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86화
피가 섞인 침을 바닥에 뱉은 주현은 피가 한 움큼 흘러나오는 옆구리를 힘껏 부여잡았다. 튼튼하지만 그래도 부드러움을 간직하고 있던 줄기가 돌연 칼날처럼 날카롭게 변해 옆구리를 내주고 말았다. 내장까지 다치지는 않았지만, 출혈이 제법 많아서 오래 버티기는 힘들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그는 해야만 했다. 이안과 빛나와 다른 팀원들이 게이트를 넘을 때까지. 하다못해 지원이 와서 반란군이 함부로 덤비지 못할 때까지는 버텨야 했다.
협회에 소속된 에스퍼로서 반란군에 SS급 가이드를 넘기면 안 된다는 훌륭한 생각을 가진 건 아니다. 다만 그는 맡은 임무를 할 뿐이다. 그 과정에서 다치는 사람은 적을수록 좋다.
“정말 끈질기구나? 너.”
상대도 그리 성한 꼴은 아니었으나 주현만큼 심각한 치명상을 입지는 않았다. 그야 주현에겐 인질이 있으므로.
아무래도 미로를 이루고 있는 줄기를 눈앞의 반란군이 다루는 것 같은데, 그녀가 심각한 상황에 처했을 때 어떻게 반응할지 모른다. 자신들이 가지지 못하면 너희도 못 가진다는 마음으로 아직 빠져나가지 못한 팀원을 공격할 수도 있고.
그것만은 사양인 주현이 끊임없이 몰려오는 줄기를 가로로 베었다. 주변이 잘려 나간 줄기로 가득해서 발 디딜 곳조차 없었다. 그런데도 망할 줄기는 수가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시간 끌어 봐야 소용없어.”
“그건 모를 일이지.”
언뜻 여유로워 보이지만 상대의 얼굴에 나타난 초조를 기민하게 알아챈 주현이 능력으로 곧장 반란군의 급소를 노리며 달려들었다. 하나하나 떨어뜨려서 보면 보잘것없지만, 수가 워낙 많아 성가신 줄기들이 이번에도 그를 방해했다.
“너 자꾸 그러면 다 일러 버린다?”
“누구한테?”
“차인호한테!”
붉은 피를 주룩주룩 흘리면서도 굳건히 서 있던 폭주 에스퍼가 피식 웃었다. 눈이 반으로 접히고, 한쪽 입꼬리가 조금 더 높게, 그리고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일러서 뭐 하게.”
반란군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어딘가 꿍한 표정으로 다시금 공격해 왔다.
헐떡이는 숨. 쏟아지는 땀과 피. 언제 끝날지 모르고, 죽고 나서도 자신이 한 일이 어떠한 도움이 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막막한 동굴 속에서 주현은 그의 가이드에 대해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차인호에 대해 주현이 아는 거라곤 너무나도 단편적이고 짧은 정보밖에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차인호의 어떤 부분을 좋아하게 된 걸까. 주현은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목숨 걸고 싸우는 자리에서 하기엔 태평한 생각일지도 모르나 그에게는 어떠한 고뇌보다 중요한 질문이었다. 아주 적은 확률을 뚫고 살아서 여길 벗어난다면, 차인호와 만나 어떻게 행동할지 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수없이 삼도천을 건널 뻔했던 주현을 몇 번이고 살려 주었던 차인호는 어떤 사람이지? 그의 태도는 어떻고, 어떤 말에 무슨 반응을 보이지?
그런 생각을 하느라 평소보다 조금 더 다쳤다는 자각은 있다. 하지만 그가 알기로 원래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상대를 생각하고, 모든 일에 의미를 부여하며, 조금 넋 놓고 사는 것 말이다.
그리고 결론이 나왔다. 의외로 싱겁고 빠르게 나왔다. 주현은, 폭주 에스퍼에다 미래도 없고 누구나 싫어하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괴물은, 차인호가 그를…….
