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88화
주현은 죽음을 각오했다. 이미 옛날에 한 일이긴 하지만, 이번에 다시 한번 굳게 마음먹었다. 비록 타 죽는 건 인생 계획에 없던 일이긴 하나 그래도 받아들였다는 말이다.
그래서 주현은 자신이 불꽃 속에서 울부짖지도, 연기에 잡아먹혀 헐떡이지도 않는 데 의문을 가졌다.
“형, 진짜……. 이런 짓 다시는 하지 마요.”
빛나의 떨리는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주현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바닥에 떨어진, 정확히는 꽁꽁 언 채로 바닥에 덩그러니 누워 있는 라이터를 응시했다.
능력을 쓴 걸로 추정되는 에스퍼가 짙은 안도가 밴 얼굴로 라이터를 주워 들었다. 덜덜 떨리는 손이 애처로울 지경이었는데 본인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뭐 저런 정신 나간 놈이 다 있어?”
주현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아직 적은 그대로 있고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줄기들이 통째로 불에 타는 동안 그들이 도망갈 시간을 벌 생각이었던 주현이 강하게 혀를 찼다.
집중이 끊겼는지 줄기는 가벼운 손길로도 쉽게 풀렸다. 그러나 여전히 상황은 최악이었다. 주현은 숨이 넘어가기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예상해 보려 했으나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건지 둔해진 머리는 제대로 일하지 않았다.
비틀거리는 주현의 앞을 세 사람이 지키듯 가로막았다. 그제야 주현은 그중 한 사람이 집요하게 시비 걸며 대놓고 그를 미워하던 사람이라는 걸 알아챘다. 그가 왜 앞을 막아서는지는 몰라도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곤란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여자의 얼굴을 노려보던 주현이 마지막 힘을 짜내기 직전, 평소보다 빨간 눈동자가 빠르게 옆쪽을 응시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남자가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투명한 안경 너머 언뜻 비치는 눈이 주현 따윈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여자에게만 닿아 있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자.”
“마침 잘 왔다. 좀 도와줘. 쟤네만 죽이면-”
“우리 일은 살인이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꼭 필요한 때가 아니면 사람 죽이지 말라고 했잖아.”
“지금이 필요한 때야!”
“고집부리지 말고. 벌써 다들 갔어. 너만 오면 끝이야.”
잘은 몰라도 반란군이 물러나려는 것 같았다.
순순히 보내 줄 순 없었다. 주현은 능력으로 두 사람을 잡으려 했으나 핑 도는 머리로 인해 그러지 못했다. 쓰러지는 몸을 잡아 준 사람은 빛나였다. 지독한 기름 냄새가 풀풀 풍기는데도 빛나는 개의치 않았다.
“너 각오해. 다 일러 버릴 거니까!”
반란군은 그 말을 끝으로 사라졌다. 말 그대로 증발하듯 눈앞에서 갑자기 지워졌다. 아무래도 뒤늦게 등장한 남자의 능력인 것 같았다.
“하아, 드디어 끝났다…….”
“반란군을 눈앞에서 놓쳤는데 그런 말이 나와?”
“너도 지금 다행이라고 생각하잖아.”
“주현이 형, 괜찮아요?”
이름 모를 두 에스퍼의 대화를 듣던 주현은 빛나의 물음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대답하려 했다. 난 괜찮고, 아무 문제 없으며, 그냥 가이딩 주사 하나만 맞으면 걸어 다닐 수 있을 거라고. 전원 끊기듯 정신을 잃지 않았다면 그리 말했을 것이다.
쓰러지기 전 다급한 목소리를 여럿 들은 것도 같았다.
주현은 볼을 스치는 뜨뜻한 바람을 느끼며 눈을 떴다. 그는 감색 천막 아래에 누워 있었다. 게이트 밖에 세워졌던 천막은 대충 구색만 맞춘 임시 구조물이라 볼품없었지만 그래도 부상자가 누울 수 있는 간이침대 정돈 있었다.
“일어났어?”
이안은 늘 그렇듯 빙글빙글 웃으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태평한 얼굴에 화도 나지 않았다.
주현은 더듬거리며 심각한 부상을 입었던 복부를 매만졌다. 구멍 뚫린 옷에 손가락이 걸렸지만, 그 아래 피부에는 어떠한 상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몸에서는 여전히 불쾌한 기름 냄새가 났으나 이미 코가 익숙해졌는지 참을 만했다.
“나 없었으면 진짜 죽었을걸? 고마워해도 돼.”
“……애초에 당신 때문에 휘말린 거잖아.”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은 주현이 묘하게 무거운 머리를 문질렀다. 기름으로 적셔진 머리카락이 손가락을 간질였다.
“반란군은 놓쳤지만 그래도 전투까지 했고, GN-29가 반란군의 아지트였다는 것도 밝혀졌으니 임무는 성공이라고 할 수 있어.”
이안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미끈거리는 얼굴을 문지르던 주현이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막 밖에서 사람들의 인기척과 이런저런 대화가 들려왔다. 누구도 두 사람을 방해하지 않았다.
피와 기름과 흙냄새가 맴도는 천막 안엔 정적이 가득했다. 미끈거리는 손가락을 멍하니 내려다보던 주현은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아직도 죽고 싶어?”
이안은 싸늘하게 느껴질 정도로 무감정한 표정이었다. 웃지 않으면 의외로 그는 제법 무뚝뚝한 인상이었다. 그 사실을 새삼스럽게 되새기던 주현의 머릿속에 오래전 나누었던 대화가 문득 떠올랐다.
‘무기력하게 늘어져서는. 네가 인형이랑 다를 게 뭐야? 죽고 싶으면 그냥 죽지 그래?’
