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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화 (101/161)

폭주 에스퍼 91화

한 번 결정한 이상 무를 수는 없다. 담요 덩어리를 품에 안은 폭주 에스퍼가 아무도 몰래 올라왔던 길의 반대쪽으로 내달렸다. 사실 달렸다고 할 수도 없다. 답지 않게 능력을 펑펑 쓰며 날아가던 그는 나무 위에 올라서서 지도를 뒤적였다.

가장 가까운 보육원은 최대 속도로 간다면 30분 이내에 도착할 거리에 있었다. 갔다 오는 시간을 합하면 왜 이렇게 늦었냐고 추궁당할 테지만, 그럴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품속의 작은 무게감이 너무나도 아파서 주현은 잠든 도시를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을 깊게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불 꺼진 보육원 앞에 선 주현이 떨리는 손으로 담요를 문 앞에 내려놓았다. 이른 아침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싶었으나 시간이 지체될수록 아이가 살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넌 괜찮아.”

자신에게 암시하듯 몇 번이고 중얼거린 주현이 작고 부드러운 손을 꾹 움켜쥐었다가 놓았다. 몸을 일으키는 주현을 따라 순진한 눈이 움직였다.

차로 돌아간 주현은 직원에게 짜증 어린 타박을 들었으나 딴 길로 샜냐는 추궁은 받지 않았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주현은 죄책감과 희망이 뒤섞인 이상한 감정을 숨죽이며 끌어안았다. 두 눈은 떨어지는 별과 같이 밝게 빛나는 채였다.

그리고 늘 그렇듯, 신주현의 인생은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법이 없다.

* * *

주현이 결박된 채 태석의 사무실로 끌려간 건 아이를 훔치고 이틀이 지난 이른 아침이었다.

10년 이상 푹 잠들어 본 적 없는 주현은 오늘도 이른 새벽에 눈을 떠 멍하니 비가 쏟아지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여름임에도 시원히 쏟아지는 빗줄기 때문인지 제법 선선해서 티셔츠 위에 후드티를 입은 참이었다.

문밖 복도에서 여러 명의 발소리가 들리더니, 쾅! 주현의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침입자를 향해 능력을 쓰려던 주현은 익숙한 제복을 보곤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윽…….”

“미안하다.”

작게 속삭인 승철과 굳은 얼굴의 세화가 주현의 팔을 잡고 손목에 능력 제어 수갑을 채웠다. 그들을 둘러싸고 주현이 제압되는 걸 지켜보던 직원 중 가장 높은 직급을 가진 이가 앞장서서 방을 나섰다.

동료들의 손에 끌려가며 주현은 드디어 올 게 왔다고 생각했다. 걸리는 게 너무 많아서 뭐가 들킨 건지도 알 수 없었다. USB? 임무 중 자리 이탈? 범규? 신발조차 신지 못하고 맨발로 차가운 복도를 걸으며, 주현은 창살 너머로 세차게 쏟아지는 비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승철과 세화의 손이 가늘게 떨리는 걸로 봐선 제법 사안이 심각한 것 같았다. 난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복도에 있는 건 그들만이 아니라서 주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끌려간 곳은 C동의 부센터장 집무실이었다. 내심 예상했던 장소이기도 했다.

똑똑. 가벼운 노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방 안으로 들어선 사람은 주현과 그를 붙잡은 두 폭주 에스퍼뿐이었다. 나머지 직원들은 당연하다는 듯 문밖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른 아침임에도 태석은 머리까지 깔끔하게 넘긴 완벽한 상태로 주현을 맞이했다. 집무실 한가운데에 무릎 꿇려진 주현은 너무나도 뜨거워서 오히려 푸르게 가라앉은 태석의 분노를 알아챘다.

“네가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알고 있나?”

“……모르겠습니다.”

그 대답이 태석을 한층 더 분노케 한 게 분명했다. 그는 고급스러운 책상으로 걸어가 그 위에 있던 무언가를 가지고 돌아왔다. 커다란 손에 들린 것은 잭나이프였다. 다만 잭나이프치곤 길이도 길고 무척 예리해 보였다.

“한 번 더 묻겠다. 네 죄가 뭐지?”

태어난 거. 걸음마를 떼기도 전부터 들어온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등 뒤로 단단히 잡힌 주먹에 힘을 준 주현이 다시 한번 발뺌했다.

“생각나는 일이 없습니다.”

“하. 나와라.”

그 명령은 주현을 향한 게 아니었다. 집무실에 딸린 휴게 공간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나왔다. 나이프 앞에서도 떨지 않았던 주현은 그제야 두려운 표정을 지었다.

“네놈은 잘 숨겼다고 생각했겠지.”

여전히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채경의 팔 안에는 익숙한 담요가 들려 있었다. 담요 틈새로 보이는 작은 얼굴은 어딘가 불안해 보였는데, 크고 순진한 눈망울이 물기로 젖어 있었다.

이틀 전 밤, 주현이 하늘을 달려 보육원 앞에 내려놓았던 아기가 현재 태석의 집무실에 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절망에 주현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아기를 응시했다.

“내가 그토록 우스워 보였나?”

망설임 없이 복부를 걷어찬 태석은 주현의 절망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즐기며 주현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비가 오는 날 특유의 습기를 머금은 머리카락이 태석의 손가락에 얽혔다.

