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72화
폭주 에스퍼들의 은근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참가는 취소되지 않았다. 오히려 대대적으로 홍보까지 하고 있다는 말에 모두의 얼굴에서 실망이 맴돌았다.
“아무도 보러 안 오는 거 아냐?”
세화의 중얼거림에 주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전날 임무에서 다친 팔에 붕대를 새로 감던 그는 한 손으로도 능숙하게 매듭을 묶었다.
“사방에 널린 게 에스퍼인데. 우리가 단체로 폭주해도 순식간에 제압당할걸.”
여기서 말하는 제압은 사살과 같은 말이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평소완 달리 상층부에서 스물네 시간 내내 그들의 파장을 모니터할 예정이다. 일정 치 이상의 변화가 감지되는 즉시, 버튼을 눌러 다른 사상자를 내지 않을 터이니 그에 대해선 걱정할 필요가 없다.
물론 이성과 감성은 다른 영역이고, 머리로는 알아도 마음은 그렇지 않은 일이 허다하다.
협회는 폭주 후 살아남은 에스퍼에게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세뇌될 정도로 각인시킨다. 경각심을 가지고 다시는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기 위한 예방이라는데, 폭주가 조심한다고 안 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그저 쓸모없는 괴롭힘이라고밖에 보이지 않는다.
어쨌든 폭주 에스퍼는 누구나 자신이 괴물이라는 생각을 머릿속에 품고 있다. 그러다 보니 다들 말은 하지 않아도 두려움에 잠겨 있었다.
“만약 그보다 빨리 민간인이 휘말리면?”
세화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주현과 닮은 구석이 있다. 쉽게 화내는 세화와 쉽게 분노하는 주현. 감정을 폭발시키느냐 눌러 참느냐의 차이는 있어도 어느 정도 서로의 기분을 읽을 수 있다.
지금 세화는 주현과 같은 감정일 것이다. 억울하고. 화나고. 두렵고. 아무도 못 보게 구석에 처박아 둔 주제에 이제야 밖으로 잡아끄는 협회가 억울하고, 거절조차 못 하는 자신에게 화가 나고, 기어코 다시 한번 이성을 잃고 사람들을 학살하는 괴물이 될까 봐 두렵고.
괜찮을 거라는 입바른 말은 하지 못했다. 대신 주현은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약속을 꺼내 들었다.
“그렇게 되기 전에 내가 죽여줄게.”
언젠가 비릿한 내음이 맴도는 항구에서 범규와 했던 약속이기도 하다.
“그런데 만약 내가 거기서 폭주한다면…….”
애매하게 끊긴 말에도 역시나 이해한 듯 세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초콜릿색 머리카락이 가볍게 흔들렸다.
“내 손으로 끝내 주마.”
폭주한 지 6년째인 세화는 결코 살갑지도 다정하지도 않지만 뱉은 말은 반드시 지킨다. 그걸 알기에 주현은 웃을 수 있었다. 희미한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졌으나 세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에스퍼 단합회> 당일, C동 에스퍼들은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갖가지 준비를 해야 했다.
손목과 발목에는 위기 상황 시 저들끼리 달라붙는 강력한 자석 고리를 차고, 목을 감싼 초커를 숨기기 위해 특수 제작한 붉은 스카프를 착용했다. 마지막으로 GPS가 완벽히 작동하는지 한 명 한 명 전부 확인하고 나서야 준비가 끝났다.
“이건……. 진짜…….”
“와, 대박이다. 차라리 다른 임무를 주든가.”
“그러니까. 이거 앞은 제대로 보여?”
채경은 손에 든 커다란 헬멧을 둘러보다가 머리에 뒤집어썼다. 이리저리 고개 돌리던 그가 무언가 말했지만, 헬멧 때문에 웅얼거리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얼굴을 완전히 감싸는 풀페이스 헬멧은 여닫을 수 있는 바이저마저 까맣게 선팅되어 안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태석이 세화에게 던져 준 것이다.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 없도록 얼굴을 가리라는 뜻이었는데, 말이 쉽지 땡볕 아래에서 단단한 헬멧을 뒤집어쓰고 있으면 열사병에 걸릴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저 치부만 숨기면 되기에 폭주 에스퍼 한 명이 쓰러지든 말든 관심조차 없다.
커다란 한숨을 내쉰 세화가 검은 헬멧을 뒤집어썼다. 몸집이 작은 그녀에겐 무척 컸으나 폭주 에스퍼로서 6년을 살아남은 세화가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드디어 준비를 마친 C동 에스퍼들이 직원의 지시에 따라 하나둘씩 차에 올라탔다.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 인원을 나눈 덕에 채경과 둘이서 탑승한 주현이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벌써 지친다. 그렇지?”
언제나 다정한 채경의 목소리에 주현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그렇게 힘들지는 않을 거야. 그냥 앉아 있다 보면 끝나. 폭주하고 참가하는 건 처음이라 달라진 게 있을 수도 있지만, 하하.”
“난 괜찮은데, 형은?”
“어?”
“형 아는 사람 만날 수도 있잖아. 괜찮아?”
폭주 후 살아남은 에스퍼가 가장 힘들어하는 건 단연 지금까지 일궈 온 모든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기는 것이다. 가족, 친구, 동료, 가이드. 이어진 선은 끊어지고 회색 감옥 안에서 홀로 남겨졌다는 두려움은 에스퍼의 정신을 갉아먹는다.
채경은 그걸 극복했으니 4년째 살아남은 것이지만, 폭주 에스퍼인 자신을 받아들인 후에 예전 동료를 만나는 건 주현이라면 자존심이 많이 상할 듯했다.
“나야, 뭐…… 괜찮을 거야.”
