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89/161)

폭주 에스퍼 80화

조금 전 죽은 남자는 분명 주현을 알고 있었다. 최근 이런 일이 늘어나고 있다. 놀랐다가, 주현을 알아봤다가, 이내 약간이지만 긴장을 푼다.

무지는 두려움이다. 타깃들은 주현을 앎으로써 그가 자신을 해치지 않을 거라 지레짐작하곤 한다. 그러다 자신을 죽이는 주현을 보며 그들은 깊은 배신감을 가감 없이 내뱉곤 끝을 맞이한다.

웃기는 일이다. 사적으로 만난 적은 한 번도 없는 주제에 화면 너머로 상대를 봤다고 친밀감을 가진다는 사실이 주현을 화나게 했다.

이 모든 게 차인호로 인한 변화였다. 사람들이 주현을 알아보는 것도, 공포보다 먼저 안도를 느끼는 것도. 주현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주변만 멋대로 변화한다.

-임무가 끝났다면 신속히 복귀해라. 오늘 밤 처리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아 있으니까.

통신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엔 약간의 짜증이 배어 있다. 괜한 흔적을 남길 수 없어 꽁초를 손바닥으로 꾹 쥐자 화끈한 통증이 솟구쳤다 가라앉았다.

전선과 파이프가 뒤얽힌 벽에는 오래된 포스터가 덕지덕지 난잡하게 붙어 있다. 곳곳에 피가 튀었으니 내일이면 떨어질지도 모른다. 아닐 수도 있고.

멍하게 눈을 끔뻑이던 주현은 한 남자가 자애롭게 팔 벌리고 있는 커다란 포스터를 응시했다. 봉사 단체 <프리 가이딩>의 포스터에는 이런저런 낙서가 가득했다. 그럼에도 큼지막하게 적힌 문구는 여전히 알아볼 수 있었다.

[For Esper]

활짝 웃고 있는 입을 말끄러미 보던 주현이 벽에서 등을 떼곤 돌아섰다.

능력을 이용해 단숨에 건물 옥상에 도착했음에도 답답한 가슴은 해소되지 않았다. 근육과 뼈를 가르는 감각은 지겹도록 손가락에 들러붙어 있다. 거칠게 숨을 뱉어 낸 폭주 에스퍼가 눈에 띄지 않는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 * *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가이딩을 악수로만 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익숙해진 키스가 끝났다. 가이딩이 맴도는 몸은 가볍고, 아늑하고, 충만하다. 계속 이런 기분으로 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욕심부리지 마.’

쓸데없는 소망을 날카롭게 찢은 주현이 의자로 돌아가는 차인호를 힐끔 살폈다.

입술을 문지르는 동작은 지극히 무덤덤하다. 그조차 무심코 빤히 바라볼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 천천히 눈꺼풀을 깜빡였다. 팔랑 소리가 날 정도로 긴 속눈썹은 눈 아래에 그늘을 만들고, 쭉 뻗은 콧대 밑 평소보다 도톰한 입술은 윤기로 반짝인다.

단정히 잠긴 단추 아래 제법 단단한 몸에 새겨진 흉터는 어떤 사고가 있었는지 궁금할 정도로 끔찍하나 이 남자에게는 그조차 하나의 예술 작품 같다.

“그러다 구멍 뚫리겠어요.”

반쯤 접힌 눈동자가 주현을 똑바로 응시했다. 집요하게 본 건 사실이니 달리 할 말도 없었다.

“제가 그렇게 잘생겼어요?”

“살면서 충분히 들은 말 아닙니까?”

“그렇긴 한데, 주현 씨 입으로는 들은 적 없잖아요.”

확실히 늘 속으로만 생각했지, 차인호의 외모에 대해 무어라 말을 늘어놓은 적은 없었다.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럴 사이도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차인호의 ‘특별’이 되고 싶은 주현에겐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을 말을 굳이 되풀이할 필요가 없기도 했다.

하지만 기대하듯 웃고 있는 얼굴에 대고 거절할 마음은 들지 않았던 주현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생기셨네요.”

설마 정말로 해 줄 줄 몰랐는지 눈을 크게 뜬 차인호가 입술을 달싹였다. 막 키스를 끝내고도 아무렇지 않았던 남자는 고작해야 뻔한 한마디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그 순간, 의욕 없이 반쯤 감겨 있던 주현의 눈이 번쩍 뜨였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차인호의 얼굴을 구기기 위해 다양한 일을 했던 주현은 머리 위에서 전구가 반짝이는 걸 느꼈다.

의외로 차인호는 외모 칭찬을 좋아하는 걸지도 모른다. 참으로 욕심 많은 남자가 아닐 수 없다. 딱히 이렇다 할 칭찬 같은 걸 받아 본 적 없는 주현은 이해할 수 없지만 좋은 말은 아무리 반복되어도 좋은 걸지도 모른다.

“처음 봤을 때부터 놀랐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잘생긴 사람이 있나 하고.”

“이제, 그만하셔도 돼요.”

“연예인은 이런 사람이 하는 거구나 싶었고, 특히 눈이 예쁜데 제가 만난 사람 중에…… 두 번째로 예쁩니다.”

붕대투성이 소년이 바보라며 웃는 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새하얀 붕대 틈 유독 길어 보이던 속눈썹이 휙 휘어지면 주현은 숨을 삼키곤 했었다.

주현은 희미한 절망과 함께 고개를 떨어뜨렸다. 칭찬을 하랬는데 1등이 아닌 2등을 내밀면 그 누가 좋아할까.

