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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83/161)

폭주 에스퍼 75화

다가온 사람은 제법 덩치가 큰 남자로, 아까 전 A조 소개에서 봤던 에스퍼였다. 한 손을 들고 반가운 듯 다가온 남자를 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타인의 적의에 특히나 민감한 주현은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물통을 단단히 쥐었다.

“이야, 오랜만이다? 너는 어째 달라진 게 없냐.”

“어어, 그래. 넌…… 많이 늙었네.”

채경의 수더분한 대답에 남자는 화가 난 듯 미간을 구겼으나 이내 깔보는 듯한 미소를 되찾았다.

“네가 폭주했다는 소식 듣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남자는 자신이 눈앞에 있는 네 사람의 역린을 동시에 건드렸다는 사실도 모른 채 큰 소리로 말했다.

“너만큼 열심히 일하는 놈도 없었는데. 어?”

“아…… 그랬나?”

“설마설마 고채경이 폭주할 줄이야. 너 폭주할 때 뉴스에도 나왔잖아. 동료가 제압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면서 우리가-”

“야.”

무관심과 경멸 속에서 살아온 주현은 타인을 위협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서 있는 사람과 바닥에 앉아 있는 사람. 분명 시야가 훨씬 낮은 사람은 주현임에도 그는 꼭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남자를 노려보았다.

“꺼져.”

“……너 뭐라 했냐?”

“입 다물고 꺼지라고.”

채경이 말리듯 주현의 팔에 손을 얹었지만, 부드럽게 뿌리친 주현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모르는 곳에서 욕하는 건 아무 상관도 없다. 설령 앞에서 경멸한다 해도 어느 정도는 참아 줄 수 있다. 하지만 동료가, 채경이 이런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는 건 보기 싫었다. 주현은 오로지 자신을 위해 채경의 앞을 가로막고 남자와 마주 보았다.

“폭주 에스퍼 주제에 누구한테 덤비는지 알고나 있는 거냐?”

“아주 잘 알고 있지. 곧 있으면 두들겨 맞고 울면서 도망갈 놈이잖아.”

눈앞의 남자는 모르는 것 같지만 봄과 세화도 전투, 혹은 달려올 경비들에 대비해 가볍게 준비하고 있었다.

어쩔 줄 몰라 하며 떨떠름하게 일어선 채경이 주현의 어깨를 잡았다.

“주현아, 동준이는…….”

늘 쓰고 다니는 선글라스는 햇볕 때문에 평소보다 훨씬 더 안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눈이 마주쳤다는 건 확실하게 느꼈다. 주현과 마찬가지로 붉은색일 눈동자는 그에게서 떠나 동준에게 닿았다.

“동준이는 아빠가 협회 임원이라서 그거 믿고 아직도 철이 없어. 네가 좀 이해해 줘.”

더 이상 떨어질 곳이라곤 없는 절벽 아래에서 폭주 에스퍼들이 웃었다. 그 미소는 가히 악마와 닮았으나 지옥에서 악마처럼 웃는다고 이상할 건 없다.

남자, 동준의 얼굴이 마침내 분노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바들바들 떨리는 주먹은 당장에라도 내뻗을 듯했으나 생각보단 참을성이 있는 것 같았다.

“꼴에 또 도련님이야?”

세화의 목소리는 크고 뚜렷했다. 동준의 파장이 흔들림에 따라 바닥의 돌조각이 가볍게 굴렀다.

“폭주 에스퍼 따위가 감히……!”

“아까부터 폭주 에스퍼에 집착하는데, 네 말대로 우린 폭주 에스퍼라서 떨어질 평판도 없거든. 무슨 짓을 하든 할 만한 애들이 저지른 거니까 누구 하나 놀라지도 않을걸.”

동준은 곧바로 봄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여태껏 쉬운 임무만 골라 하며 살아온 에스퍼에게 겁먹기엔 그녀의 인생은 충분히 고난의 연속이었다.

1부가 끝나고 생방송이 잠시 중단된 시점이라 해도 여전히 관객과 돌아다니는 사람이 많았다. 이런 곳에서 소란 피웠다간 수습이 힘들 걸 알았는지 혀를 찬 동준이 주현에게로 화살을 돌렸다.

“매칭 가이드 믿고 그러나 본데, 연예인이랑 연줄 좀 생겼다고 어떻게든 될 것 같아? 내 말 한마디면 차인호는 당장 내일 길바닥에 나앉을 수 있어.”

아무리 협회가 돈이 많아도 고작 임직원 아들의 투정을 받아 주겠다고 유명 스타인 차인호를 어떻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단순한 허세든, 아니면 정말로 자신의 권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든 동준의 말을 깊이 받아들일 이유는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주현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를 수 없었다. 거멓게 가라앉은 붉은 눈은 열등감에 가득 찬 온실 속 화초를 꿰뚫을 듯 응시했다.

“에스퍼가 남의 매칭 가이드를 건든다는 건 누구 하나 죽을 때까지 싸워 보잔 뜻이라던데……. 그런 의미 맞지?”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만 같은 살벌한 분위기가 이어졌으나 결국 먼저 돌아선 사람은 동준이었다. 그는 끝까지 자존심을 지키며 어쩔 수 없이 가 준다는 기색을 풀풀 풍겼다.

퇴장하는 그의 뒷모습을 폭주 에스퍼들이 벌건 눈으로 지켜보았다.

