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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 (93/161)

폭주 에스퍼 84화

한참 침묵하던 주현은 빛나가 그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는 걸 알곤 고개를 내저었다.

“난 헤어지라고 한 적 없어. 그냥 연애하느라 바쁘냐고 물어봤을 뿐이지.”

“네? 그거 은근히 비꼬는 거……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래. 주현은 단 한 번도 차인호에게 그만 사귀라고 말한 적 없다. 빛나의 말에 따르면 매칭 가이드가 일반인과 사귀는 건 에스퍼에게 상당한 걱정거리인 듯하니 그에 대한 우려만 내비쳤을 뿐이다. 당시 태도야 어찌 되었든 한 치의 틀림도 없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주현도 갑작스러운 결별이 의아했다. 열애설이 터지고 얼마 되지도 않아서 헤어진 두 사람에 대해 미디어에서 얼마나 떠들어 댔는지 모른다. 휴대폰은커녕 노트북 하나 없는 주현조차 알 정도이니 인터넷에선 훨씬 더 난리였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주현도 묻지 않았다.

은근한 희망은 사랑과 함께 왔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기대하는 걸 멈출 수 없었다. 혹시, 설마, 정말 그럴 리는 없지만, 차인호는 주현 때문에 연인과 헤어진 게 아닐까? 연애보다 일을 선택한 거라 할지라도, 어쨌든 주현을 선택해 준 거 아닐까?

“상대가 가이드, 그것도 매칭 가이드니까 찼겠지. 흔한 이야기야.”

그 순간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화사하기 그지없다. 본인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가이딩 덩어리가 얼마나 밝게 웃고 있을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심지어 매칭한 게 폭주 에스퍼니까 더 힘들었을 거야. 자기 연인이 폭주 에스퍼랑 그렇고 그런 짓을 하는데 어떤 일반인이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겠어?”

“이안 씨,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아니. 맞는 말이야.”

실망은 고독한 감정이다. 슬픔만큼 파괴적이지도 않고, 체념만큼 고요하지도 않다. 갈 곳 없는 우울은 수치와 뒤섞여 가슴속을 밀물처럼 은근하게 때린다.

사방을 울리는 파도 소리처럼 시끄러운 마음을 가만히 맛보던 주현은 어느 순간 이를 악물었다.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모를 억울함이 불쑥 솟아오른 탓이다.

그렇고 그런 짓 때문이라고 하기엔 지금껏 차인호는 악수라는 지극히 가볍고도 일상적인 가이딩밖에 해 주지 않았다. 딱 한 번, 그것도 주현이 괴물의 씨앗을 달고 온 후에야 처음으로 제대로 된 가이딩을 받았다.

그런데 어떻게 두 사람의 스킨십 때문에 헤어졌다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지?

아. 주현의 머릿속 계산기가 빠르게 돌아갔다. 차인호가 헤어졌다는 소식이 들려온 건 주현의 어깨에 피어난 꽃이 시들어 버린 후다. 즉, 그렇고 그런 짓이 원인이 되어 헤어졌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한 번이라지만 참아 줄 수 없어서 결별을 선언했거나, 혹은 차인호가 먼저 상대에 대한 죄책감으로 손을 놓았거나.

이젠 제법 익숙하게 입 맞추는 가이드를 떠올리던 주현이 입술을 비죽였다. 그는 몰랐지만, 심통 난 아이 같은 얼굴이었다.

“그런데 애초에 일반인이랑 연애하려는 생각이 잘못된 거 아닌가? 가이드면 가이드답게 에스퍼랑 사귀든가 해야지. 뭘 또 일반인을 만난다고.”

툭 튀어나온 말은 지금껏 주현이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는 편견이었다. 에스퍼가 어쩌고저쩌고, 가이드가 어쩌고저쩌고하기엔 눈앞에 있는 현실이 높은 절벽처럼 사방을 가려서 타인의 사정 따위 관심조차 없었는데.

빛나가 멍하게 눈을 깜빡이는 게 어둑한 미로에서도 선명히 보였다.

“어, 그건 지극히 사적인- 앗!”

우르릉- 다시금 진동이 시작했다. 황급히 이안을 능력으로 허공에 든 주현이 빛나까지 보이지 않는 힘으로 감싸곤 온몸을 긴장시켰다.

“드디어 찾았네. 하도 싸돌아다녀서 오래 걸렸잖아.”

낭랑한 목소리는 좌우로 갈라진 벽 사이에서 들려왔다. 재빠르게 능력을 썼는지 빛나가 다른 동료는 없는 것 같다고 속삭였다.

“좋은 말 할 때 내놔, 고급 배터리.”

결 좋은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늘어진 여자가 오만하게 웃었다.

폭주 에스퍼의 눈이 매섭게 상대를 노려보았다. 착하고 선한 건 고사하고 평범한 축에도 들지 못하는 무서운 인상임에도 반란군으로 추정되는 여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재밌다는 듯 입꼬리를 더욱 높이 올렸는데, 단순한 허세로는 보이지 않았다.

사실 적과 대치하는 상황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다. 구조가 바뀐다는 말을 들은 후부터 결국엔 적과 만날 거라고 확신까지 했었다. 다만 그 전에 동료들과 먼저 만나기를 바랐을 뿐.

혼자서 두 사람이나 지키며 싸우는 건 무척 힘든 일이고, 실컷 두들겨 맞은 후 이안을 눈앞에서 빼앗길 확률이 너무 높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잘나신 반란군께서 그들 앞에 홀로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언제 다른 동료가 올지 모르지만 일단 당장은 그리 쉽게 당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싫다면?”

