽이지 않았다.

‘마음이 바뀌었다. 그리 쉽게 끝낼 수는 없지.’

어느새 풀려난 손으로 끔찍한 격통이 느껴지는 눈을 덮은 주현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절반이 어두워진 세상에서 그는 피 묻은 칼을 바라보았다.

주현은 웬만한 사람보다 다치는 것에 익숙하다. 다시 말해, 통증의 역치가 높다. 그러나 그런 주현에게도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하찮은 벌레처럼 바닥에 쓰러져 바르작거리던 주현은 퓨즈가 나가듯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눈을 뜨니 이곳이었다. 창문조차 없어서 밤인지 낮인지도 구분할 수 없는 방은 단단한 철문 말고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차갑고 깜깜한 방에서 몸을 말고 홀로 고통을 감내하던 주현은 딸깍하고 자물쇠가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간신히 벽에 등을 기댄 그가 하나뿐인 눈으로 무표정한 직원을 노려보았다.

비릿한 냄새가 물씬 나는 방으로 걸어 들어온 직원은 겁먹은 개처럼 사나운 기세의 주현을 무시한 채 그의 팔을 잡았다. 다른 손에 들린 주사기를 본 주현이 떨리는 손으로 직원을 밀어냈다.

“가이딩 약물이니까 얌전히 있어라. 죽기 싫으면 팔 내밀어.”

“읏, 꺼, 져…….”

끝까지 반항하는 주현에 고개를 내저은 직원은 핏줄조차 제대로 찾지 않고 막무가내로 주사기 바늘을 밀어 넣었다. 따끔함과 함께 약간이지만 통증이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주사기를 정리한 직원이 주현의 턱을 쥐곤 관찰하듯 들여다보았다. 빨갛게 물든 거즈, 찡그렸음에도 형형한 오른쪽 눈, 식은땀이 밴 창백한 얼굴. 모든 걸 찬찬히 훑은 직원이 피식 웃었다.

“참고로 가이드는 안 와. 이번 주에도, 다음 주에도. 그 눈은 가이딩 없이 나아야 하니까. 부센터장님 명령이다.”

말을 마친 직원은 미련 없이 일어나 방에서 나갔다. 끼익- 다시 한번 철문이 닫히고 먹물 같은 어둠이 찾아들었다. 철커덕. 자물쇠가 잠겼다.

가이딩은 에스퍼의 상처를 치료해 주지만, 흉터는 없애지 못한다. 이미 나아 버린 상처는 아무리 대단한 가이드라도 어떻게 할 수 없다. 즉, 태석은 영원히 주현의 왼쪽 눈을 앗아 갈 계획이란 말이다.

“웃, 기지 마.”

이딴 건 벌도 아니야. 난 아무렇지도 않아. 눈깔 하나 없어진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사지를 잃는 것보다는 훨씬 나아. 그러니까 괜찮아. 그러니까 나는 괜찮아.

스스로를 설득하듯 머릿속에서 필사적으로 외치던 주현은 이를 악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두꺼운 철문을 넘어설 만큼 커다란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아서 그랬다.

자존심이 너무나도 센 남자가 숨죽이며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끈적한 핏물이 턱을 타고 떨어져 옷을 물들였다. 사실 칼에 찔린 그 순간 돌이킬 수 없이 더러워졌음에도 아까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차인호가 준 건데.’

신기하게도 말도 안 되게 아름다운 가이드를 생각하자 고통이 조금 가셨다.

그러나 대신 가슴이 아팠다. 주현은 갈비뼈 안쪽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한동안 그를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기인한 건지, 혹은 그날의 통화가 아직도 잔상처럼 남아 있어서인지 궁금했다.

눕고 싶었으나 머리가 아래를 향할수록 더더욱 아파지는 상처에 결국 주현은 벽에 기댄 채 무릎을 폈다. 분명 지금은 여름이건만 벽과 바닥이 아릴 만큼 차가웠다. 어쩌면 출혈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걸지도 모르지만, 이유가 뭐든 따져 봐야 아무 소용 없었다.

“하아…….”

틈새라곤 없는 좁은 방에 주현의 한숨이 차올랐다. 나가지 못하고 맴돌던 작은 숨결은 결국 주인에게 돌아와 그를 흔들었다. 귀를 막은 주현은 애써 차인호를 지우고 파란 담요에 싸여 있던 아기를 떠올렸다.