그는 주현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저 단단한 유리창에 가로막힌 너머 어딘가를 응시했는데, 웃지 않은 채였다.
캐묻는다면 무언가를 더 말해 줄 듯했으나 주현은 굳이 묻지 않았다. 그가 아닌 C동의 누가 이곳에 있었어도 그리했을 것이다.
참견은 폭주 에스퍼의 덕목이 아니다. 정확히는, 해결 방법이 없는 일을 들쑤시는 건 괜히 상처를 한 번 더 들추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 오랜 시간에 걸쳐 그 사실을 깨달은 주현이 덜컹거림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가는 길은 조용했지만 어색하지는 않았다.
이른 시간에 출발한 만큼 비교적 남들보다 일찍 도착했는지 복도는 한산했다. 전국 각지에 있는 센터에서 에스퍼가 오다 보니 대기실도 나뉘어 있었는데, C동이 받은 방은 초라하다고 말하기도 민망한 골방이었다.
긴장한 표정으로 안내한 직원은 이곳이 보안 카드가 있어야 열 수 있는 방이라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그래 봐야 다들 에스퍼이니 문짝 정도야 쉽게 뜯어내지만, 딱히 대꾸하지는 않았다.
문을 열자 먼지가 훅 날았다 가라앉았다. 나름대로 청소는 한 듯 대놓고 두꺼운 먼지층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여전히 깨끗하다곤 말할 수 없었다.
“그래. 이래야 우리답지.”
승철의 유쾌한 외침에 굳었던 얼굴들이 풀어졌다. 확실히 화려하고 깨끗한 방은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무엇보다 사방에 다른 대기실은커녕 인적조차 드문 곳이라 오히려 마음이 편하기까지 했다.
각자 대충 자리 잡으며 널브러지던 와중, 주현은 문득 지금껏 했던 다른 두 번의 촬영 때보다 훨씬 덜 떨린다는 걸 알아챘다. 분명 혼자가 아니라 동료들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응원하러 갈게요.’
<에스퍼 단합회>에 나가게 되었다는 말에 차인호가 한 대답이다. 의심이 가득 담긴 주현의 눈빛에 차인호는 억울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제가 제 매칭 에스퍼 말고 누구를 응원하겠어요?’
자꾸만 얼굴이 붉어지려 해서 큰일이었다. 조금 빠르게 뛰는 심장박동을 느끼던 주현의 머릿속에 문득 요즘 자주 꾸고 있는 악몽이 스쳐 지나갔다.
가족들이 나오는 꿈을 악몽이라 칭한 자신을 끔찍하게 여기며, 주현은 누군가 머리부터 찬물을 끼얹은 듯한 기분으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죄인은 결코 행복해지면 안 된다. 그런 걸 바라는 것조차 또 다른 죄가 된다.
창백한 얼굴로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리자 차인호가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시선이 여실히 느껴졌지만 주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튼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면 차인호가 이곳에 온다. 어쩌면 동료들에게 그를 소개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안 그런 척해도 주현이 유명 배우와 강제적으로 매칭했다는 소식에 다들 은근한 걱정을 내비쳤으니까.
죄책감을 앞으로 있을 단합회에 대한 긴장감으로 가리며 주현이 품을 뒤적였다. 주변에 상자며 종이 뭉치 등이 많았기에 불을 붙이지 않은 채 담배를 까딱이던 그가 물었다.
“나 이거 제대로 본 적 없는데 보통 어떻게 진행돼?”
휴대폰, 하다못해 책 한 권조차 없는 터라 하나같이 허공을 멍하게 응시하던 이들이 귀를 기울였다. 기다렸다는 듯 씨익 웃은 채경은 골방 구석에 박혀 있던 보드 칠판을 달달 끌고 와선 설명을 시작했다.
“우선 전국 센터에서 다 모인다는 건 알지? 구역에 따라 A부터 G까지 나뉘고, 우리는 알다시피 X조야. 우리 팀엔 우리밖에 없어.”
“이름부터 거지 같네.”
헬멧을 벗은 세화의 빈정거림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협회에서 주최하는 만큼 게이트를 나누는 구역대로 센터를 나누는데, 대부분은 가장 크고 대표적인 센터인 A동이 속한 A팀이 승리를 많이 차지한다.
“하는 일은 그냥 팀끼리 이런저런 스포츠 경기하는 게 다야. 종목에 따라서 능력 쓸 수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고……. 아, 형평성 때문에 가이딩은 주최 측 가이드한테서밖에 못 받아.”
가이드의 등급에 따라, 매칭이냐 각인이냐에 따라 가이딩 효율이 극과 극을 달리하기에 당연한 선택이었다.
“각 팀원 수와 능력 같은 걸 따져서 가이드를 배치해 줘. 보통 각 센터에서 보낸 사람들이라 일부러 대충 하거나 그런 건 없어.”
“우리는?”
작은 물음은 주현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잠시 침묵하던 채경은 지우개로 천천히 칠판의 글자를 지웠다.
“글쎄. 가이딩 약물이라도 잔뜩 퍼 주지 않을까?”
“없는 것보다는 낫네.”
“그래. 이상한 가이드보다 나도 주사기가 백배는 좋아.”
“몇 개 좀 가져가자.”
화기애애한 목소리에 채경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까지 즐거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결국 그들은 수년간 지옥 속에서 살아남은 베테랑이다. 사람들의 시선은 총알만큼 아플 테지만 그들을 죽이지는 못할 것이다. 이왕 광대가 될 거라면 처량하게 울기보단 관객들을 비웃는 광대가 되자고. 가진 거라곤 쥐뿔도 없는 폭주 에스퍼들이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다는 듯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