의도적인지는 모르지만, A조는 X조의 자리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다. 지나가다 들르기는커녕 눈조차 마주칠 수 없는 터라 예전 동료와 어색하게 만날 필요가 없었다. 다들 이미 폭주한 지 몇 년이 지났고, 그동안 어떠한 연락이나 소식도 듣지 못했으니 아무리 친했던 이라도 선뜻 올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지간히 널 미워했나 보네.”

툭 말을 내뱉은 세화는 거칠게 바이저를 내리곤 돗자리에 드러누웠다.

“하하, 나는 나름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열의 없는 거짓말을 늘어놓은 채경은 어쩐지 시원한 얼굴로 널따란 경기장을 응시했다. 붉게 물들어 버린 눈을 가리려는 용도인지 혹은 다른 이유가 있는지, 늘 빼놓지 않고 끼고 다니는 선글라스 표면에 주현의 얼굴이 반사되었다.

채경은 폭주 전 제법 유명한 에스퍼였다. 드문 S급인데다 잘생기고 성격도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함께 지내며 알게 된 그는 실없는 장난을 좋아하고 은근히 게으른, 그다지 완벽하진 않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남을 생각하고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기도 했다.

폭주 전부터 그를 알았다던 세화는 지금이 훨씬 낫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주현아, 찾던 사람은 찾았어?”

당황으로 움찔거린 주현이 코끝을 찡긋거리며 고개 저었다. 아까부터 날카로운 눈으로 관객석을 훑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티가 났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조금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차인호 아직 안 왔어?”

“……차인호 기다린 거 아니거든.”

대답하고 나서야 투정 부리는 듯한 말투라는 걸 자각한 주현이 힐끔 봄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꼭 어린 동생을 보는 듯 흐뭇한 시선으로 말없이 주현을 응시했다.

“그럼 누구 기다려?”

봄과 같은 미소를 지은 채경이 물었다. 세화는 헬멧 때문에 안이 보이지 않았지만, 누운 채로 꼰 다리가 흥미롭게 까딱이는 걸 보면 대화를 듣고 있긴 한 것 같았다.

“나 화장실 갈 거야.”

그리 급해 보이지 않게 노력하며 일어난 주현이 천막을 벗어났다.

뜨거워진 볼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걷던 주현은 동행해 줄 직원을 찾았지만 모두가 바빠 보였다. 폭주 에스퍼는 마음대로 경기장을 돌아다니면 안 된다. 정해진 자리가 아닌 이상 늘 직원의 감시하에서 움직여야 한다.

그렇다고 다시 자리로 돌아가기엔 또다시 놀림이 시작될 것 같아 망설이던 주현은 결국 크게 자리를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어느 정도 혼자 있을 수 있는 장소를 찾았다. 경기장과 이어진 작은 통로였는데, 인적은 없으면서 문은 활짝 열려 있는 덕에 주현의 모습이 가려지지 않았다.

그늘 속에서 한숨을 푹 내쉰 주현이 손바닥에 얼굴을 비볐다.

아까 전 SS급의 가이딩을 받은 터라 몸은 날아갈 듯 가볍다. 하지만 가이딩이 필요 없는 상태임에도 그는 가이드를 만나고 싶어서 초조할 지경이었다.

차인호는 분명 경기장에 온다고 했다. 그래 봐야 경기에 나가는 것도 아닌데 그를 응원하기 위해서.

죽이기로 결정한 마음은 아직 죽지 않고 주현의 혈액을 따라 온몸을 맴돌고 있다. 그게 너무나도 끔찍해서 주현은 콱 죽고 싶어졌지만 대신 벽을 걷어차곤 찌르르 울리는 통증에 몸을 맡겼다.

스스로에게 벌주는 데 익숙한 남자는 임원의 아들이라던 멍청한 에스퍼를 떠올리곤 이번엔 주먹으로 벽을 때렸다.

매칭한 에스퍼와 가이드가 세트 취급받는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겪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이 자리에 있지도 않고 관련도 없는 이가 오직 주현의 매칭 가이드라는 이유만으로 언급된 건 처음이었다.

동준을 두들겨 패고 싶은 마음과 자꾸만 들뜨는 마음이 서로 충돌했다. 어느 한쪽의 편을 들어주지 못한 주현이 약간의 자괴감과 함께 거칠게 일어난 입술 껍질을 앞니로 뜯었다.

기어코 까졌는지 따끔한 통증과 함께 비릿한 맛이 혀끝을 맴돌았다. 그걸 더듬고 있자니 부드럽고 따뜻한 누군가의 입술이 떠올랐다.

굳은 얼굴로 품을 뒤적이던 주현의 손끝에 가장 먼저 걸린 것은 담뱃갑이 아니라 차가운 라이터였다. 둥그스름한 모서리를 만지던 주현은 조금 떨어진 벽에 공중전화 세 대가 나란히 붙어 있는 걸 발견했다.

C동에 있는 것관 비교가 안 되게 세련된 전화기는 손을 많이 안 탔는지 무척 깨끗했다. 그리고 주현은 가운데 공중전화에서 동전 몇 개를 발견했다. 그걸 손에 쥐고 굴리고 있으니 꼭 나쁜 짓이라도 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는 자신이 하려는 행동이 비합리적이고 쓸모없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의 인생에 어떠한 도움조차 되지 않는, 오히려 일을 꼬이게 만드는 바보 같은 행동.

하지만 주현은 지금 당장 그의 가이드와 대화하고 싶었다. 오기로 했는데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고, 그가 들었다면 어쩌라고 싶은 말을 털어놓고 싶었다.

달그락, 동전이 투입구로 들어가는 소리가 경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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