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77화
차인호의 가이딩은 이안이 눈 깜짝할 새에 고쳤을 상처를 조금 더 긴 시간 만에 고쳤다. 주현은 그가 C급 가이드였어도 좋았겠다고 생각하며 타액으로 푹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대충 문질렀다.
“답지 않게 뭐예요?”
모자를 주워 가볍게 먼지 턴 차인호가 고요한 목소리로 물었다. 입술 주변이 지저분해도 여전히 잘생겼다. 이게 콩깍지인지 남들도 그렇게 느끼는지 조금 궁금해하며 주현은 삐딱하게 되물었다.
“저다운 게 뭔데요.”
“글쎄요……. 적어도 이렇게 적극적이진 않았잖아요.”
주현은 적극적이지 않은 게 아니라 지극히 수동적인 에스퍼였다. 가이드와의 관계에서 늘 숙이는 자리에 있었기에 습관처럼 밴 것이다.
하지만 차인호는 지금까지 만난 어떤 가이드와도 다르다. 그저 평범한 가이드일 수도 있으나 C동에서 평범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으니까.
“앞으론 좀 그렇게 살아 보려고요.”
무섭도록 자존심 강한 에스퍼는 죽어도 혼자 죽지 않는다. 차인호가 그의 가슴에 커다란 구멍을 만들 계획이라면, 자신 또한 같지는 않아도 확실한 공허를 만들 것이다.
당신이 내 일상을 엉망으로 만들 생각이라면, 하다못해 네 가슴에 못이라도 하나 박아 주겠다고. 아주 가끔이라도 영구히 남아 버린 작은 구멍을 들여다보며 살게 해 주겠다고 지독한 남자가 맹세했다.
그 누가 이걸 사랑이라 말하겠냐만, 동시에 사랑이 아니면 뭐라고 지칭할까? 분노를 닮은 소유욕. 포기하지 않을 끈기. 상대에게 나의 흔적을 남기고 싶다는 참을 수 없는 욕망과 어쩌면 다른 결말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그 모든 게 범벅이 된 감정은 한 바구니에 들어가 결국 세상에서 가장 불규칙하고 비이성적인 감정이라는 사랑이 된다.
주현은 자신이 망가졌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첫사랑은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과거를 곱씹던 주현의 볼을 따스한 무언가가 감싸 쥐었다. 차인호의 손이 부드럽게 창백한 피부를 문질렀다.
“제발 좀 그렇게 해 주세요. 아프면 아프다 하고, 가이딩 부족하면 더 해 달라 하고.”
이안과는 달리 그저 따뜻하고 가벼운 감촉을 느끼던 주현이 손끝을 말아 쥐었다. 진정으로 주현을 생각하는 척, 모든 걸 다 줄 듯 굴고 있지만 그가 맞춘 틀에서 조금만 넘어가면 곧바로 빼앗아 갈 차인호를 알고 있다.
입술을 달싹이던 주현은 결국 말없이 고갯짓으로 대답했다. 차인호는 느리게 떨어졌다. 주현이 조금만 더 순진했다면 그가 아쉬워한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럼, 음…… 슬슬 자리로 돌아가셔야 하지 않나요?”
전부터 생각했지만 차인호는 질문이 적다. 사소한 건 많이 묻지만 정작 중요한 걸 묻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무관심한 사람에 대한 전형적인 반응이었다.
그런데 또 무관심한 것치고는 주현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 꼭 전부터 알던 사람인 것처럼.
지금도 그렇다. 사람을 많이 만나 본 건 아니지만, 평범한 사람이라면 여기서 주현의 심경 변화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을 것이다. 심지어 주현은 폭주 에스퍼니까, 위험한 폭주 에스퍼의 변덕이 무서울 만한데도 그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가이딩으로 상처를 회복하는 에스퍼와는 달리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차인호의 입술은 색이 짙고 조금 부어 있었다. 누가 봐도 방금 진하게 키스한 사람의 입술이었다.
“주현 씨?”
순식간에 마스크를 빼앗긴 차인호는 어리둥절해 보였다. 하얀 마스크를 만지작거리며 주현이 물었다.
“이거 제가 망가뜨리면 화낼 겁니까?”
오늘 차인호의 옷은 아주 평범했다. 모자를 푹 눌러쓴 만큼 머리도 전문가가 손질하지 않았고, 분위기도 한결 풀려 있다. 즉 연예인이 아닌, 그냥 관객 중 한 명으로 이곳에 있는 게 분명했다.
키와 아우라는 숨기지 못해도 지나치게 눈에 띄는 미모를 간신히 숨기던 마스크가 망가진다면 차인호는 남은 경기를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팬에게 시달리거나 일찍 돌아가야 할 것이다.
답을 고민하듯 눈을 가늘게 뜬 차인호가 선선히 대답했다.
“아니요.”
찌익, 얇은 마스크는 에스퍼의 악력에 간단히 찢어졌다. 두 동강 난 천 조각을 차인호에게 돌려준 주현이 가볍게 웃었다.
“아쉽네요. 당신이 화내는 거 보고 싶었는데.”
망설임 없이 돌아선 주현이 활짝 열린 문으로 걸어 나갔다. 싸늘한 무표정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홍채에 짙은 감정이 층층이 쌓여 있다. 패배감. 굴욕감. 기쁨. 분노. 희망. 억누르며 살아온 만큼 반동이 컸다.
주현은 바짝 마른 목구멍으로 억지로 침을 삼키며 동료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수화기가 줄에 매달려 허공에서 달랑달랑 흔들리는 공중전화 앞, 한 남자가 찢어진 마스크를 들고 덩그러니 서 있다. 장밋빛 입술을 하곤 빛이 쏟아지는 입구를 바라보는 눈빛은 제멋대로 엉켜 버린 실처럼 복잡했다.
