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85화
탐사 팀의 일원인 시환은 커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자꾸만 길이 바뀌는 미로를 무작정 헤쳐 나가는 건 체력보다 정신력을 많이 소모하는 일이었다. 통신기 덕에 게이트 위치가 어딘지는 알지만 계속해서 앞을 가로막는 벽 때문에 속도가 지지부진했다.
“저희 이러다 여기서 굶어 죽는 건 아니겠죠?”
“괜한 소리 하지 마. 늦어 봐야 이틀이면 협회에서 수색 팀 파견할 거야. 문제는 우리가 아니라-”
“이안 씨 쪽이지.”
좁고 사방이 막힌 미로에서는 소리가 울리고, 소곤거리는 대화도 모두의 귀에 들어갔다. 분위기가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하필이면 이안 씨가 그 두 사람이랑 떨어질 게 뭐람? 빛나는 전투원이 아니고 다른 한 놈은 폭주 에스퍼. 무슨 일 생기면 우리 다 모가지야, 모가지.”
동료의 울분에 시환이 크게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탐사 팀의 가장 큰 고민이 바로 이것이었다.
반란군과의 전면전이 아니라 1차 탐사를 위해 꾸린 팀인 만큼 전투보다는 수색과 은신에 초점을 맞춘 에스퍼가 많았다. 이 드넓은 미로를 그저 반란군 하나만 보고 무작정 머물기엔 S급 이상의 귀하신 몸들은 그리 한가하지 않다.
반란군의 꼬리를 잡는다면 그들의 커리어는 한층 풍부해질 것이다. 그걸 믿고 꿈에 부풀어 왔는데, 정작 반란군은 찾지도 못하고 오히려 지켜야 할 SS급 가이드만 잃어버리고 말았다.
“애초에 폭주 에스퍼가 꼈을 때부터 불안하다 했어.”
불쑥 터져 나온 누군가의 말은 다수의 동의를 얻으며 어두운 미로에 퍼져 나갔다. 한 가이드가 말조심하라는 듯 그의 어깨를 툭 쳤으나 한 번 열린 입은 닫힐 줄을 몰랐다.
“아니, 그렇잖아. 그 사람만 없었어도 이안 씨는 우리 옆에 붙어 있었을 거고, 일이 이딴 식으로 흘러가지도 않았을 텐데 원망 안 하게 생겼어?”
“동감. 난 아직도 왜 녀석이 여기 꼈는지 모르겠어. 가이드 잘 만나서 방송 몇 번 나온 게 본인이 잘해서 그런 건 아니잖아?”
“그건 그래. 그 자식만 없었으면-”
“없었으면 지금쯤 우리가 저 밑바닥에서 구르고 있었겠지.”
불쑥 끼어든 사람은 팀의 리더, 은율이었다. 그녀는 무심하고도 매서운 눈으로 큰 소리로 떠들던 에스퍼를 내려다보았다. 하나로 높이 묶은 머리카락이 흔들릴 때마다 어깨 너머 그림자가 괴물처럼 움직였다.
“이번 팀 구성은 협회 상층부의 지시로 이루어졌다. 상층부의 결정에 불만 있는 거냐?”
“그, 그건 아닙니다!”
“그럼 닥치고 뭘 해야 세 사람을 구할 수 있을지나 생각해.”
휙 돌아선 은율이 휴식은 끝났다는 듯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고, 다른 이들도 눈치 보며 하나둘 일어났다. 차가우면서도 불같은 그녀의 성격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어쨌든 이미 일은 벌어졌고, 뒤늦게 떠들어 봐야 사라진 가이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한숨을 푹 내쉰 시환이 가방을 고쳐 멘 순간이었다.
“소리가 멈췄어.”
“뭐?”
“여기 들어온 순간부터 계속 미묘하게 땅을 울리는 소리가 들렸거든. 그게 지금은 사라졌어. 정확히는 먼 곳에서 들리는 듯한…….”
극대화된 청력을 능력으로 가진 에스퍼가 눈을 감고 말했다. 집중했는지 미간을 찌푸린 그는 돌연 번쩍 눈꺼풀을 올렸다.
“이 너머에서 이안 씨 목소리가 들렸어요.”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바닥이었다. 아까 전, 공격을 퍼부어도 뚫리지 않았던 바닥이지만 이안의 위치가 파악된 이상 어떻게 해서든 뚫어야 했다.
“다들 비켜.”
콰르르! 은율의 능력이 발동하자 그토록 단단하던 바닥이 무슨 일인지 일반적인 줄기와 같이 크게 힘들이지 않았는데도 무너졌다. 심지어 다시 재생도 안 됐는데, 그들에겐 아주 다행인 일이었다.
“이안 씨! 거기 있어요?”
새카만 어둠 속으로 머리를 집어넣은 에스퍼가 외쳤다. 거리가 멀어 자세히는 들리지 않았으나 말소리가 들리기는 했다. 귀가 좋은 에스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세 사람의 부상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탐사 팀은 시환의 능력인 빙결로 계단을 만들어 내려갔다. 비록 B등급이라 계단이라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허술한 모양새였으나 일단 목적은 달성했으니 괜찮았다.
“이안 씨! 괜찮으세요?”
“난 괜찮아. 다친 곳도 없고.”
“하아, 다행이다. 반란군에게 빼앗기기라도 했을까 봐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하하, 내가 알아야 해?”
“네?”
이안은 흙먼지가 조금 묻은 옷을 손으로 털었다.
상냥하고 부드러운 이안이 뱉었다곤 믿기지 않는 말에 잠시 얼이 빠졌던 시환은 이안의 뒤에서 빛나를 발견하곤 한결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지치고 어딘가 분해 보이기까지 했으나 납치당했다 돌아왔으니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폭주 에스퍼는 어딨죠?”
