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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88/161)

폭주 에스퍼 79화

이유 없는 호의에 익숙지 않은 주현은 자꾸만 임무가 겹치는 그를 면밀하게 관찰했다. 애초에 누구에게나 일정한 다정함을 내보이는 사람이라면 신경 쓸 필요 없지만, 그게 아니라면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듣기로는 저 밑쪽이라고 하던데. 아마 D 지역일걸요? 저번에 갔을 때 그쪽 근처에서 엄청 맛있는 가게를 발견했는데, 같이 가실래요?”

하지만 주현은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빛나가 주현의 호의를 얻어 그에게서 빼앗고 싶은 게 무엇인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알아낼 수 없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폭주 에스퍼가 지정된 위치를 벗어나면 테러로 간주됩니다.”

의미를 생각하듯 깜빡이던 고동색 눈동자가 확 벌려졌다. 빛나는 상당히 미안했는지 손끝으로 입을 가리곤 허둥지둥했다.

“아, 아! 죄송해요. 방송에서는 여기저기 다니시길래 괜찮은 줄 알았어요.”

“그때가 특수한 경우였습니다. 그런 기회는 아마 다시 오지 않을 거예요.”

차인호의 매칭 에스퍼이자 폭주 에스퍼에 대한 대중의 흥미와 협회의 선전 방송 시기가 겹쳐서 일어난 행운일 뿐이다. 아니, 행운이라고 할 수 있나? 결국 주현은 동네를 엉망으로 만들고 차인호의 가이딩을 빼앗아 그를 지치게 했는데.

<게이트 데이트>의 PD인 범진은 폭주 에스퍼는 거리를 돌아다닐 수 없다고 법으로 지정된 건 아니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협회의 허락이 없으면 어딜 가든 테러범 취급을 받아야 하는 게 법과 다를 게 뭔가 싶었다.

그러나 그 혼자 생각해 봐야 바뀌는 건 없다. 진작에 현실과 타협한 폭주 에스퍼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힘드시겠네요.”

주현은 별생각 없이 한 말인데 빛나는 처량 떠는 걸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그의 표정은 안쓰러움과 이유 모를 슬픔에 젖어 있었다.

“별로……. 괜찮습니다. 제가 돌아다녀 봤자 위협밖에 안 되니까요.”

“저한텐 조금도 위협적이지 않으신데요?”

어쩐지 데자뷔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주현의 뇌가 정답을 알아냈다. 예전에 차인호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자신의 안전을 확신하고 뒤에 따라올 모든 책임을 주현에게 떠미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차인호는 용서했다. 공식적으로 그는 늦은 나이에 발현한, 에스퍼-가이드에 대한 상식이 부족한 일반인이니까.

하지만 빛나는? 그는 십여 년을 현장에서 구른 현역 에스퍼다. 누군가 폭주하는 모습을 직접 보진 못했어도 위험성에 대해 끝없이 교육받았을 텐데.

손끝의 담배가 홀로 타들어 간다. 조금씩 하얀 몸을 좀먹는 불꽃의 고리가 지나간 자리엔 거먼 재밖에 없다.

“제가 폭주했을 때, 근처에 있던 건물 하나가 말 그대로 날아갔습니다. 그 안에는 어른도 있었고, 아이도 있었는데, 누구 하나 도망치지 못했습니다.”

제 무릎을 움켜쥔 빛나의 손마디가 희게 변했다. 에스퍼답게 단단하지만 희고 예쁜 손이었다. 처음 본다면 누구라도 흠칫 놀랄 너덜너덜한 주현의 손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고작 5층짜리 건물 하나만 무너지고 끝난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이유가 뭔데요?”

“주변에 다른 건물이 없었거든요.”

그의 폭주는 소중하게 꼭꼭 숨겨 놓은 것들만을 짓밟아 기어코 산산조각 낸 후 끝났다. 관련 없는 타인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주현에게 딱 맞는 벌이었다.

에스퍼의 폭주는 자기 자신조차 다룰 수 없다. 이미 눌린 버튼이요, 뒤집힌 컵이다. 우연히 아래에 있던 사람이 물을 뒤집어쓰는 건 누구의 의도도 아니다.

“테러는 불특정 다수에게 어쩔 도리 없이 내리꽂히는 재해입니다.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이 단지 근처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잃습니다.”

그들도 그랬다. 만약 일이 그렇게 될 줄 알았다면 주현은 차라리 숲속 깊은 계곡에 뛰어들어 아주 오랫동안 숨을 참았을 것이다. 폐가 쪼그라들고 혈관에 산소가 부족해져 기어코 숨이 꼴딱 넘어갈 때까지, 단 한 명만을 죽인 비교적 깨끗한 손을 움켜쥔 채.

“빛나 씨는 본인의 선택이라 해도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잖아요.”

후회는 아무리 빨리해도 늦다. 최근 들어 자신이 위험한 괴물이라는 걸 조금씩 잊어 가던 주현이 스스로를 채찍질하듯 날카롭게 말했다.

멀리서 임무에 동행한 에스퍼와 가이드가 협회 직원과 무언가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더운 바람이 볼을 스치고, 주현은 조금 죽고 싶은 심정으로 차인호를 떠올린다.

차인호는 그에게 겁내지 않고, 그를 아프게 하지 않는다. 차인호의 가이딩은 봄처럼 따뜻하고 가을처럼 깨끗하다. 그걸 잃은 후에 여름의 지독함과 겨울의 혹독함 속에서 어떻게 견뎌야 할까. 생각만으로도 조금 무서웠다.

그래서 주현은 차인호가 미웠다. 겁에 질려 울 바엔 이를 드러내며 달려드는 걸 택할 주현에게 기어코 두려움을 안긴 차인호가 너무나도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제 이름 기억해 주셨네요.”