“명령 불복종. 임무지 이탈. 유괴. 멋대로 도심지를 돌아다녔으니 테러 혐의까지 있겠군. 이래도 네 죄가 뭔지 모른다는 거냐?”

주현의 시선은 그가 살렸다고 생각했던 어린 생명에게 여전히 박혀 있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태석은 주현의 머리카락을 잡은 손에 힘을 줘 억지로 그를 보게 만들었다.

칼을 움켜쥔 다른 손이 전등 아래에서 빛났다.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는 귀를 먹먹하게 한다. 주현은 멍하게 태석을 올려다보았다.

“본래라면 바로 처리되었겠지만, 지금까지의 성과를 봐서 특별히 면책권을 주마.”

“…….”

“능력을 쓰든 맨손으로 하든, 지금 이 자리에서 저걸 죽여라. 그렇지 않으면 죄를 물어 내 손으로 널 처형하겠다.”

태석이 주현의 머리카락을 놓았다. 그러곤 한 걸음 물러섰으나 주현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는 눈은 맹금류처럼 매서웠다.

검붉은 눈동자가 담요에 감싸인 아기를 다시금 응시했다. 아기를 끌어안은 채경은 이를 악물고 있는 듯 턱에 힘이 잔뜩 들어간 채였다.

“으우…….”

허공을 맴돌던 아기의 눈이 주현에게 닿았다. 자그마한 손이 담요에서 나왔고, 희고 통통한 팔은 주현을 향해 뻗어졌다. 그 순간 긴장이 탁 풀렸다. 절망도, 체념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주현은 그저 몸에서 힘을 빼고 작은 손톱을 눈에 담았다.

“제가 죽으면, 저 아이는 보육원으로 돌아갑니까?”

주현의 팔과 어깨를 쥔 두 사람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주현은 손가락을 톡톡 두드려 승철과 세화의 손 위로 모스부호를 보냈다. 가만히 있으란 내용에 승철이 떨리는 숨을 뱉음과 동시에 세화가 침통하게 눈을 감았다.

여전히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던 태석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사냥감의 크기를 가늠하는 뱀처럼, 혹은 티 나지 않게 화를 참는 사람처럼.

맹수가 달려오는 걸 보면서도 피하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자살한 게 되는 걸까? 주현은 이렇다 저렇다 확실하게 말할 수 없었지만, 답을 내려 줄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세상에 없다.

‘우리, 자살만은 하지 말자.’

눈동자와 입술밖에 보이지 않았음에도 홍연우는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웃을 때면 입술 끝이 부드럽게 말려 올라가는데, 그걸 보고 있노라면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어졌다.

아련한 추억을 곱씹던 주현은 문득 연우보다 딱딱하면서 동시에 가끔 장난스럽게 웃는 남자를 떠올렸다. 그의 가이드. 그러고 보면 차인호에게 거절당해서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날 그가 ‘아니요’라고 말했다면 주현은 오늘 억울함으로 울었을지도 모른다.

‘아…….’

또 차인호를 떠올리고 말았다. 사실 차인호만이 아니다. 거칠게 내려놓은 탓에 허공에서 흔들리던 수화기의 은색 줄, 휴게실에서 흘러나오는 이름 모를 연예인의 웃음소리, 꿉꿉하고 적막한 복도의 공기까지. 마치 사진처럼 주현의 기억에 콱 박혀서 지워지지 않았다.

영원히 차인호에게 어떠한 흔적도 남길 수 없다는 걸 확인받았을 때의 절망이 얼마나 크든 이젠 아무 상관 없는 것이 되었다. 강하게 붙잡힌 팔이 아팠지만 지금 신경 쓸 건 그게 아니다.

형형한 눈빛으로 주현을 내려다보던 태석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폭주 에스퍼가 웃었고, 그것이 답이었다. 어금니를 깨물며 성큼 다가온 태석이 손을 치켜들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눈이 멀 정도로 강렬한 붉은색이었다.

* * *

어둡고 칙칙한 C동 복도를 바퀴 달린 수레가 지나갔다. 상자가 가득 쌓인 수레를 밀던 남자는 모퉁이 너머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황급히 몸을 돌렸으나,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억지웃음을 지었다.

“퇴근하십니까? 오늘은 일찍 돌아가시네요.”

“아, 네. 장사도 잘 안 되고 해서요.”

“뭐, 아침부터 일이 많았으니까요.”

홀로 중얼거리던 직원이 수레를 보곤 의아한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수레를 끌던 남자, 희록은 속으로 기도하며 수상해 보이지 않도록 어깨를 폈다.

“이 상자들은 뭡니까?”

“어, 음, 유통기한이 지나서 폐기할 물건들입니다.”

C동에 딱 하나 있는 매점에는 살 사람이 적은 만큼 물건도 적게 들어온다. 오가며 한 번씩 마주칠 뿐인 직원이 그것까지 알 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그냥 폭주 에스퍼한테 팔아도 될 텐데요. 걔네는 그것도 감지덕지죠.”

“하하, 고소라도 당하면 골치 아프니까요.”

“녀석들이 고소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무튼 수고하십쇼. 저도 가 보겠습니다.”

“네, 네. 들어가세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인 희록은 누가 잡을까 재빠르게 수레를 끌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C동 뒤편에 있는 직원 주차장에 도착한 그는 비를 맞으며 가장 위에 있던 상자를 조수석으로 밀어 넣곤 남은 상자를 마구잡이로 트렁크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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