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73화
협회는 물론이거니와 참가하는 에스퍼, 시청자들까지 폭주 에스퍼가 정말 단합회를 즐기기 위해 참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야말로 구경거리였다.
그동안 시야에 들어오지 않도록 구석에 숨겨 두었던 치부가 차인호라는 계기로 세상에 드러났다. 그 기회를 살려서 협회에 긍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든, 하다못해 화제성이라도 몰기 위해 그들은 카메라 앞에 내던져졌다.
“……예상은 했지만 더 지독하네.”
봄의 속삭임에 폭주 에스퍼들이 하나같이 긍정했다.
X조는 가장 마지막에 입장했다. A조부터 G조까지 관객의 환호를 받으며 입장한 후, 마치 특이한 동물을 소개하는 서커스 단장처럼 사회자가 그들을 소개했다.
문이 열리고, 각자의 개성에 맞게 커스텀한 제복을 입은 여타의 에스퍼완 달리 지급된 대로 입은 폭주 에스퍼들이 들어섰다. 온몸 곳곳에 장식된 붉은색은 죄의 상징이다. 마주치는 즉시 도망가라고 배운 관객들이 입을 다물었다.
다섯 명밖에 없는 X팀은 가장 수가 적었으나 분위기만큼은 어느 팀과 비교해도 지지 않았다.
정적 속에서 걸어 나온 이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선 에스퍼들보다 조금 더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섰다. 그들을 위해 깃발을 들고 서 있던 직원의 얼굴이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가장 앞에 서 있던 주현과 그녀의 시선이 마주쳤다. 덜덜 떨리는 손끝을 응시하던 주현이 싱긋 눈꼬리를 휘었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미소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사회자가 단합회의 시작을 외쳤고, 다시금 거대한 경기장이 소란스러워졌다. 올려다본 하늘은 눈이 시릴 정도로 새파랬다.
* * *
<에스퍼 단합회>는 거대한 종합 경기장을 통째로 빌려서 진행되었다. 관객 수도 많고, 전국에서 모인 에스퍼가 일반인과 직접적으로 만나는 자리라 안전은 무엇보다 중요하게 관리되었다.
바로 그런 이유로 X팀은 가장 구석진 자리를 배정받았다. 일반인과의 심리적 거리를 좁히기 위한 자리인 만큼 각 팀은 관객석 바로 앞에 대기실 겸 쉴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여긴 왜 이렇게 그늘졌대.”
돗자리에 앉은 승철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경기장의 뒷문 바로 옆에 옹기종기 모인 C동 에스퍼들은 다른 곳에 비해 유독 휑한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원해서 좋네.”
“그건 그렇다. 사람도 없고.”
멀찍이 떨어져 잘 보이지 않는 옆 팀 사람들은 관객과 화기애애하게 소통을 주고받는 듯했다. 그걸 생각하면 그들의 자리 뒤쪽 객석이 텅 빈 게 고마울 지경이었다.
돈도 많은 협회가 주최한 것치고 돗자리에 천막 하나씩 친 허접스러운 자리였으나, 이 또한 일반인에게 너무 멀기만 한 사람들이라는 이미지를 지우기 위함이다. 물론 협회가 원하는 것 따위 일말의 관심도 없는 폭주 에스퍼들에겐 귀찮으면서도 불편하기까지 한 행사일 뿐이지만.
“안녕하세요. X팀 맞죠?”
미리 준비되어 있던 가벼운 간식들을 승철이 주머니에 쑤셔 넣는 걸 옆에서 조언하던 때였다. 주현은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절로 소름이 쫙 끼치는 걸 느꼈다. 몇 년 만에 듣는 목소리지만 결코 잊을 수는 없었다.
“……그렇긴 합니다만. 그쪽은 누구신지?”
헬멧의 바이저를 슬쩍 올린 세화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다들 아닌 척해도 긴장도가 확연히 올라간 걸 알 수 있었다.
주현이 천천히 뒤로 돌았다. 협회 소속 가이드라는 걸 나타내는 보라색 조끼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흰색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던 남자가 얼굴을 들었다. 누가 봐도 착한 사람이라고 광고하듯 유순하게 내려간 눈꼬리가 부드럽게 접혔다.
“오늘 하루 동안 X팀을 가이딩할 가이드입니다. 수치가 떨어지면 언제든 저에게 오세요.”
주변에 꽃이 피어난 듯 화사한 미소에도 X팀의 분위기는 싸늘했다.
“……이안?”
“절 아시는 분이 있었군요.”
생글생글 웃는 얼굴에서 진심이 보인다는 게 그의 무서운 점이다.
X팀에서, 정확히는 에스퍼들 사이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이안은 나라를 통틀어도 몇 없는, 극도로 희귀한 SS급 가이드다. 가이드의 등급은 발현 후 컨디션에 따른 미세한 차이를 제외하고 웬만해선 변동이 없다.
열세 살의 어린 나이부터 쭉 어화둥둥 협회의 자랑으로 살아온 그는 오만에 빠지기 쉬운 환경임에도 모두에게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으로 자라 일반인들에게까지 인기가 많았다.
‘이안’이 한국 이름인지, 외국 이름인지, 자신이 지은 예명인지,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은 가이드는 환영받지 못하는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했다는 양 여전히 화사한 미소를 뿌렸다.