‘나도 그러고 싶어.’
울면서 웅크리던 어린 주현을 이안은 한 번도 동정하지 않았다. 동정할 정도로 아끼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아니. 죽을 만큼 살고 싶어.”
적어도 매칭이 유지될 때까지는 살아 숨 쉬고 싶다.
겨우 잊고 있던 차인호가 다시금 불쑥 튀어나와 주현의 마음속을 마구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다정하게 웃는 차인호. 주현의 부상에 화내는 차인호. 입 맞추는 차인호. 그를 사랑해 줄 것 같은 차인호.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은 주현은 어깨를 툭 치는 느낌에 지친 낯으로 손을 내려놓았다. 즐겁지도 않으면서 달고 다니는 미소가 어느새 돌아온 게 시야에 들어왔다. 이안은 알록달록한 봉투 하나를 내밀고 있었다.
“받아. 전해 달라고 부탁받았거든.”
“누구한테?”
“꼬맹이들.”
“당신 애들 싫어하잖아.”
“뛰어난 가이드가 늘어야 내가 좀 더 놀 수 있지 않겠어? 이른바 미래를 위한 투자라는 거지.”
그 말을 끝으로 이안은 미련 없이 일어나 천막을 벗어났다.
귀여운 토끼 캐릭터가 여기저기 그려진 편지 봉투를 만지작거리고 있자니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팔락이는 천을 걷으며 들어온 사람은 빛나였다.
어딘가 우중충한 얼굴로 다가온 그는 침대 옆, 아직 온기가 가시지 않은 의자에 털썩 앉았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다친 곳이 없어 보였다. 가이딩으로 이미 치료받은 걸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멀쩡해 보여서 다행이었다.
“왜 그랬어요?”
“뭐가.”
“왜 죽으려 했냐고요.”
오늘따라 그에게 삶과 죽음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이 왜 이리도 많은 건지. 늘 하던 대로 했을 뿐인 주현이 의아한 시선으로 빛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뺨에는 말라붙은 핏방울이 묻어 있었는데, 아마 주현의 것이 아닐까 싶었다.
물끄러미 적갈색 흔적을 바라보던 주현은 이유 모를 부끄러움을 느끼며 순순히 자신의 용도를 설명했다.
“애초에 이런 규모 있는 팀에 날 집어넣은 이유가 그거야. 위험한 상황에서 내던지고 도망칠 카드.”
“…….”
“몰랐다고는 하지 마. 안 믿으니까.”
입술을 달싹이던 빛나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에게서도 희미하게 역한 휘발유 냄새가 났다.
“형이 미친 짓 했을 때, 저, 진짜 무서웠거든요.”
“왜?”
“그야 이제 막 친해졌다고 생각한 사람을 잃으면 슬픈 게 당연하잖아요. 그냥 일로 만나 동료도 아닌데. 물론 동료가 죽어도 슬프긴 하지만.”
주현과 빛나가 친한가? 현장에서 만나 대화 몇 번 했다고 친해지는 걸까?
가볍게 깍지 낀 빛나의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아무리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다 해도 에스퍼로서 수많은 임무에 투입되었을 그가 이토록 의기소침한 이유를 주현은 알 수 없었다.
단순히 놀란 거라면 금방 회복될 터다. 눈앞에서 사람이 휘발유를 뒤집어쓰면 주현도 어느 정도 놀라긴 할 테니까. 충격을 줘 미안했으나 주현은 사과할 이유도,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그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심지어 살아서 돌아오기까지 했으니 딱히 할 말도 없었다.
겸연쩍은 표정으로 주현이 침묵하자 빛나가 자조적으로 피식 웃었다. 앳된 볼에 묻은 핏자국이 점점 더 거슬리기 시작했다.
“형은 너무 과묵해요.”
“내가? ……그런가?”
“네. 맨날 일 얘기만 하지, 형에 대한 이야기는 묻기 전엔 안 하잖아요.”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 얘기를 먼저 혼자 떠드는 사람이 이상한 게 아닐까? 머릿속에 떠오른 질문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빛나의 말이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느꼈기 때문이다.
“가끔은 속내를 말하세요. 말하지 않으면 통하지 않는 것들이 있으니까.”
스물세 살이라던 빛나는 조금 어른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주현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이만 쉬라는 말과 함께 빛나가 나가고, 홀로 남은 주현은 기름 자국이 묻은 봉투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분홍색 바탕에 토끼가 그려진 편지지는 나름대로 또박또박하게 쓴 글씨로 가득 차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우주입니다. 잘 지내셨죠?]
첫 문장을 읽은 주현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편지는 우주와 그의 동생 별에게서 온 것이었다. 쓰레기장에서 그들을 구했던 주현은 저도 모르게 슬며시 미소 지은 채 편지를 읽어 나갔다.
나이에 비해 철이 빨리 들었던 우주는 여전히 영특했다. 다치지는 않았느냐, 밥은 잘 챙겨 먹고 있느냐, 잘 씻고 있느냐. 마치 동생 대하듯 잔소리를 늘어놓은 우주에 주현이 눈을 감으며 웃었다.
뒤에는 별의 편지도 있었는데, 사실 무슨 말인지 알아볼 수는 없었으나 그래도 주현은 충분히 고맙고 즐거웠다. 에스퍼가 된 후 악마라며 손가락질당하거나 경멸 어린 시선은 많이 받았지만 두 아이처럼 감사 인사를 해 준 사람은 거의 없었으므로.
마음속이 따뜻하고 몽글몽글한 무언가로 채워지는 게 느껴졌다. 혹여나 해지기라도 할까, 조심히 봉투에 편지를 넣은 주현은 문득 이것을 이안이 주었다는 걸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