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밤비
숨 막히는 여름에는 수돗물도 미지근하다. 그래서 그런지 몇 번이고 세수해도 정신이 확 깨어나지 않았다.
수도꼭지를 잠근 주현은 머리카락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멀거니 응시하다 고개를 들었다. 물때 낀 더러운 거울에 비친 얼굴은 생기라곤 하나도 없이 창백하고 우중충했다. 썩기 직전의 과일처럼 섬뜩한 검붉은색을 보고 있자니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전 주현 씨 눈 좋아해요.’
쾅! 쨍그랑, 금이 가 있던 거울이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깨졌다. 주먹을 중심으로 파동처럼 깨진 유리 조각이 세면대와 타일 위로 후두두 떨어졌다.
당신 때문에 이젠 거울 하나 제대로 못 보게 생겼다고, 차인호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불만을 움켜쥔 주현이 눈을 꾹 감았다 떴다. 깨진 거울은 조각조각마다 하나의 거울이 되어 주현의 얼굴을 비췄다. 되는 일이 없다.
* * *
“목격자든 뭐든 현장에 개미 새끼 한 마리 남겨 두지 마라. 알겠나?”
“네.”
요즘 태석은 유독 분위기가 안 좋다. 평소에도 살가운 사람은 절대 아니었지만, 최근에는 직원들마저 잔뜩 긴장한 채 그에게 다가갔다. 채경이 지나가는 말로 집에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거 아니냐고 추측했는데, 뭐가 되었든 괜한 화풀이는 사절이었다.
오늘 주현의 임무는 비교적 간단하지만, 심적으로 지치는 암살 임무였다. 너무나도 꽁꽁 싸매서 오히려 눈에 띄는 검은 옷을 입은 주현이 차에 올라탔다.
덜커덩, 익숙한 산길을 내려가는 차 안에서 주현은 타깃에 대한 서류를 읽었다. 상대는 협회의 연구원이었던 이들로, 1년 전 돌연 퇴사하곤 그대로 잠적했다. 협회는 선임 연구원인 만큼 기밀을 많이 알고 있는 둘을 은밀하게 추적해 왔다.
보고서에 따르면 수상한 움직임은 몇 달 전부터 관찰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전, 두 사람이 협회에서 다양한 이유로 폐기했던 실험을 독자적으로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사회에 혼란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실험이라 두 사람을 ‘처리’하기로 했다는 문장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주현은 한숨조차 내쉬지 않고 고개 돌려 빠르게 지나가는 창밖 풍경을 눈에 담았다.
고작 이런 게 죽을 정도의 죄냐는 물음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폭주 에스퍼를 태운 차는 외진 산길 아래에서 멈췄다. 무기를 점검하고 차에서 내린 주현이 제대로 된 길조차 없는 산을 올려다보았다. 들키지 않기 위해 탐지기조차 없이 오직 지도 하나만 들고 등산하게 생긴 주현이 푹 눌러쓴 모자 위로 머리를 긁적였다.
“얼른 다녀와라.”
따라서 내린 직원이 품에서 담배를 꺼내 피우며 차에 몸을 기댔다.
말과는 달리 직원도 주현이 금방 돌아올 거라곤 생각하지 않을 터다. 그야 지금은 달조차 뜨지 않은 어두운 밤이고, 손전등 하나만 들고 험한 산을 오르는 건 상당히 고된 일일 게 분명하니까.
낮보다는 선선한 바람을 가르며 주현이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산짐승의 기척이 들려왔다. 빽빽한 나무 틈새로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짐승의 눈동자가 보였으나 주현은 신경조차 쓰지 않으며 올라갔다. 덤벼들지 않을 짐승이나 존재조차 확신할 수 없는 유령 따위보단 전등 앞으로 달려드는 나방이 훨씬 더 성가셨다.
워낙 길이 험해 몇 번이나 능력을 써 가며 겨우 목적지에 도착한 그가 손전등을 끄곤 풀숲에 몸을 숨겼다.
나름대로 크고 예쁜 2층 주택은 갈색과 녹색으로 칠해져 낮에 언뜻 봐선 알아채지 못할 듯했다. 그러나 지금은 밤이고, 창문으로 새는 불빛은 너무 많은 걸 끌어들인다. 가령 날벌레, 짐승, 그리고 암살자 같은 것들.
주현은 능력을 사용해 풀 밟는 소리조차 내지 않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곳곳에 경보기와 트랩이 있었지만, 지금껏 수많은 임무를 수행해 온 주현이 보기엔 너무나도 허술했다.
창문으로 가까이 다가가서 안을 보자 임무 파일에서 본 남녀가 흰 가운을 입은 채 실험에 집중하고 있는 게 보였다. 창문 반을 커튼이 가린 탓에 정확히 무엇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주현이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그가 해야 하는 건 오직 두 사람을 죽이고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은 채 유유히 빠져나오는 것뿐이다.