“자꾸 그렇게 한눈팔다간 큰일 나는 수가 있어? 응? 아, 이미 큰일 났나?”
푹, 복부를 뚫고 나온 줄기는 다른 것들보다 좀 더 가늘고 훨씬 뾰족했다. 주현을 죽이는 게 목적인 반란군은 줄기를 비틀어 거칠게 뽑아냈다.
그럼에도 주현이 버틸 수 있는 이유는 이안에게서 억지로나마 폭풍 같은 가이딩을 받은 덕이었다. 주현은 멍하니 하얀 얼굴로 웃고 있는 적을 올려다보았다.
“……사랑해 줄 것 같아서.”
신주현이 차인호를 사랑하는 이유는 그가 자신을 ‘사랑해 줄 것 같아서’다. 결국 괴물은 사랑의 이유까지도 지극히 이기적이다.
“뭐? 한 번 더 말해 줄래?”
차인호는 몇 번이나 주현의 생명을 구했다. 울면서 그에게 입 맞췄고, 화가 난 듯하면서도 부드럽게 안아 주었다. 차인호의 미소는 너무나도 헤프고, 그 손길 또한 그렇고, 가이딩마저 따스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그렇다. 아무렇지 않게 다가오는 그를 보다 보면 꼭 사랑받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아주 오래전에 자신의 손으로 망가뜨린 작은 낙원에서 받았던 것처럼, 아무 걱정 없이 웃었던 유일한 나날들처럼.
그렇기에 기대하다 혼자 실망하고, 차인호가 미워서 견딜 수가 없는데 또 손 내미는 그를 보면 다시금 사랑이 차오르고. 지옥 같은 뫼비우스의 띠다. 그 속절없는 사랑 속에서 주현은…….
“너 뭐라고 했어? 못 들었단 말이야. 혹시 기권?”
똑바로 선 주현이 실핏줄이 터져 더욱 붉어진 눈으로 반란군을 노려보았다. 퉤 뱉어 낸 피가 바닥을 적셨다. 죽어 간다기보단 타오르는 시선이었다.
주현은 자존심이 상했다. 방어기제로서 철벽처럼 쌓아 올린 프라이드가 차인호의 생각 없는 행동에 멋대로 흔들린다. 타인의 일상적인 날숨 한 번에 휘청이는 자신을 보는 게 끔찍하고, 그럼에도 차인호는 좋으니까 그의 곁에 있고 싶다.
‘넌 화난 게 아니야. 슬픈 거지.’
슬픔이 분노의 가면을 썼다면 이 타는 듯한 원망은 원래 무엇이었을까.
“아냐, 됐다. 그냥 죽어라. 나도 시간 낭비 그만해야겠어.”
“너 짝사랑해 본 적 있어?”
“뭐? 아니, 없는데.”
“너무 미워서 콱 죽어 버리고 싶었던 적은?”
“아까부터 무슨 헛소리를…….”
주현은 제법 긴 시간 동안 싸우며 알아챈 게 몇 가지 있었다. 일단 그녀는 원거리 전투에는 익숙하지만, 근접전에서는 반응이 조금 느리다. 그리고 미로를 채우고 있던 갈색 줄기는 전부 하나로 이어져 있다.
후드득 떨어지는 핏방울이 애처롭다. 손끝이 차갑고 머리가 어지럽다.
그럼에도 주현은 두 다리로 똑바로 일어섰다. 겨우 이 정도로 무너져서 울기엔 그의 자존심은 달에 닿을 정도로 높고 날카롭다.
비록 쓸모없고 이기적인 괴물이라 해도 할 일은 하고 죽었다고 칭찬받고 싶었다. 다 죽어 가면서도, 피가 목구멍을 긁으며 끓고, 숨조차 제대로 쉬는 게 여의찮으면서도 주현은 오로지 그 이유만으로 일어서서 적을 보며 능력을 발동했다.