은율이 물었고, 전등으로 밝혀진 미로 속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딱히 위협적인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험악하게 인상 쓴 것도 아닌데 왜 오금이 저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말인데 폭주 에스퍼가 지금 반란군이랑 싸우고 있거든. 죽기 전에 구해 와.”
“그게 무슨-”
“죽기 전에 구해 오라고. 나 때문에 죽는 건 자존심 상하니까.”
이안의 얼굴에 씨익 피어난 미소는 평소와 전혀 다를 바 없었다. 여전히 다정하고, 화사하고. 그러나 거절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크게도 들렸다.
* * *
반란군, 혜음은 허세 부린 것치고 빠르게 끝난 싸움에 입술을 삐죽였다. 비록 이안은 놓쳤지만 어차피 대부분 조무래기 수준이라 금방 되찾을 수 있을 터다.
그녀의 능력은 ‘변환’으로, 자의식이 강한 생물을 제외하고 식물이나 물건 등 어떠한 것도 자유자재로 변환할 수 있다. 범용성은 넓지만 거리가 멀고 조종하는 범위가 클 때 정확도가 떨어지는 게 흠이다.
아까도 이안만 빼앗으려던 걸 실수로 근처에 있던 두 사람까지 같이 빠뜨리고 말았다. 그래도 결국 SS급 가이드를 손에 넣을 테니 과정이야 어떻듯 결과만 좋으면 괜찮았다.
걸음을 옮기던 혜음은 희미한 살기를 감지하곤 곧장 바닥을 굴렀다. 피하지 않았다면 그녀의 목덜미를 베었을 단검은 폭주 에스퍼의 손에 단단히 잡혀 있었다.
“생각보다 허술하네.”
상대를 엿 먹이려는 의도가 명확히 담긴 목소리에 화가 불쑥 치밀어 올랐다. 네가 살아 있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고 외치려던 혜음은 고함 대신 놀라움을 담고 말끝을 흐렸다.
“너는…….”
희미한 전등 하나만이 간신히 밝히고 있는 어두운 공간에서 검붉은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후드가 벗겨지고 드러난 건, 혜음이 화면이나 사진으로 몇 번 본 적 있는 남자였다.
“하필이면 또 저 새끼야? 아, 골 때리네.”
“너 나 알아?”
“알지 그럼.”
“내가 그렇게 유명인인 줄 몰랐는데.”
“네가 유명한 게 아니고 네 가이드가 유명한 거거든.”
커다란 한숨을 내쉰 혜음이 자세를 다잡았다. 아무리 상대가 건너 건너 아는 사람이라 해도, 죽이면 동료와 좀 껄끄러워진다고 하더라도 앞을 막는다면 살려서 돌려보낼 수는 없다.
그러나, 그래도……. 싸늘하게 자신을 바라볼 남자를 잠시 떠올린 혜음이 헛기침을 하곤 폭주 에스퍼를 불렀다.
“야. 너 네 매칭 가이드랑 친하냐?”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내가, 그, 남자의…… 팬, 이거든.”
자신의 입으로 뱉어 놓고도 속이 울렁거렸다. 침을 퉤 뱉은 혜음이 어깨를 감싸며 바르르 떨었다.
“무슨 대답을 원하지?”
“사이 더럽게 나쁘다는 대답. 널 죽였다고 날 원망하지 않았으면 하니까.”
눈앞의 시꺼멓고 새빨간 폭주 에스퍼가 빈틈 가득한 이 상황에서 덤비지 않는 이유는 시간을 끌기 위해서일 게 뻔했다. 그래 봤자 소용없는 일인데 말이다.
한참 침묵하던 폭주 에스퍼가 어쩐지 고요한 얼굴로 말했다.
“원망 안 할걸.”
“그거 다행이네.”
줄기가 솟아오르자 보이지 않는 압력으로 순식간에 터져 나갔다.
폭주 에스퍼의 등급은 명확히 나뉘지 않는다. 듣기로는 그날그날 컨디션에 따라 다르다고 했다. 오늘은 낮은 등급이기를 바라며 혜음은 남자의 다리를 향해 은밀하게 줄기를 옮겼다.
“근데 그 사람은 네가 존재하는지도 모를 텐데.”
“하, 날 평범한 팬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자신은 남달리 특별하다는 망상에 사로잡힌 사람으로 보인다는 사실도 모른 채 혜음이 줄기를 움직였다. 공중으로 뛰어오른 폭주 에스퍼가 혜음의 목을 노리며 달려들었다.
“비슷한 입장인 것 같은데, 그냥 각자 갈 길 가는 건 어때?”
“비슷한 입장? 아, 뭐, SS급 가이드를 내놓는다면 가 주지.”
서로를 응시하던 두 에스퍼가 동시에 움직였다. 협상은 결렬되었고 남은 건 목숨을 건 전투뿐이다.
쐐액- 쾅! 주현은 빠르게 다가오는 공격을 능력으로 막았다. 하지만 방어막이 깨지지 않도록 집중하느라 액체처럼 일렁이는 바닥에는 조금 늦게 반응하고 말았다. 그래 봐야 1초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임에도 노련한 에스퍼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슬슬 포기하지 그래?”
가이딩을 받지 못하면 닷새는 멍이 안 빠질 늑골을 문지르며 주현이 일어났다. 그래도 아직 한참 더 싸울 수 있었다. 그의 목적은 승리가 아니라 최대한 오랫동안 시간을 버는 거라 훨씬 쉬웠다.
“그건 내가 할 말인데.”
“다 죽어 가는 놈이 입만 살아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