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87화
“드디어 잡았네.”
멍한 눈동자는 이젠 거의 빛을 잃었다. 몸부림조차 없는 주현에 빛나가 울기 시작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안전한 방어막 뒤에서 주저앉은 에스퍼, 시환은 어쩌다 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지 떠올렸다.
* * *
폭주 에스퍼를 구해 오라고는 했지만 이안도 현재 그들의 전력이 너무 낮다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랬다간 전멸할지도 모른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면 확실했다.
“그러다 이안 씨가 납치되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난 괜찮아. 무사히 게이트에서 나오는 걸 봤다고 했으니까.”
“누가 뭘 봤다고요?”
“너희가 약한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어딘가 쓸모는 있을 거 아냐? 뭐라도 하지 그래.”
질문을 당연하게 무시한 이안은 어딘가 심통 난 얼굴이었다. 에스퍼로서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에 다들 표정을 굳혔으나 누구도 나서지 못했다. 침묵에 이안이 짜증스레 고개를 내저은 순간이었다.
“지금은 게이트를 나가서 상황 보고 후 지원과 함께 다시 들어오는 게 합리적입니다.”
무뚝뚝한 은율의 말에 탐사대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의 말을 던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밖엔 답이 없었다.
“때마침 미로의 움직임도 멈췄으니까 얼른-”
“그건 안 돼요. 협회는 주현이 형을 구하러 오지 않을 거예요. 설령 구조 팀을 보낸다 해도 그땐 너무 늦어요.”
침울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고 있던 빛나가 불쑥 끼어들었다. 몇몇은 정곡을 찔린 표정을 지었고, 몇몇은 짜증 난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뭐 어쩌자고? 폭주 에스퍼 하나 구하자고 다 같이 반란군 품에 뛰어들기라도 해?”
소리친 사람은 아까도 폭주 에스퍼에 대해 가장 먼저 불만을 토해 냈던 에스퍼, 진성이었다. 그는 불안과 초조가 가득한 얼굴로 빛나를 위협하듯 노려보았다.
“해. 하다못해 가서 주현이가 죽었는지, 죽어 가는지, 죽였는지 정돈 보고 와.”
협회의 편애를 듬뿍 받는다는 SS급 가이드가 눈을 휘며 웃었다.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는 어쩐 일인지 섬뜩하게 느껴졌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그저 다정하고 상냥해 보였는데.
결국 상황을 보러 가게 된 사람은 세 명이었다. 빛나, 진성, 그리고 시환. 빛나는 자원했고, 진성은 능력 때문에 억지로 선정되었으며, 시환은 그나마 전투가 가능하다는 이유로 가게 되었다.
“하, 내가 왜 이딴 일에…….”
“이미 가게 된 거 그냥 조용히 가요.”
“다들 싸우지 마. 우리끼리 싸워서 뭐 해.”
“아까나 좀 말리지.”
빛나가 중얼거렸다. 아까라는 건 폭주 에스퍼를 다 같이 욕하던 때가 아닐까 싶었다. 괜히 찔린 시환이 입술을 내밀곤 딴청을 부렸다.
그렇게 한참을 걷던 세 사람은 순식간에 진지하게 변한 빛나의 얼굴에 따라서 몸을 낮추며 움직였다.
벽 너머의 광경은 끔찍했다. 여러 상처가 있지만 그래도 치명상은 없는 검은 머리 여자가 고동색 줄기를 조종하며 웃고 있었다. 사방을 둘러싼 줄기는 상당히 징그러웠으며, 무엇보다 시환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그 중심에 있는 폭주 에스퍼였다.
그는 여기저기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채 날카롭게 상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아플 것 같은 상처가 신경 쓰이지도 않는지 움직임에 망설임이라곤 없었다.
“하…….”
탄식은 진성의 입에서 나왔다. 힐끔 그를 보자 능력을 발동 중인지 크게 뜨인 눈이 보였다. 그의 능력은 텔레파시로, 가볍게는 생각부터 현재 보고 있는 장면을 상대에게 전달하는 것까지 할 수 있었다.
다만 장면을 보여 주는 건 오래 쓰지 못한다고 했다. 그래도 상황 파악 정도는 가능할 거라는 이안의 말에 억지로 왔음에도 맡은 임무는 제대로 할 생각인 듯했다.
바로 그때였다. 그들을 가리고 있던 줄기가 폭주 에스퍼를 잡기 위해 움직였고, 능력을 발동하느라 멍해 있던 진성의 반응이 조금 늦고 말았다.
파삭.
그 소리가 시환에겐 저승사자의 부름으로 들렸다. 순식간에 고개 돌린 두 사람의 시선에 온몸이 따끔거렸다. 이상한 위압감에 짓눌려 숨조차 못 쉬던 그는 갑작스러운 돌풍이 이마를 스치고 나서야 자신이 주저앉았다는 걸 깨달았다.
“혀, 형…….”
빛나의 목소리는 끊어질 듯 아슬아슬했다. 천천히 고개를 든 시환은 날카로운 줄기가 코앞까지 다가온 걸 보곤 화들짝 놀라 물러섰다. 그리고 모든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폭주 에스퍼의 등은 생각보다 작았다. 어쩌면 칼날처럼 날카로운 줄기가 몇 개나 그 몸을 뚫고 튀어나와서 그래 보이는 걸지도 모른다.
“주현이 형……?”
폭주 에스퍼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동색 줄기가 검고 붉은 몸을 감싸 쥐곤 허공으로 들어 올리는 걸 얼빠진 얼굴로 보며, 시환은 손이 덜덜 떨리는 걸 느꼈다.
‘왜 그랬지? 왜 그랬을까? 왜 우리를 구한 거지?’
