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76화
차인호는 바보가 아니다. 이런 낯선 번호를 받을 리가 없다. 설령 받는다 해도 오기로 했던 건 단순한 빈말이었는데 그걸 또 물고 늘어진다고 화를 낼지도 모른다. 물론 차인호가 그런 단순한 일로 분노할 거라 생각하진 않지만, 배우답게 연기를 잘하는 남자이니 속내는 또 모를 일이다.
주현은 차인호에게로 쏟아지는 사고를 되돌리려 노력하며 손에 익은 번호를 눌렀다. 힘껏 꾹 눌러야 하는 C동 전화기와는 달리 가벼운 손길로도 부드러운 소리와 함께 버튼이 눌렸다.
신호음은 꽤 길었다. 어쩌면 짧았을지도 모른다. 시계 없이도 얼추 정확하게 시간을 맞출 수 있는 주현은 지금 1초와 1분을 구분할 수 없다.
-여보세요?
“…….”
-무슨 일이에요? 주현 씨.
주현은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수화기를 들어 카메라가 달려 있는지 확인했다. 아무것도 없는 수화기를 다시금 귓가에 가져다 댄 주현이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어야만 전화해야 합니까? 언제든 전화하라고 했던 건 그쪽인데요.”
정곡을 찔리면 가시를 세우는 주현의 나쁜 버릇이 그대로 혀를 타고 흘러나왔다. 전화선을 손가락으로 빙빙 돌리며, 주현은 아무도 보지 못하게 울상을 지었다.
-그렇긴 한데, 최근에는 연락을 안 하시길래. 이젠 그만둔 줄 알았죠.
그만두길 바란 건가? 전화가 끊겨서 기뻤나? 혹시 전화하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인가? 비 오는 날의 안개처럼 뿌옇게 머릿속을 채워 가는 부정적인 생각은 뒤이어 들려온 말에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목소리 들으니까 좋네요.
숨결에 담긴 희미한 웃음은 깨끗한 음질로 주현에게 배송되었다. 주현은 이미 피가 나는 입술을 더욱 괴롭히며 텅 빈 복도 너머를 응시했다.
차인호는 항상 이렇다. 한껏 밀어내다가도 갑자기 불쑥 다가온다. 잠자리야 가이드의 의무이니 별 뜻 없었다 해도, 이런 말은 그 어떤 가이드에게도 의무로 주어지지 않는다.
목소리로는 가이딩이 불가능하다. 즉, 그저 공적인 사이일 뿐인 두 사람이 전화를 이어 갈 필요는 어디에도 없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차인호는 친히 제 시간을 버려 가며 전화기를 들고 바보 같은 대화를 나눈다. 바로 얼마 전에 넘을 수 없는 깊은 선을 눈앞에서 그은 주제에.
마치 주현의 마음을 알고 조롱하는 것 같다. 순간 든 생각에 참을 수 없는 감정은 분노의 껍데기를 쓰고 주현의 혈관을 배회했다.
“……협회에서 팀마다 가이드를 배치해 줬어요.”
갑작스러운 말에도 차인호는 말없이 들어주었다. 어쩌면 관심이 없어 그냥 침묵하는 걸지도 모르지. 주현의 이마가 차가운 전화기에 툭 닿았다.
“저희 팀 가이드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이안이에요, 이안.”
-…….
“SS급이라 그런가 확실히 다르긴 합니다. 손끝만 닿아도 부러진 뼈가 나을 정도니까.”
문밖 경기장에서 커다란 환호가 들려왔다. 뭔가 대단한 장면이라도 나온 듯했다. 그늘진 복도에서 처량하게 고개 숙이고 있는 주현과는 다른 세상 같았다. 게이트를 넘은 것도 아닌데.
“근데, 그래도…… 이상하죠?”
-뭐가요?
“전 SS급 가이드보다 B급 가이드의 가이딩이 더 좋더라고요.”
패배가 이어진다. 주현은 죽을 것 같은 심정으로 눈을 감았다.
매칭 에스퍼가 다른 가이드에게 가이딩을 받으면 대부분의 가이드는 기분이 상한다고 했다. 차인호도 그랬으면 싶었다. 빼앗겼다는 심정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까, 그냥 약간의 찝찝함 정도라도.
터무니없는 소망이 구체성을 가진다. 이게 바로 짝사랑의 나쁜 점이다.
그냥 헛웃음이나 치곤 바쁘니까 끊으라고 하면 좋을 텐데. 더 이상 어떤 기대도 하지 않도록 한 번 더 선을 그어 준다면, 그러면 주현은 더 큰 걸 바라지 않을 수 있을 텐데.
-그거 참 다행이네요. 이젠 당신 가이딩 너무 재미없어서 못 받겠다고 할까 봐…….
복도 모퉁이에서 가벼운 인기척이 들렸다. 차인호의 발소리는 부드럽고 정중하다. 단번에 알 수 있다.
“무서웠는데.”
주현은 느린 속도로 옆을 보았다. 검은 모자를 눌러쓴 채 마스크를 손끝으로 잡아당긴 차인호가 서 있었다. 주현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이럴 줄 알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차인호는 마스크를 턱에 걸치곤 슬쩍 웃었다.
“응원하러 온다고 말했잖아요.”
그 말이 진심이었길 바랐으면서 정작 현실이 되자 우습게도 주현은 도망가고 싶어졌다. 실망하는 데 익숙한 남자가 손에 들린 선물을 풀지도 못한 채 얼어붙었다.
천천히 다가온 차인호는 어쩐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쩌면 바깥의 함성이 신경 쓰였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매칭 가이드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에스퍼는 꾹 쥐었다가 이내 힘없이 늘어지는 차인호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해 줄까요? 가이딩. B급이지만.”