임무가 내려온 이상 그가 하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가 임무를 대신 받고, 결국 어떻게든 두 연구원은 죽는다. 주현이 할 수 있는 선택은 최대한 덜 고통스럽게 끝을 장식하는 일밖에 없다.
입술을 꾹 깨문 폭주 에스퍼가 창문을 열었다. 잠금조차 되어 있지 않은 창문은 성인 남성이 충분히 넘을 수 있을 정도로 널찍했다.
“당신 누구-”
털썩. 아프지는 않았을 터다. 그럼에도 주현은 감기지 않은 두 눈에 스민 두려움을 마주 보지 못하고 남은 타깃을 향해 몸을 돌렸다.
빈 유리컵이 날아왔다. 눈금이 있는 걸 미루어 실험에 쓰는 컵인 것 같았다. 컵을 던진 여인은 덜덜 떨며 메스를 쥐고 있었다.
“무, 무슨 짓을 한 거야. 나가- 컥!”
주현도 그러고 싶었지만 현실이 녹록지 않다. 쓰러진 여인을 잠시 내려다본 그는 속으로 악몽을 하나 추가하며 발을 돌렸다.
‘어차피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야.’
그가 하지 않았다면 승철이나 세화가 대신 이곳에 왔을 것이다. 주현은 지워지지 않는 죄책감을 손에 쥔 채로 계단을 올랐다. 다른 동료는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확인해야 했다.
2층은 생활 공간으로 보였다. 나무로 지어진 복도를 걷던 주현이 닫힌 문을 하나씩 열었다. 이젠 먼지만 쌓일 게 분명한 침대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돌아 나온 그는 마지막 문을 열었다.
“…….”
문이 열림과 동시에 훅 끼친 달큼한 분유 냄새에 폭주 에스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밤벌레가 우는 어두운 산길을 오를 때도 갖지 못했던 공포를 한껏 느끼며 천천히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제발 비어 있길 간절히 빌며 들여다본 요람엔 자그마한 아기가 누워 있었다.
“아.”
뇌가 명령하기도 전에 터져 나온 탄식은 아기를 깨우기에 충분했다. 인간보단 짐승에 가까운, 이지 없는 눈이 말갛게 빛났다.
“아, 아…….”
숨을 쉬기 위해 입을 벌렸으나 제대로 된 단어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주현은 차게 식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애초에 바로 몇 달 전 사진 속 여인은 배가 부풀지 않았는데 이게 무슨 일인지 이해조차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유야 어찌 되었든 아기는 이곳에 있고, 주현은 죽여야 하고, 요람에 담긴 몸은 작고, 너무나 작고…….
주현은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질색한다고 할 수 있다. 사랑받고 큰 아이들의 말간 얼굴을 보고 있자면 그렇게 자라지 못한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또 무작정 싫어하기에는 아이들의 통통한 볼에 민재가 담겨 있어서. 아기자기한 손에는 은비가 스며 있으며, 천진한 미소엔 서하와 서후가 있는 까닭으로. 한때 그가 처음으로 사랑했던 아이들이 온 세상 모든 아이에게서 보인다.
그래서 주현은 아이를 해칠 수 없었다. 그런 경험은 한 번이면 족하다.
머뭇거리며 뻗어진 손은 아기의 보드라운 볼을 스쳤다. 어설프게 눈을 깜빡이던 아기가 다리를 동동거리며 주현의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주현은 울 것 같은 기분으로, 그러나 울진 않으며 조심스럽게 따끈따끈한 아기를 안아 들었다. 치아 하나 없는 잇몸이 드러나며 해맑은 미소가 피어났다.
“내가 네 부모의 원수야. 그렇게 웃으면 안 돼. 알아? 그러면 안 된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는 분노하며 울기는커녕 주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붉은색이 신기한지 바동거리는 손을 차마 맞잡지 못한 주현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1층에서 싸늘하게 식은 채 누워 있을 두 사람을 생각하면 뱃속에 차가운 돌덩이가 앉은 기분이 들었다. 아기를 안고 있는 것마저 죄스러웠으나, 그는 날 때부터 죄인이었던 탓에.
“나중에, 만약 네가 커서도 내가 살아 있으면…… 복수하러 와.”
하지 말아야 할 이유 수백 개와 해야 할 이유 하나. 단 하나의 이유를 움켜쥔 주현이 한참을 망설이다 아기를 품에 꼭 안았다. 아기 특유의 단내가 주현을 슬프게 만들었다.
담요로 아기를 감싼 주현이 1층으로 내려왔다. 용도를 알 수 없는 큼지막한 기계로 정신없는 거실을 지난 그는 미동 없이 누워 있는 두 시신 앞에서 잠시 멈췄다. 담요 틈으로 눈만 빼꼼 내민 아기는 작은 칭얼거림조차 없이 그저 얌전했다.
받을 사람 없는 사과는 자기만족일 뿐이다. 입술을 꾹 깨문 주현이 망설임을 버리며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