애매한 감정의 파도 속에서 홀로 남은 가이드가 모자를 푹 눌러썼다. 드러난 귀 끝이 조금 붉은 것도 같았다.
* * *
“어디 갔다 이제 와? 화장실에서 길이라도 잃은 거야?”
어느새 돌아온 승철의 물음에 주현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크게 궁금하지도 않았는지 더 묻지 않은 승철이 제 옆자리를 두드렸다.
시끄러운 함성 속에서 동료들을 살피던 주현은 한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세화 누나는 어딨어?”
“저기.”
승철의 손가락이 가리킨 것은 경기장 내라면 어디서든 볼 수 있을 거대한 전광판이었다. 그 안에는 까만 헬멧을 쓴 몸집이 작은 에스퍼가 하늘을 향해 주먹을 치켜올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저게?”
C동으로 돌아가는 길. 이번엔 세화와 둘이서 차를 타게 된 주현이 어둑한 창밖을 멀거니 응시했다. 힐끗 바라본 반대쪽 창가에는 헬멧을 벗은 세화가 팔짱을 낀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피곤할 만했다. 계속 긴장하고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폭주 에스퍼 모두가 피곤하긴 마찬가지지만, 세화는 능력까지 시원하게 썼으니 곯아떨어지는 게 당연했다. 물론 이안의 가이딩으로 신체적인 피로는 그다지 없겠으나 정신적 피로는 가이딩이 해결해 주지 않는다.
폭주 에스퍼를 부른 것치고 협회는 그들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서커스 동물로 내세울 거면 그들을 더욱 많은 카메라 앞에 던져야 했고, 우호적인 이미지를 만들 생각이었다면 억지로라도 경기에 참가시켰을 것이다.
그렇다고 대놓고 차별하며 핍박함으로써 다른 에스퍼에게 경각심을 줬다기엔 그리 싸늘한 대우가 아니었다.
말하자면 어쩔 수 없이 부른 느낌이었다. 할 수 없이 불렀지만, 껄끄러우니 보이지 않게 구석에 얌전히 박아 뒀다는 느낌이 그곳에 있는 내내 들었다.
폭주 에스퍼이니 안전장치를 마련해 두었으나 묘한 미흡함이 있고, 손가락질하기엔 닿는 시선이 짧다.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있던 주현은 문득 단합회에 참가한 이들의 공통점을 떠올렸다. 운영 위원이든, 에스퍼든, 관객이든, 모두 주현과 그의 동료들에게 무관심했다.
열세 살이 될 때까지 그늘 속에서만 살아왔던 주현은 결코 떨어질 수 없는 새빨간 딱지를 단 후로 시선에 익숙해져야 했다. 공포, 경멸, 조롱. 담긴 게 무엇이든 그를 만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시선을 고정한 채 언제 나쁜 짓을 저지를지 감시하는 카메라처럼 주현을 주시했다.
그러나 에스퍼 단합회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운영 위원은 그들을 조금 더 신경 써야 하는 성가신 에스퍼로 봤고, 에스퍼들은 각자 팀을 위해 싸우느라 그들을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안전을 보장받기엔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관객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웃으며 축제를 즐겼다.
오랜만에 그늘 밑에 들어간 기분은 솔직히 말해 나쁘지 않았다. 아무도 그를 신경 쓰지 않고, 더운 숨을 흘리는 미친개가 아니라 그냥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사람이 된 듯한, 분명 거리는 있지만 그럼에도 소속된 듯한 느낌. 충족감.
주현은 익숙해지면 안 될 감정을 혈관에서 뜯어내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이게 다 차인호 때문이다. 그가 어떤 참견을 했는지 방송에서 천하의 신주현을 망할 겁쟁이로 만들어 놓은 탓에 사람들이 경계를 풀어 버리고 말았다.
스카프 아래에는 여전히 단단한 목줄이 있고, 여전히 그의 눈은 붉고, 여전히 주현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위험한 폭주 에스퍼인데도.
순간 뜨거운 키스가 머릿속을 스쳤다. 딱지조차 없이 매끄러운 입술을 혀로 매만지던 주현이 입술 끝을 앞니로 콱 깨물었다.
지금은 가이딩해 줄 가이드가 곁에 없는데도 습관처럼 통증을 음미하던 주현은 희미한 인기척에 옆을 보았다.
“……아까 봤어? 도련님 쌍코피 터진 거.”
세화의 목소리엔 은근한 자부심이 배어 있었다.
<에스퍼 단합회> 주최 측에서는 대체 그들을 왜 불렀나 싶을 정도로 어떠한 경기에도 끼워 주지 않았다. 안전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기에 불만은 없었다. 오히려 목숨 건 임무 없이 사람 구경도 실컷 할 수 있어서 조금 기쁘기까지 했다.
그런 와중에 참가자를 랜덤으로 골라 진행하는 경기에 우연히 세화가 걸렸다. 한 에스퍼의 능력으로 떠오른 화살표는 허공을 마구잡이로 맴돌다가 여러 사람을 골랐는데, 그중 한 사람이 바로 세화였다.
그 자리에 주현은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여러 말이 오갔다고 했다.
결국 참가 자격을 얻은 세화는 경기에서 화려하게 날뛰었고, 난다 긴다 하는 현역 에스퍼를 모조리 해치운 후 수많은 사람 앞에서 승리를 쟁취했다. 헬멧으로 가려졌는데도 그녀가 얼마나 즐겁게 웃고 있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