탐사대에서 빛나와 이안을 제외하고 그에게 호의를 보인 사람은 없었다. 시환은 따로 그에게 시비를 걸거나 노려본 적은 없으나 말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남들과 다를 바 없었다. 심지어 진성은 게이트를 넘기 전부터 그를 못마땅해했었다.
“이거 없애요! 형!”
벌떡 일어난 빛나가 보이지 않는 벽을 마구 두드리기 시작했다. 방어막 주변으로 줄기가 넘실거리는 걸 보면서도 그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뭐 하는 거야! 너 죽고 싶어?”
“이런 식으로 살아나 봤자 쪽팔릴 뿐이야!”
능력을 계속 쓰느라 핏발 선 눈으로 진성이 빛나의 양팔을 뒤에서 잡았다. 그러자 빛나는 발로 방어막을 힘껏 찼다. 그러나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방어막은 의외로 튼튼하게 버텨 주었다.
시끄럽게 떠드는 그들을 힐끗 본 반란군이 흥미 없다는 태도로 가볍게 턱짓했다. 그러자 슬렁슬렁 움직이던 줄기들이 순식간에 그들을 향해 날아왔다.
퍽! 모든 줄기는 그들을 감싼 방어막에 막혀 허공을 맴돌았다. 그 징그러운 광경에 진성이 숨을 들이켠 순간이었다. 근처에서 꿈틀거리던 줄기들이 한순간 베어져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이 자리에서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명밖에 없다.
시환은 다 죽어 가는 남자가 도발하듯 웃는 걸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바람, 피우지 마. 더 놀아 줄 테니까……. 이 사람들은…… 건들지 마.”
죽음의 기미가 듬뿍 담긴 목소리는 떨고 있었으나 결코 두려움을 품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조소에 가까운 그 말에 반란군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구겨졌다.
“입만 살아서는, 언제까지 허세 부릴 수 있을 것 같아?”
콰드득, 폭주 에스퍼의 몸을 감싼 줄기가 한층 더 조여졌다. 입에서 터져 나온 피가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시환은 귀를 울리는 듯한 그 소리에 이를 악물었다. 그토록 무시하고 경멸하던 폭주 에스퍼에게 구해졌다는 사실도, 그가 눈앞에서 죽어 가고 있음에도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도, 전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결국 그는 벌떡 일어나 빛나를 따라 방어막을 때리기 시작했다. 진성이 어깨를 붙잡았으나 시환은 망설임 없이 뿌리쳤다.
“어차피 폭주, 아니, 주현 씨가 죽으면 이것도 사라져. 그럼 우리는 그냥 돌아가게 둘 것 같아? 차라리 지금 함께 싸우는 게 훨씬 나아.”
생각 없이 뱉은 말임에도 제법 그럴싸했다. 진성 또한 맞는 말이라 생각했는지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죽어 가는 사람이 만든 방어막치곤 지나치게 튼튼한 벽을 걷어차던 시환은 문득 시야 구석에서 줄기와는 다르게 움직이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가방……?’
전체적으로 검은 바탕에 빨간 포인트 컬러가 들어간 가방은 분명 주현이 메고 다니던 것이었다. 홀로 들썩이던 가방의 입구가 열리더니 회색 물통이 살며시 나왔다. 어찌나 조심스러운지 시환 빼곤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물통의 뚜껑이 천천히 열리곤 안에 든 액체가 조금씩 줄기를 적시기 시작했다. 곳곳에 조금씩 정체 모를 액체를 뿌리던 물통은 기어코 반란군과 주현에게까지 다가갔다.
“그러니까 아무리…… 이게 무슨 냄새야?”
“나무는 불에 잘 타지?”
회색 물통이 폭주 에스퍼의 머리 위에서 뒤집혔다. 쏟아지는 액체를 의심스럽게 보던 반란군의 얼굴이 곧 경악으로 가득 찼다.
“휘발유…….”
“뭐?”
“저거 휘발유야. 아까 가방에서 탐지했어.”
냄새까지 차단된 방어막 안에서 빛나가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말을 이해한 두 사람은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놀람과 공포가 마구 뒤섞인 얼굴이었다.
“휘, 휘발유를 왜 자기한테 뿌려?”
“그래야 줄기를 다 태울 수 있으니까.”
하나하나의 두께가 얇고 따로 움직이는 줄기를 몽땅 태우기란 요원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당수의 줄기가 주현의 몸을 붙잡고 있다. 즉, 그를 중심으로 뭉쳤다는 말이다.
“주현이 형! 형!”
빛나는 거의 악을 쓰며 외쳤으나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시환 또한 어깨가 부러질 것 같은 통증을 견디며 방어막을 깨기 위해 애썼다. 그게 제법 효과가 있었는지, 아니면 드디어 주현의 목숨이 간당간당한 건지, 방어막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훅 끼치는 역한 휘발유 냄새에 절로 미간이 구겨졌다.
“너 미쳤-”
“최소한 춥게 죽지는 않겠네.”
폭주 에스퍼가 웃었다. 제법 풍성한 속눈썹이 휘어지고, 날카로운 송곳니가 입술 틈새로 드러나고. 언뜻 봤음에도 그 미소는 지독히 자신만만했다. 마치 쥐를 발톱 아래에 둔 고양이처럼.
당황했는지 조금 느슨해진 줄기 틈으로 흉터투성이 손이 튀어나왔다. 딸깍. 경쾌한 소리와 함께 은색 라이터의 뚜껑이 열렸다. 희미한 전등 말곤 빛이 없는 공간에서 자그마한 불꽃은 눈이 아플 정도로 밝게 느껴졌다.
“안 돼! 주현이 형!”
주황색 불꽃이 바닥을 향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