“대단하신 분이 이 누추한 곳엔 무슨 일로?”
“말했잖아요. 제가 X팀에 배정된 가이드라고. 다른 팀에도 각자 훌륭한 가이드들이 배정됐어요.”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은 없었다.
SS급 가이드를 불쑥 내민 이유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먼저 폭주 에스퍼를 선뜻 가이딩하겠다는 가이드가 없었을 테고, 또 높은 등급으로 유명한 이안을 보냄으로써 사람들에게 그들이 이곳에서 가이딩 부족으로 재폭주하지는 않을 거란 인식을 줄 수 있다.
거기다 협회의 아들이라는 별명이 있는 이안이 그들 곁에 가까이 있는 걸로 X팀이 안전하다는 생각도 심을 수 있는 것이다.
장점밖에 없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슬금슬금 움직여 이 중에서 가장 덩치가 큰 승철 뒤로 은근슬쩍 숨던 주현은 콕 집어 저를 부르는 이안에 볼 안쪽을 씹었다.
“오랜만이네, 주현아.”
마지막으로 만난 게 5년 전이니 잊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산산조각이 났다. 주현은 대놓고 큰 소리로 혀를 찼다.
“왜 그런 표정이야, 서운하게. 내가 널 키웠다고도 할 수 있는데. 응?”
“무슨 헛소리야.”
낮은 목소리의 위협적인 대꾸에도 이안은 겁먹은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한 걸음 다가와 쪼그려 앉고는 주현을 똑바로 마주 보기까지 했다.
“너의 그 지독한 영양실조 누가 고쳐 줬지? 나 아니었으면 이만큼 자라지도 못했어. 너 전에 손가락 떨어졌을 때 붙여 준 사람은 누구고?”
“그건 애초에 당신이……!”
이를 악물고 말하던 주현이 커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떠들어 봤자 그의 입만 아프다. 그때, 고요하게 상황을 관찰하던 봄이 깨달았다는 듯 외쳤다.
“아, 이 사람이 걔야? 그 사이코패스?”
“사이코패스라뇨. 저 그런 사람 아닙니다.”
5년 전에 이미 C동에 있었던 세화까지 눈썹을 구겼다. 상황을 모르는 승철과 채경은 어리둥절하면서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
“주현아, 동료들에게 나를 사이코패스라고 소개했니? 몇 번이나 말했잖아. 난 그저 남들보다 파괴적인 취향을 가지-”
“그걸 세간에서는 사이코패스라고 말해, 이 사이코패스야.”
자신보다 여덟 살은 어린 주현의 빈정거림에도 이안은 화난 기색 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곤 천천히 일어나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전 주최 측 자리에 있어야 해서 쭉 함께 있을 순 없지만, 시간마다 와서 가이딩해 드릴게요. 그 외에도 필요하다 싶으시면 언제든 저쪽 천막에서 절 찾으세요.”
이안은 곧장 손을 뻗어 주현의 양 볼을 감싸 쥐곤 떡 주무르듯 마구잡이로 눌렀다 잡아당겼다. 그저 괴롭힘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으나, 주현은 가이딩이 흡사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걸 느꼈다.
“너 정말 많이 컸구나. 눈물, 콧물 다 흘리며 울던 게 엊그제 같은데.”
입술을 꾹 깨문 주현이 이안의 손을 밀쳐 냈다. 그 와중에도 다치지 않도록 힘 조절을 한 건 오랜 습관이 사라지지 않은 탓이다.
이안이 있는 힘껏 잡아당긴 볼은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며칠은 멍 들어 있었겠지만, 상처가 생긴 순간 가이딩으로 사라져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미련 없이 돌아선 이안은 다른 X팀에게도 하나씩 다가가 가이딩했다. 평범하게 악수로 가이딩하는 모습을 보며 아무 흔적도 남지 않은 볼을 문지른 주현이 지친 듯 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이안의 가이딩은 대단했다. 가벼운 접촉만으로도 깨끗하고 거대한 가이딩이 물밀듯 밀어닥친다. 에스퍼라면 누구나 곁에서 머물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주현은 이안을 백 명 준다고 해도 차인호 한 명이 더 좋았다. 차인호의 가이딩은 이안보다 덜 선명하고 더 작지만, 그 정성스러운 가이딩이 훨씬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럼, 다들 단합회를 즐겨 주세요.”
이안이 돌아가고 다시금 조용해진 천막 아래에는 사소한 생채기마저 완전히 사라진 에스퍼 다섯이 멍하게 서 있었다.
“확실히 SS급이 좋기는 하네. 나 한 달째 아프던 발목이 멀쩡해졌어.”
채경을 시작으로 다른 이도 하나둘씩 궤를 달리하는 가이딩에 대해 말을 얹기 시작했다. 고작 악수 하나로 컨디션이 이만큼 회복된다면 더한 걸 하면 날 수도 있겠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왔다.
“대신 성격이 저 모양이잖아.”
주현은 이안이 사라진 방향으로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맞다, 사이코패스라고 했나? 아무리 가이딩이 대단해도 그건 좀…….”
당시 C동에서 일했던 직원 중, 정확히는 이안이 떠난 가이딩 룸이 온통 피투성이가 된 걸 본 직원 중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사람은 없다. 그게 우연인지 누군가의 개입인지는 모른다. 사실 알고 싶지도 않은 주현이 다시 한번 혀를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