주현의 입꼬리가 위를 향해 밀려 올라갔다. 누군가는 악마 같다고 말한 눈동자를 반으로 접으며, 날카로운 송곳니를 번뜩이며 그렇게 웃었다.
사람은 너무 슬프면 웃음이 나온다. 그의 가족이 모조리 죽은 날에도 그랬다. 피투성이 바닥에 엎드려 한참을 울다가 실성한 듯 웃었던 아이는 커서 눈물 없이 우는 법을 배웠다.
빌어먹게 불쌍한 자신을 동정하며, 주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희망은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고문이다. 절망은 아프지만 단순하고 결국 체념함으로써 해방될 수 있으나, 희망은 탈출구가 없다. 열 번 때려도 한 번 잘해 줬다고 거기에 매달리게 만드는 게 희망이고, 거미줄이 더욱 빨리 몸을 감는다는 걸 알면서도 발버둥 치게 만드는 게 희망이다.
희망의 끝은 두 갈래로 갈라진다. 원하는 걸 손에 넣을 때까지 희망하거나 혹은 포기하거나.
주현은 포기가 몸에 익은 사람이다. 그의 분노는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발악일 뿐, 상황이 나아질 거란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는다.
너무나도 오랜 시간을 엄마의 애정을 갈구하며 흘려보내서 그렇다. 오랫동안 새아빠 근처를 서성여서 그렇다. 길고 긴 시간 동안 만약 폭주하지 않았다면 어땠을지 곱씹으며 자기 자신을 괴롭혀서 그렇다.
그에게 ‘혹시’는 일종의 게임이다. 지루한 일상을 조금이나마 다채롭게 만들어 주는 씁쓸한 향신료이자 결국에는 빼앗긴다는 익숙함을 얻는 행위다.
그런 점에서 차인호는 최고이자 최악의 게임 상대였다. 그는 때리지 않는다. 대신 다정한 손길을 내밀곤 그걸 가져가 버린다. 그는 거미줄을 치지 않는다. 대신 꿀을 내줄 것처럼 향기를 뿜으면서 정작 다가가면 봉오리를 꾹 다문다.
그가 내미는 건 나쁜 것과 덜 나쁜 것이 아닌, 좋은 것과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늘 최악과 차악 사이를 오가며 숨 쉬던 주현에겐 지독하게 낯설다.
그중에서도 가장 나쁜 점은, 좋은 걸 손에 넣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나쁘게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최악은 체념하면 되고, 차악은 더 나쁠 수도 있었다는 합리화가 가능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건? 좋은 걸 손에 넣지 못했다는 아쉬움과 그로 인한 부정적인 감정이 무럭무럭 자라난다.
차인호의 가이딩은 주현이 평생 받아 온 어떤 가이딩보다 안락하고 따스하다. 그걸 잃은 후엔 일상적이던 불쾌한 가이딩은 끔찍한 가이딩으로 변할 것이다.
차인호의 목소리, 손길, 미소. 애초에 주현의 인생에 존재하지도 않던 것들이 불쑥 들어와 자리 잡곤 아픈 빈자리를 남긴 채 떠난다.
그럼 주현은 남은 생 동안 좋은 것이 사라짐으로써 나쁜 것이 된 일상을 끌어안은 채 살아야 한다. 혹시나 차인호가 생각나서 불쑥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빌어먹을 희망을 가지고 말이다.
주현의 절친한 친구인 체념은 쉽사리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그야 사랑은 그런 감정이니까. 사랑과 희망은 거지 같은 것들끼리 꼭 붙어서 늘 함께 다닌다.
사랑과 희망은 수많은 사람을 지독하게 괴롭혔다. 그중 한 사람이 된 주현은 꿀을 못 얻은 나비가 아니라 거미줄에 걸린 나비가 된 심정으로 차인호를 바라보았다.
하나, 유감스럽게도 그는 아름다운 나비가 아니라 사람들이 기피하는 벌이다. 독이 든 바늘을 들고 위협적인 소리를 흘리는 남자가 눈가를 찡긋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저 지금 다친 곳이 여기밖에 없는데.”
에스퍼의 흉 진 손끝은 입술 위에서 멈췄다. 작은 상처는 이미 피가 멎어 거멓게 말라 있었다.
모자 그늘 때문에 평소보다 어두운 차인호의 두 눈이 어디서 훔친 건지 모를 빛을 담고 별처럼 반짝였다. 가이드의 손은 망설임 없이 뻗어졌다. 그리고 입술에 닿기 직전, 주현은 손가락이 길게 뻗은 예쁜 손을 허공에서 잡아챘다.
“일 제대로 한다면서요.”
주현은 혼자만의 내기가 어떻게 끝날지 궁금했다. 언제 사람이 올지도 모르고, 누가 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이곳에서 차인호는 과연 그에게 입을 맞출까?
‘제발 하지 마.’
제발 하지 마라. 제발 하지 마라, 제발. 관성적으로 지는 쪽에 건 주현은 차인호가 다가오자 그야말로 엉엉 울음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마음을 숨기며 고개를 틀었다.
익숙하지 않은 패배에 가슴이 따끔거렸다. 그러나 분노는 주현에게 무엇보다 친숙한 감정이라. 모든 감정을 분노로 치환하며 살아온 남자는 이번에도 그렇게 하며, 미처 놓친 약간의 달콤함을 품에 안은 채 가이드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멋모르는 어린애들의 순진한 입맞춤 따위는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차인호는 뜨겁고 미끈한 살덩이를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차인호의 두 팔이 주현의 어깨에 올라앉았고, 이마에 챙이 눌린 모자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문 너머 경기장에서 들려오는 거대한 함성은 어두운 복도에서 울리는 외설스러운 소리를 가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