“그거 영광이네요.”

꿀을 담은 듯한 목소리에 슬쩍 시선을 올리자 그 끝에 어쩐지 기뻐 보이는 차인호가 있었다. 수줍음이 사라지고 빈자리를 차지한 감정의 이름을 주현은 모른다. 다만 눈앞에서 꽃처럼 웃고 있는 차인호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눈이 부셔서…….

‘찬란하다.’

이번엔 주현이 입을 다물 차례다. 에스퍼가 아닌 신주현으로서 그를 웃게 한 첫 번째가 아닌가 싶었다. 그 사실이 기쁜데 고작 이런 걸로 들뜨는 자신이 한심해서 되레 기분이 나빠졌다.

즐거운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모르는 주현은 일부러 슬픈 생각을 떠올렸다. 당장 어제 일만 되새겨도 기분 좋게 뛰던 심장이 가라앉는다. 아무것도 없는 손을 괜히 옷 위로 문지른 그가 입술을 축였다.

* * *

최근 이상하게도 암살 임무가 많아서 게이트 임무에 배정된 건 몇 주 만이었다. 차에서 내려 지정된 장소로 걸어가자 소란스럽던 공간이 서서히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쏠리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구석으로 향하던 주현을 붙잡은 건 제법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어! 오랜만이네요, 주현 씨!”

빛나는 여전히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주현에게 달려왔다. 그가 반가워할 만한 일을 한 기억이 없건만, 빛나는 기다렸다는 듯 주현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붉은 눈동자를 보고 겁먹는 이가 종종 있어 여럿이 함께하는 임무에서는 후드를 뒤집어쓰는데 잘도 알아봤다 싶었다. 어쨌든 있는 듯 없는 듯 구석에 있으려던 계획이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주현은 한숨을 삼키며 작은 인사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계시는 줄 몰랐습니다.”

“사람이 많아서 좀 복작복작하죠? 그만큼 중요한 임무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요.”

“빛나 씨는 임무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저도 자세히는 몰라요. 이따가 전체 브리핑이 있을 거라면서 쫓겨났거든요.”

간이 의자에 앉아 발을 까딱거리는 빛나는 확실히 어린 티가 났다.

‘듣기로는 23살이라고 했었는데.’

끝이 말린 머리카락을 응시하던 주현이 고개를 돌렸다. 힐끗거리며 주현을 관찰하던 몇 명이 황급히 몸을 트는 게 보였다.

다수의 인원이 참여하는 임무에 굳이 폭주 에스퍼를 집어넣은 건 오직 C동, 정확히는 태석의 요청 때문이었다. 그는 임무에 가기 전, 주현에게 그곳에서 일어날 모든 일을 상세히 보고하라고 명령했다. 잘은 몰라도 상당히 중요한 임무일 게 분명했다.

“협회에서도 이번 임무를 주시하고 있나 봐요. 여기 누가 있는지 아세요? 무려-”

“너도 참가하는 거야? 폭주 에스퍼인데?”

주현의 미간이 정직하게 구겨졌다. 이안은 늘 그렇듯 그린 듯한 미소를 지은 채 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비꼬는 건지 아니면 진심으로 궁금한 건지 구분할 수 없었다.

물론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 주현이 방어적으로 팔짱을 꼈다.

“당신이 여긴 무슨 일로?”

“당연히 임무 때문에 왔지. 나도 가이드인데 안전한 방에서 놀고먹기만 할 리가 없잖아.”

자연스럽게 볼로 다가오는 손을 피하자 이안이 아쉬움을 감추지 않으며 웃었다. 사람 좋은 미소를 띠고 있지만, 진심으로 온 힘을 다해 볼을 찢을 듯 잡아당기는 지독한 인간이라는 걸 아는 주현에겐 가식적으로 보일 뿐이었다.

그런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으니. 이안과 주현을 번갈아 보던 빛나가 불쑥 끼어들었다.

“두 분 사이가 좋아 보이시네요?”

“그래 보여? 주현이를 만난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으니까 아무래도 가까울 수밖에 없지.”

혹시 시력이 나쁘냐고 물을 뻔했던 주현은 은근슬쩍 그들을 보며 속닥거리는 사람들을 깨닫곤 이를 악물고 참았다. 그에게 있어 사이코패스일지언정 이안은 귀하신 SS급 가이드였다. 주현은 폭주 에스퍼고.

“정말요? ……10년 전 주현 씨는 어땠어요?”

“어떻긴요, 그냥 평범한 어린애였죠. 뭘 그런 걸 묻습니까?”

“에이, 궁금해서 그래요. 네? 알려 주세요, 이안 씨.”

당사자의 비난을 가볍게 넘긴 빛나가 이안을 향해 강아지 같은 눈빛을 보냈다. 다 큰 성인 남자가 하기엔 지나치게 애교스러웠으나 이상하게 어울렸다.

“음, 주현이는…….”

손으로 턱을 괴곤 진지하게 고민하는 꼴이 재수 없었다. 만약 빛나가 주현에게 10년 전 이안이 어땠냐고 물었다면, 그는 망설임 없이 지금과 똑같은 사이코패스였다고 말할 것이다.

“들고양이 같은 아이였지. 그것도 죽은 고양이.”

“네?”

“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다들 모여 주세요!”

크게 외치는 목소리에 주현이 벌떡 일어났다. 이안과 빛나가 뒤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쓸데없는 말을 귀에 담을 필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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