“그럼 죽어야지.”

여자의 손짓에 벽 일부가 찢어지며 주현을 향해 날아왔다.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속도였지만 주현은 일부러 움직이지 않았다. 단지 허공에 떠 있던 이안을 앞으로 끌어왔다.

두꺼운 가시로 뒤덮인 줄기가 허공에서 멈추고, 여자는 혀를 찼다. 주현은 이안이 그의 인질임과 동시에 적의 인질도 된다는 걸 확신했다.

“너 지금 날 방패로 쓴 거야?”

주현은 황당하다는 이안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여자의 몸을 능력으로 구속했다.

물론 그리 쉽게 끝날 리는 없다. 몸이 묶인다고 능력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여자 또한 그걸 아는지 망설임 없이 벽을 무너뜨렸다. 하나가 아니라 사방에서 몰려오는 줄기 떼에 주현은 결국 구속을 풀 수밖에 없었다.

그들을 덮치는 줄기 아래에서 능력으로 둥글게 방어막을 친 주현이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잘 들어. 내가 시간 끌 테니까 도망가서 동료들을 찾아. 미로가 움직이는 게 저 녀석의 능력이라면 한동안 다시 움직이지 않을 거야. 그쪽에서도 찾고 있을 테니 금방 만날 수 있을 거다.”

“저희는 방해밖에 안 되는 거죠?”

빛나의 목소리엔 슬픔이 있었다. 미소가 사라진 이안은 무슨 감정인지 모를 표정으로 두 사람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래.”

빈말을 늘어놓을 이유도, 의리도 없다. 입술을 깨문 빛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메고 있던 가방을 주현에게 내밀었다. 혹시나 주현이 고립되었을 때를 생각한 모양이었다.

“조심하세요.”

다치지 말라거나 살아남으라거나, 약속할 수 없는 말을 할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러나 주현은 그조차 무시하곤 두 사람을 능력으로 감싸 최대한 먼 곳까지 단숨에 날렸다.

“아, 아아! 뭐 하는 거야!”

“방해꾼 없이 싸우는 게 더 재밌지 않아?”

“이런, 하필이면 또라이랑 만났구먼.”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도 여자의 얼굴엔 미소가 피어 있었다. 레이스가 달린 새하얀 블라우스가 움직임에 따라 살랑였다. 가슴팍을 장식한 빨간 리본을 보고 있자니 여자가 멈춰 섰다.

“가만 보니 너 폭주 에스퍼 아냐? 여기서 폭주하면 골치 아픈데.”

“왜 골치 아픈데? 휘말릴 동료가 많은가 보지?”

“하나도 말해 줄 생각 없거든.”

다시금 공격이 날아왔다. 식물을 다룬다기엔 어딘가 묘하게 움직임이 어색한데, 양이 많아서 어떤 능력인지 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미로를 이루고 있던 벽이 하나둘씩 무너지더니 곧 사방이 갈색 줄기로 가득 찼다. 징그러운 광경에 눈살이 찌푸려졌으나 지금은 살아남는 게 우선이었다.

사실 주현이 개인적으로 반란군에 가지고 있는 원한은 없다. 협회 상층부가 듣는다면 약하지 않은 처벌을 내리겠지만 엄연한 사실이었다. 기껏해야 사막에서 특이한 남자를 만난 게 다였으므로.

“다른 생각도 하고, 내가 너무 봐주고 있나 보네.”

황급히 몸을 피한 주현은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핏방울을 손등으로 닦아 냈다.

하지만 반란군은 주현을 상당히 원망할 것이다. 주현이 그들의 동료를 죽인 데다 마지막 부탁마저도 들어주지 못했으니까.

사라진 USB가 어디 있을지 잠시 생각하던 주현은 곧장 여자의 목을 노렸으나 잘린 건 새하얀 목덜미가 아닌 줄기 몇 가닥이었다.

“다짜고짜 목을 노리다니. 폭주 에스퍼답네.”

“폭주 에스퍼다운 게 뭐길래.”

“일반 에스퍼는 괴물만 죽여 봐서 사람한테 능력 잘 못 써. 너희가 살인 임무 맡는다는 거 모를 줄 알았나 봐?”

미소는 잔인했다. 그것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라 주현이 움칠 몸을 뒤로 물렸다. 오래전부터 해 온 일이고, 매번 스스로에게 실망하곤 하지만 타인의 입으로 듣는 건 또 다른 느낌이었다.

돈 받고 사람 죽이는 살인 청부업자와 다를 바 없다. 그들이 받는 건 돈이 아니라 세상에서 살아 숨 쉴 수 있는 권리이긴 하지만.

바닥이 울렁이며 줄기가 돋아났다. 발목을 잡아채려는 줄기를 베어 버리고 뒤쪽으로 피한 주현이 여유로운 표정의 반란군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럼 폭주 에스퍼도 아닌 넌 왜 살인에 거리낌이 없는데?”

씨익 웃는 얼굴은 기껏해야 주현과 비슷하거나 몇 살 어려 보였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으며 짝 소리와 함께 양손을 부딪쳤다. 그 순간, 쿵-! 아직 남아 있던 벽 두 개가 주현을 향해 무너졌다. 먼지가 걷히고 보이는 건 어떠한 틈도 없이 딱 달라붙은 갈색 벽과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줄기뿐이었다.

반란군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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