두 에스퍼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썩어 가는 과일처럼 진득한 눈동자는 햇살 아래에서 이름같이 빛나는 말간 눈을 오랫동안 바라보지 못했다.

“지금은 그거면 돼요.”

무릎을 펴며 일어난 빛나가 동료에게 돌아가려 걸음을 옮겼다. 곧은 등을 보던 주현은 한 번도 피우지 못했으나 냄새가 배어 버린 손으로 눈가를 꾹꾹 눌렀다.

평소였다면 약한 모습을 보일 바엔 혀를 깨물겠단 심정으로 속내를 결코 드러내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차인호 때문에 머릿속이 온통 엉망이었다. 다른 사람을 신경 쓸 틈 같은 건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주현은 음울하게 외쳤다.

“저는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잠시 멈칫하더니 휙 돌아선 빛나는 웃고 있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여튼 여기저기 다 X같아. 주현은 괜히 그런 생각이나 했다.

* * *

“요즘 그분 이야기 많이 하시네요? 뭐 찾는 걸 잘한다는 에스퍼요.”

“찾는 걸 잘하는 게 아니라 능력이 탐지입니다.”

“아무튼요.”

더듬더듬 자신의 일상을 토해 내던 주현이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또 뭐에 심통이 난 건지 알 수 없었다.

최근 주현은 차인호에게 자신을 각인시키는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말은 그럴듯하게 했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주현의 빈자리에 약간의 허전함을 느끼게 하려는 작전이다.

물론 작전은 지지부진하게 흘러가는 중이다. 옆에 있으면 눈살 찌푸리게 하는 데 일가견이 있지만, 없을 때 생각나게 하는 일엔 통 재능이 없기 때문이다.

초조하게 바닥을 두드리던 주현이 슬쩍 차인호를 살폈다. 웃고 있지만 심기가 상했다는 게 뻔히 보였다.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런 남자에게 잘 보이려 애쓰는 제 모습에 자존심이 무너지는 게 선명히 느껴졌다.

“제가 말 많이 하는 게 그렇게 싫습니까?”

“누가 싫대요? 그냥 주현 씨가 웬일로 친구를 다 만들었나 해서 신기할 뿐이었어요.”

“친구 아닌데요. 그냥 임무 몇 번 같이한 사이입니다.”

“그냥 임무 몇 번 같이한 사이치곤 가까워 보이시길래 제가 착각했네요. 아니면 뭐, 그쪽에선 다르게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고.”

찌푸려진 미간 아래, 검붉은 눈동자에 희미한 절망이 스쳐 지나갔다.

빛나가 뭘 어떻게 생각하든 차인호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어쩌면 쓸데없는 말을 너무 많이 늘어놓았다는 은근한 압박일지도 모른다. 남들은 가이딩하다 보면 몸정이라도 든다던데, 그들은 어째 몸을 섞기 전보다 더 사이가 나빠진 것 같았다.

힐끗 바라본 차인호는 여전히 불편한 눈을 하고 있었다. 가이딩해 줄 때는 그토록 다정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 가이딩을 빼면 남는 건 온전한 서로밖에 없다. 그가 좀 더 곁에 있기 쉬운 사람이었다면 차인호는 지금 웃고 있었을까.

짓무른 손끝을 응시하던 주현이 차인호를 향해 입을 벌렸다. 얌전히 놓인 혀는 선명한 치아 자국과 함께 피를 쏟아 내고 있었다.

차인호는 조금 화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일어나 주현의 볼을 부드러운 손으로 감싸 쥐었다.

주현은 조금 더 예쁜 방법으로 투정 부리는 법을 알고 싶다 생각했으나 새로운 것을 배우기엔 너무 나이가 많은 걸지도 모른다.

키스는 달콤했다. 늘 그랬듯이.

* * *

밤이 되어야 더욱 활기차지는 환락가의 골목길, 그곳을 지나던 남자는 반대쪽에서 다가오는 사람을 피하려 움직였다. 그러나 검은 옷의 누군가는 남자를 비켜 가는 대신 바로 앞에서 멈췄다.

안 그래도 쓰레기장과 가까운 치안 나쁜 길이다. 남자는 눈에 띄지 않게 주머니에 손을 밀어 넣으며 강경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누구야. 뭔데 남의 앞을 막고, 어, 넌…….”

상처에서 터져 나온 뜨거운 피가 지저분한 벽과 살인자의 몸에 튀었다.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한 줄기 더운 핏방울에도 서늘한 표정은 무너지지 않았다.

간발의 차이로 치명상을 피한 남자가 붉게 물든 옆구리를 움켜잡곤 벽에 기대어 섰다.

“큭, 협회의 개 주제에 우리 일을 방해하지 마라! 우리는 대의를 위해-”

끝맺지 못한 유언과 함께 남자의 몸은 바닥으로 쓰러졌다. 미동조차 없이 눈꺼풀을 벌린 채 널브러진 시신은 내일 아침 해가 뜰 때쯤이면 수습되어 흰 천을 뒤집어쓰고 있을 터다.

무차별적인 이유 없는 살인으로 보이기 위해 사용한 식칼을 타고 진득한 피가 흘러내린다. 주현은 처참한 살인 현장에서 한 걸음 물러나 더러운 벽에 등을 기댔다. 올려다본 하늘은 골목 면적만큼 좁고 별 하나 없이 그저 새까맸다.

쨍강, 짧은 고민 끝에 식칼을 바닥으로 내던진 주현이 담배를 꺼내 들었다. 허공을 스치곤 사라지는 흰 연기가 마음속에도 들어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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