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89화
‘하필이면 SS급 가이드의 눈에 띈 녀석이라 그냥 무시할 수가 없구먼.’
우주의 반복된 요청으로 그와 만나러 가기 전, C동 센터장 두식은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즉, 당시 우주와 별이를 돌봐 주었다던 가이드가 이안이라는 말이다.
“……하아.”
예나 지금이나 이해할 수 없는 남자다. 사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편지를 소중하게 쥔 주현이 고개를 뒤로 꺾으며 그제야 내내 긴장하고 있던 몸에서 힘을 풀었다. 임무가 끝났다.
* * *
정신적 피로도는 엄청나지만 SS급 가이드의 가이딩 덕에 몸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여기저기 크고 작은 구멍이 난 주현의 옷은 폐기 처분되었다. 새로 받은 옷은 조금 뻣뻣했으나 금방 익숙해질 것이다.
‘반란군의 정보를 하나도 남김없이 다 털어 내라.’
태석은 마치 주현이 반란군과 한패라는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몇 번이고 같은 질문을 받았던 주현은 순순히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모든 정보를 털어놓았다. 단 하나, 반란군이 차인호의 팬이라고 했던 말만 빼고.
주현이 생각하기에 그건 협회의 누구도 알 필요 없는 정보였다. 반란군도 인간인 이상 연예인 한둘쯤 좋아할 수 있는 거고, 그런 사적인 영역까지 떠벌릴 필요는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
의심 많은 협회의 헛짓거리에 차인호가 괜히 휘말릴 필요는 없다. 이불을 발로 밟던 주현이 멈춰 서서 발목을 스치는 비눗물을 응시했다.
C동에 있는 세탁기는 구형이지만 그럭저럭 쓸 만했다. 유일한 단점은 이불 빨래가 안 된다는 건데, 오래된 세탁기는 물을 머금고 무거워진 이불을 탈수시키지 못했다. 그렇기에 이렇게 가끔 이불을 모아 건물 옥상에서 발로 밟아 가며 빨래하곤 했다.
오늘 당번은 주현과 승철이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신나게 이불을 빠는 승철을 힐긋 본 주현이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고, 완전히 여름이 온 하늘엔 큼지막한 뭉게구름 몇 덩이가 유유자적 떠돌아다녔다. 손으로 눈을 가려도 뜨끈한 햇볕은 손등을 뜨겁게 할 뿐이었다.
“그거 안 덥냐?”
손을 내리자 여전히 이불을 밟던 승철이 주현을 향해 턱짓했다. 주현은 새하얀 후드티를 입고 있었다. 소매를 최대한 걷었음에도 덥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참을 만해.”
“참지 말고 그냥 다른 거 입지?”
합리적인 말이었으나 주현은 그러겠다고 대답하지 않았다. 승철도 굳이 뜯어말려야겠다는 생각으로 한 말은 아닌지, 어깨를 으쓱이곤 다시금 빨래에 집중했다.
“그러고 보니 네 가이드 영화 나왔더라. TV에 예고편 엄청 나와.”
“나도 봤어.”
“보러 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쉽겠네.”
“……폭주하기 전에도 영화관 가 본 적 없어. 이제 와 아쉬울 것도 없거든.”
제법 높은 건물인 C동은 옥상에서 밖을 보면 꽤 멀리까지 보인다. 그래 봐야 철창 너머로 푸르른 녹음만이 가득하지만, 그래도 어딘가 마음을 뻥 뚫리게 해 주는 충만함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시원하고 상쾌한 그 기분이 느껴지지 않았다. 높은 하늘도, 바람결에 흔들리는 나뭇잎도, 보다 가까이서 날아가는 새의 깃털도, 무엇을 봐도 평소처럼 즐길 수 없었다.
“진짜로 영화관 한 번도 안 가 봤어?”
“그렇다니까. 가 보고 싶다 생각한 적도 없어.”
“A동에 영화관…… 아, 그렇지 참.”
주현이 A동에 갈 새도 없이 발현과 동시에 폭주했다는 걸 이제야 떠올린 듯 승철이 얼빠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는커녕 TV 한 번 마음껏 못 보고 자랐던 주현이 시큰둥하게 이불을 밟았다. 향긋한 세제 냄새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차인호는 여전히 바쁜지 일주일에 한 번 C동에 온다. 다시 그가 오려면 최소한 삼 일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발가락 사이로 젖은 천 특유의 묵직한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발을 굴릴 때마다 밀려 나가는 파동에 투명한 거품이 담겨 있다.
“난 서보라 영화 보고 싶던데.”
몸가짐을 똑바로 하라는 태석의 닦달로 단합회에 나가기 전 깨끗하게 면도했던 승철의 턱에는 다시금 삐죽삐죽한 수염이 돋아 있었다. 수염 때문에 몇 살 더 많아 보이는 승철은 햇볕을 담고 반짝이는 눈 때문에 이젠 제 나이로 보였다.
승철이 서보라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C동에서, 적어도 폭주 에스퍼 중에서는 없다. 주현이 피식 웃으며 맞장구쳤다.
“나도.”
“네가 보라 영화를 왜 봐?”
장난스럽게 물은 승철이 발을 휘둘러 주현에게 비눗물을 뿌렸다. 소중한 후드티가 더러워진 걸 본 주현이 인상을 팍 찡그렸다.
* * *
주현이 공중전화 앞에 선 건 오후 9시가 막 넘어가던 밤이었다. 일찍 쉬러 방으로 돌아가거나 임무에 나간 동료가 많아 주현 홀로 휴게실에서 몇 없는 채널을 돌리던 때였다.
