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70화
“아, 그러세요? 좋으시겠네요. 점막 가이딩해 줄 가이드가 많아서.”
딱히 많지도 않고 애초에 차인호가 아닌 가이드와 닿고 싶은 생각조차 없다. 하지만 그걸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유는 몰라도 차인호는 기분이 상했고, 주현은 타인을 웃게 할 재주를 가지고 있지 않다.
애초에 서로에 대한 좋은 감정으로 시작한 매칭이 아니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차인호가 가이딩을 그만둘까 봐, 더 나아가 매칭을 끊을까 봐 덜컥 겁이 났다.
고민 끝에 주현은 홀로 타들어 가던 담배를 손목 안쪽에 지졌다. 차인호가 손대려면 몸을 기울여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야 하는 애매한 위치였다. 불이 꺼졌음에도 꽁초를 문지르던 주현은 눈치 보는 개처럼 고개를 들었다.
“……정말 속을 알 수가 없네요, 당신.”
차인호는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그건 내가 할 말이라고 따지려던 찰나, 가이드가 다가왔다. 주현의 손을 쥐고 휙 잡아당긴 그는 망설임 없이 동그란 상처 위로 입술을 문질렀다.
부드러운 입술에 담뱃재와 상처에서 흘러나온 진물이 묻는 것도 개의치 않으며, 차인호는 약간의 숨결과 함께 가이딩을 계속했다.
입안 등의 점막이 다른 피부보다 가이딩 수치가 더 잘 오른다는 건 흔히 알려진 상식이다. 하지만 이런 작은 상처에는 꾹 닫힌 입술과 손끝에 유의미한 차이가 없다.
상대와 가까운 사이가 아닌 이상 가이딩 시 일반적으로 선호하는 부위는 손이고, 지금껏 차인호도 악수를 통해 가이딩해 왔다. 그런데 지금 굳이 입술을 문지르는 이유가 무엇인지, 주현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한순간 차인호의 깊은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기다란 속눈썹 너머, 묘한 빛을 품은 눈동자엔 주현의 얼빠진 얼굴이 담겨 있었다.
퍼뜩 정신 차린 주현이 손을 빼려던 때였다. 주현의 팔을 잡은 손아귀 힘이 한층 강해졌다.
“일하는 중이니까 얌전히 있어요.”
일. 가이드에게 가이딩은 일이고, 차인호는 일하는 중이다. 멍하게 사고를 움직이던 주현은 의도적으로 표정을 갈무리했다.
차인호가 행하는 모든 일에 일희일비하다가는 감정을 죽이기는커녕 더욱 키우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주현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이 바로 그것이다.
차인호가 곁에 있을 때라면 숨기는 게 힘들긴 해도 홀로 마음을 품고 있는 것 정돈 그리 나쁘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차인호가 떠난 후에도 이 마음이 지속된다면, 그건 안 그래도 지옥 같은 인생을 그야말로 불지옥 속으로 밀어 넣을 게 분명하다.
주현은 방에서 밧줄에 목을 건 에스퍼를 알고 있다. 자신의 매칭 가이드에 대해 그토록 행복하게 떠들었던 남자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알고 있다.
“일 끝난 것 같은데요.”
“그건 제가 정해요.”
차인호의 손가락은 주현의 손목 쪽 동맥 위를 정확하게 지나간다. 평소보다 빠른 맥박을 곧바로 알아챌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차인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긴장했냐는 장난스러운 말이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는 직접적인 물음조차 없다. 그것에 오히려 비참함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폭주 에스퍼 특유의 검붉은 눈동자가 눈꺼풀 뒤로 숨었다.
차인호의 입술은 느린 속도로 멀어졌다.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상처 위엔 조금 뜨거운 온기가 남아 있었다.
무표정으로 서로를 응시하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시선을 돌렸다.
결국 차인호는 어떠한 변명도 없이 돌아갔다. 주현 또한 대답을 요구하지 않았으니 치사하다는 점에선 비슷할지도 모른다.
아까 말했던 대로 주현에게 가이드와의 정사는 그리 드문 게 아니다. 사실 차인호를 만나기 전까지 받았던 대부분의 가이딩이 그런 형태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고작해야 손목을 입술로 문질러졌다고 이렇게 흔들리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주현이 가진 유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자존심이 무너지는 성처럼 비틀거렸다. 사랑 따위 하는 게 아닌데. 인생 참 마음대로 굴러가는 법이 없다.
* * *
“이 거지 같은 행사는 뭐야?”
승철의 외침은 지저분한 휴게실에 퍼져 나갔다. 웬일로 모두 모여 있던 C동 에스퍼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표정을 지은 채 각자의 손에 들린 종이를 응시했다.
<에스퍼 단합회>라고 적힌 큼지막한 제목을 죽일 듯이 노려보던 세화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를 서커스 광대로 만든다는 뜻이지. 진짜 다 죽여 버릴-”
“잠깐만. 이세화 넌 못 나가지 않아?”
살벌한 중얼거림 사이로 끼어든 봄이 종이를 팔랑였다. 그 말에 제각기 생각에 빠져 있던 에스퍼들이 하나둘 깨달은 듯 입을 벌렸다.
“사망 처리된 지 오랜데 불쑥 나타나 봐, 난리도 아닐걸.”
머릿속으로 계산을 마친 세화가 무척 드문 미소를 보였다. 푸근한 미소는 짧은 머리카락과 어우러져 나이보다 훨씬 어린 분위기를 뽐냈으나 누구도 그 미소에 답하지 않았다.