‘이게 자존심 상한다는 거야. 쓰다듬음 한 번 받으려고 주인 앞에서 배를 까며 나뒹구는 개새끼가 된 것 같으니까.’
지금쯤이면 얼추 도망갔을 터다. 주현과 싸우는 동안은 미로를 움직이지 못했을 테니 별다른 방해 없이 잘 도착했겠지. 만약 다른 반란군을 만나 잡혔다면, 그것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다.
폭주 에스퍼의 눈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가방에 닿았다. 옳은 일을 할 때였다.
* * *
상대를 무력화시킬 때 가장 좋은 방법은 무기를 빼앗는 것이다. 특히나 눈앞의 반란군처럼 몸싸움에 자신 없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에스퍼의 무기는 능력이고, 그걸 없애는 방법은 간단하다. 가이딩 수치가 떨어질 때까지 지구력 싸움을 하면 된다. 사실 말이야 쉽지, 아군 가이드가 없는 상황에선 그다지 효율적인 작전은 아니다.
주현은 여전히 꿈틀거리며 날아드는 줄기를 피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보면 볼수록 줄기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아쉽게도 수가 많아 중심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다.
“도망 하난 정말 잘 치는구나? 나 슬슬 짜증 나려 하는데.”
능력으로 틀어막은 복부가 델 듯이 뜨거웠다. 끊임없이 솟구치는 호르몬 때문인지 통증은 없었다. 이런 큰 상처를 입고도 아프지 않다는 건 결코 좋은 증상이 아니나 지금으로선 다행이었다.
“그거 잘됐네. 난 누구 열받게 할 때가 제일 기분 좋더라.”
“재수 없어.”
한 곳에서 갈라져 나온 거대한 나무줄기. 다행히도 없앨 방법이 아주 없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결심을 끝낸 주현이 숨을 몰아쉬고 입가의 피를 닦아 낸 순간이었다.
파삭. 작지만 명백한 인기척이 들려왔다. 두 에스퍼의 시선이 곧장 한 곳으로 향했다.
“아…….”
그곳에 있는 건 탐사 팀에 속한 에스퍼 두 명과 빛나였다. 소리를 낸 에스퍼가 하얗게 질린 얼굴을 했고, 다른 두 명은 들켰다는 걸 인지했는지 곧장 전투태세를 갖췄다.
이윽고 끝이 날카롭게 변한 줄기들이 세 사람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모든 생존 본능의 기조에는 공포가 있다. 굶주림에 대한 공포, 결손에 대한 공포, 고통에 대한 공포, 죽음에 대한 공포. 자신의 안위를 보존하고자 하는 욕구는 어느 정도 지성이 있는 생물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
전투에서 감정은 불필요한 것이다. 주현은 첫 번째로 공포를 버렸다. 생존에 가장 중요한 감정을 버린 에스퍼는 이제 모닥불에 달려드는 불나방과 다를 바 없다.
“아, 으…….”
뒤에서 겁에 질린 신음이 들려왔다. 비틀거리면서도 굳게 선 주현이 슬쩍 뒤를 살폈다. 혹시 몰라 달려왔건만 다행히 방어막이 시간 맞춰 만들어졌는지 다친 사람은 없어 보였다.
“자기희생도 그 정도면 병이야, 병.”
무언가 대답하려던 주현은 비꼬는 말 대신 검붉은 피를 울컥 뱉어 냈다. 이미 뚫려 있던 구멍을 조금 더 넓게 만든 줄기가 천천히 빠져나갔다. 신체 능력이 뛰어난 에스퍼라서 아직 숨이 붙어 있지, 일반인이었다면 진즉에 죽었을 상처였다.
얕고 빠른 숨을 내쉬며 간신히 서 있던 주현의 몸을 여러 갈래의 줄기가 감싸기 시작했다. 두 발이 땅에서 떨어지고 허공에 들린 그는 괴물에게 잡힌 인질 같아 보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