따르르릉-
문밖에서 선명한 전화벨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주현의 움직임이 멈췄다. 지나가던 직원의 휴대폰 소리라기엔 지나치게 크고 날카로웠다.
따르르릉-
굳어 있던 주현의 귀로 다시금 전화벨 소리가 들려왔다. 휴게실 문을 열고 밖을 봐도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칙칙한 전등으로 밝혀진 회색 복도를 좌우로 살핀 주현이 정면에 있는 공중전화를 응시했다.
따르르릉-
오래된 공중전화가 비명 지르듯 울었다. 마치 TV에서 해 주는 옛날 공포영화 같은 분위기였다. 단 한 번도 귀신에게 겁먹어 본 없는 폭주 에스퍼가 불쑥 손 뻗어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졌다. 주현이 곧장 전화를 끊지 않은 유일한 이유는 에스퍼의 예민한 귀에 희미한 숨소리가 잡혔기 때문이다.
“누구시죠?”
-제가 운이 좋네요. 고작 여섯 번 만에 원하던 사람이 받았으니까.
주현은 공중전화로 전화 건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아무리 음질이 떨어지더라도 주현은 언제나 그를 알아볼 것이다.
“여섯 번이나 걸었습니까?”
-네. 네 번은 아무도 안 받았고, 한 번은 모르는 사람이 받았어요.
“그런데도 용케 여섯 번째 시도했네요.”
-대화하고 싶었으니까요. 주현 씨랑.
주현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왜 그런 말을 하냐고 화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 주현이 달아오른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복도에 있는 사람이라곤 그밖에 없는데도 주현은 고개를 푹 숙였다.
“애초에 이거 걸 수도 있는 거였습니까?”
-저도 놀랐어요. 혹시나 하고 해 본 거거든요.
“…….”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았는데, 하…….
모든 전화기가 그렇겠지만, 수화기를 귀에 딱 붙이고 있으니 꼭 차인호가 귓속말이라도 하는 기분이 들었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문 주현이 회색 벽에 등을 기댔다.
-그 라이터, 취미 생활에만 쓰기로 저랑 약속해요.
의아하게 눈을 깜빡인 주현이 품속 주머니로 손을 집어넣었다. 얼음으로 뒤덮였던 라이터는 임무 후 빛나가 가져다주었다. 깨끗이 닦인 라이터가 전등 아래에서 빛을 반사했다.
“갑자기 라이터는 왜요?”
-생각해 보니까 불장난이라도 하면 위험할 것 같아서요.
“제가 철없는 어린애인 줄 아십니까?”
-차라리 그러길 바라는 중입니다. 철없는 어린애는 이기적이기라도 하니까.
딸깍. 뚜껑 열린 라이터에 불이 붙었다. 그를 잡아먹었을지도 모를 불꽃을 응시하던 주현이 한숨치곤 가볍지만 숨결치곤 씁쓸한 숨을 뱉어 냈다.
게이트 너머에서 있었던 일을 차인호가 어떻게 알았나 싶으나, 현장에 텔레파시 능력자가 있었던 만큼 목격자도 많으니 어떻게든 소문을 들었을지도 모른다.
고작 라이터 이야기 하나 하기 위해 누가 받을지 모르는 공중전화로 여섯 번이나 전화를 건 차인호. 기대하면 안 되는데 자꾸만 이게 차인호 나름의 걱정이라고 생각되는 이유는 뭘까?
벽에 기댄 채로 스르륵 주저앉은 주현이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팔을 스치는 두꺼운 회색 수화기 줄이 차가웠다.
‘가끔은 속내를 말하세요. 말하지 않으면 통하지 않는 것들이 있으니까.’
빛나의 얼굴이 흐릿하게 지나갔다. 살면서 주현의 기분을 궁금해한 사람은 거의 없다. 유년기 내내 입 다물고 최대한 존재감을 죽이려고 애쓰며 살았던 주현은 속마음을 타인에게 말하는 일에 상당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더운 여름밤임에도 한껏 웅크린 주현이 패배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제 자존심을 쓰레기처럼 구겨 버려요.”
주인의 말 한마디에 앉고 구르는 개. 산들바람에 무너지는 볼품없는 담벼락. 그런 것들이 된 기분인데 그중에서도 가장 나쁜 점은 무너지면서도 기쁘다는 사실이다.
단언컨대 그게 최악이었다. 아무리 거센 파도가 밀어닥친대도 꿋꿋하게 서 있는 것만큼은, 그것만큼은 온전한 그의 의지이자 자랑이었는데.
“앞으로도 그럴 겁니까?”
그 자리에 선 채로, 결코 다가오지 않으면서 마치 잡아 줄 듯 손을 내밀며.
“앞으로도 전 공적인 일입니까?”
침묵이 길다. 그럴수록 희망 또한 커진다는 걸 차인호가 아는지 모르겠다. 안다면 나쁜 놈이고, 모른다면 더더욱 나쁜 놈이다.
아무도 없는 복도에 처량하게 앉아 동아줄을 잡듯 수화기를 움켜쥔 주현이 겁에 질린 아이처럼 눈을 감았다. 두려움에 떨 바엔 달려드는 걸 선택할 남자가 비루한 개처럼 떨고 있다. 이토록 부끄러운 꼴을 해도 원하는 걸 손에 넣기만 한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가치 있는 희생이다.
그리고, 그리고…….
-네.
실패한 희망은 절망이 되어 돌아왔다. 주현은 눈앞에 차인호가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가 있었다면 주현은 멋대로 가이딩 룸을 벗어난 죄로 며칠은 독방 신세였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