<에스퍼 단합회>는 벌써 10년이 넘은 프로그램으로, 말 그대로 에스퍼끼리 간단히 경쟁하며 친목을 다지는 단합회이다. 물론 대외적으로 그럴 뿐, 실상은 게이트 너머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에스퍼를 일반인에게 더욱 가까운 존재로 인식시키기 위한 협회의 노력이다.
게이트에 접근조차 불가능한 시민은 능력을 쓰지 않는 한 가이드는커녕 에스퍼조차 구분할 수 없다. 그렇기에 미디어에서 특별하게 비치는 에스퍼에게 반감을 가지기 쉬운데, 그들이 정말로 특별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인간적인 매력도 있다는 걸 보여 주는 대회라고 할 수 있다.
“이거 전국에서 모인다며. 사람도 많은데 우리는 왜 불러?”
“말했잖아. 광대라고.”
가장 큰 A동은 물론이거니와 전국에 흩어진 센터에서도 에스퍼를 보내는데, 임무를 수행할 인원을 제외한 에스퍼만이 참가할 수 있다. 그렇다 해도 공간은 한정되어 있고, 모든 에스퍼가 관심을 즐기는 건 아니라 <에스퍼 단합회>에 나가 본 에스퍼보다 안 나가 본 에스퍼가 훨씬 많다.
기껏해야 동네 모임 정도인데도 에스퍼가 한자리에 모이는 드문 일이라 시청률은 매번 대단한 숫자를 기록했다.
“나 여기 나간 적 있어.”
모두의 시선이 채경에게 쏟아졌다. 새까만 선글라스가 번쩍이고, 관심이 부끄럽다는 듯 수줍게 웃은 채경이 말을 이었다.
“실제로 가 보면 진짜 넓어. 관중석에 일반인들 있는 거 알지? 각자 나름대로 응원하는 에스퍼가 있더라고. 뭐, 나름 재밌었어.”
“에스퍼는 그렇다 쳐도 일반인까지 가득한 곳에 폭주 에스퍼를 부른다고? 미친 거 아냐?”
폭주하면 어쩌려고? 뒷말은 뱉지 않아도 모두가 알아들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끼리 떠든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다.
가라앉은 분위기를 헤치고자 주현이 채경에게 물었다.
“거기서 뭐 하는데?”
“그냥 이것저것?”
“진짜 도움 안 된다.”
주현의 타박에 과장스레 입술을 삐죽 내민 채경이 선글라스를 고쳐 쓰곤 기억을 짜내는 듯 미간을 구겼다.
“아, 방송국 카메라가 엄청 많고, 방송에서 잘 보이면 인기가 확 뛰니까 열심히 하는 에스퍼가 많고……. 그런 녀석들이 경기에 나가니까 나는 많이 참가 안 해서 잘 모르겠네.”
“그때도 게을렀구나.”
승철의 말을 못 들은 척 무시하던 채경이 무언가 생각난 건지 제법 진지하게 분위기를 잡았다. 모두가 긴장하며 채경의 입술만 응시했다.
“그리고 밥이 맛있어.”
가장 먼저 혀를 찬 사람은 세화였다. 종이를 거칠게 구겨 쓰레기통 근처로 내던진 그녀가 소파에 드러누워 테이블에 다리를 올리곤 씨익 웃었다.
“아무튼 열심히 해라, 광대들아.”
이번에는 채경마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네놈에게 선택권이 있다고 생각하나? 너희 같은 쓰레기들을 그런 자리에 불러 주는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알아라’. 그리고 화장실에 가서 비누로 벅벅벅.”
“개X끼.”
“어. 개X끼.”
대표로 태석에게 갔다가 눈에 멍을 달고 온 승철이 비틀거리며 소파에 앉았다.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으나 폭주 에스퍼가 <에스퍼 단합회>에 나가는 건 위쪽의 지시라고 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사람들에게 폭주 에스퍼에 대한 친밀감을 주려는 건지, 혹은 다른 에스퍼들에게 다시 한번 경각심을 주려는 건지. 이유가 뭐든 그들은 까라면 깔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즉 거지 같은 단합회인지 뭔지에 나가서 구경거리가 돼야 한다는 말이다.
“맞다. 이세화, 너 어쩌냐.”
“뭐가.”
“너도 나가라던데.”
느긋하게 잡지를 뒤적이던 세화가 튕기듯 일어났다. 가까운 곳에 앉았던 봄이 출렁이는 소파에 인상을 찡그렸다.
“그날 C동 대청소한다고 다 나가야 한대.”
“대청소는, 지랄. 지금껏 여기 있으면서 대청소하는 꼴을 한 번도 못 봤는데 하필 그날 한다고?”
“몰라. 여기저기 수리도 하니까 직원도 오전 근무만 하고 나가라 했대. 아까 복도에서 들은 얘기니까 진짜일걸.”
말한 사람이 채경이었다면 또 놀리는 거냐고 따지기라도 했겠지만 승철은 쓸데없는 거짓말을 늘어놓는 성격이 아니다. 허망하게 소파에 앉은 세화는 마지막 희망을 담아 입을 열었다.
“나 사망 처리된 거 잊었냐고 물어봤어?”
“그랬다가 이거 생겼지 뭐냐.”
눈가의 멍을 가리킨 승철이 어쩔 수 없었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에 굳어 버린 세화를 제외한 이들은 조금 전 승철이 내민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자신의 인적 사항을 적으라고 상세하게 문항까지 나눠진 종이는 폭주 에스퍼의 흉터투성이 손에서 저마다 구깃구깃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