<동백 보호소>에 가장 마지막으로 입소한 아이는 ‘라연’이라는 이름의 한 살짜리 아기였다. 앞니조차 없는 갓난아기를 처음 본 주현은 며칠이고 작은 요람 옆에 딱 붙어 있었다. 라연이 침을 흘리며 주현의 손가락을 잡았을 때는 너무나도 기뻐 바보처럼 웃었던 게 아직도 생생했다.

그래서 주현은 태석이 제안한 멍청한 거래를 받아들였다. 비록 라연이는 죽었지만, 그가 죽였지만, 또 다른 아기는 살았으면 했다.

‘무사히 빠져나갔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주현은 그저 웅크린 채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렸다. 벌을 다 받고 이곳을 나가면 전과 같은 일상이 기다릴 거라고, 그렇게 믿었던 것도 같았다.

* * *

어두운 방에 홀로 있으면 점차 시간개념이 사라진다. 주현은 며칠 동안 독방에 갇혀 있었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6개월은 지난 느낌이지만 끌려 나온 복도가 후덥지근했다. 아직 여름이 끝나지 않았으니 겨우 며칠밖에 안 지난 듯했다.

그동안 주현은 총 일곱 번의 가이딩 주사를 맞았다. 얼마나 적은 양인지 아직도 출혈이 멎지 않았지만, 그래도 태석의 바람대로 그의 왼쪽 안구는 영원히 빛을 비추지 못할 터다.

직원들의 손에 잡혀 복도로 이끌려 나온 주현은 지나치게 강한 빛에 오른쪽 눈을 꾹 감았다. 비틀거리며 제대로 걷지도 못했으나, 양옆에서 그를 붙잡은 직원들 덕에 넘어지지 않고 복도를 지나갔다.

그러는 새 단 하나의 창문도 보지 못한 걸 보면 지하인 듯했다. 지하층에 이런 곳이 있었나 의아했으나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주현이 도착한 곳은 또 다른 철문 앞이었다. 고통으로 인한 엔도르핀 때문인지 며칠을 굶었음에도 어떠한 허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피곤할 뿐이었다.

끼이익- 녹슨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역시나 어두운 내부에는 희미하지만 그래도 광원이 있었다. 작은 전등 옆에는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서 있었다.

“데려왔습니다.”

“이곳에 결박하고 너희는 나가라.”

“네.”

태석의 명령에 직원 둘은 주현을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히곤 양손과 발목을 사슬로 고정했다. 평소라면 몰라도 힘이 없는 지금으로선 쉽게 풀 수 없을 것이다.

쿵. 문이 닫혔다. 태석과 둘만 남은 주현은 체념 어린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네놈의 반항적인 사고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더는 봐줄 수가 없더군. 그래서 협회에 자기 인식 교육을 요청했다.”

“…….”

“쓰레기를 좀 더 쓸 만하게 바꾼다는 데 누가 거절하겠나?”

승인이 났다는 이야기다. 주현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지만, 사실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이곳에서 말하는 ‘교육’이란 기껏해야 의자에 묶여서 몇 시간 동안 협회의 장점과 폭주 에스퍼의 괴물 같은 면에 대한 비디오를 시청하는 게 다니까.

지루하고 짜증 나긴 해도 겁먹을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한 주현이 무심하게 정면을 응시했다.

“네가 이걸 받는 건 4년 만이군. 이번에는 좀 더 효과가 오래가길 바라는 게 좋을 거다.”

‘4년?’

다시금 태석을 올려다보았으나 그는 설명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주현이 기억하기로 마지막 교육은 작년이었다. 의자에 묶여 반나절이 넘도록 동영상을 봤던 게 아직도 선명했다.

“특별히 A동 에스퍼의 능력도 사용되었지. 다시는 반항하지 못하게 만들어 주마.”

잔인한 목소리에 주현은 태석에게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왼쪽 눈을 잃은 탓에 거리감을 가늠하기 어려워 계속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지끈거리는 두통에 결국 주현이 눈을 감은 순간이었다.

삑. 무언가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고, 이내 태석이 벽 쪽으로 걸어가는 게 느껴졌다. 의자에 앉았는지 작은 마찰음이 귀를 스쳤으나 주현은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없던 인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공격에 대비해 번쩍 눈을 뜬 주현은 딱딱하게 굳어 버리고 말았다.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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