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에스퍼 단합회
주현은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다. 자기 객관화가 잘되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사람으로서 주현은 자신의 사랑은 완전히 자리를 잘못 잡아 싹텄다고 확신한다.
상대는 무려 차인호고, 주현이 그를 만난 건 순전히 운이고, 끝이 정해져 있는 관계고, 차인호는 그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어딜 어떻게 봐도 긍정적인 부분이 없는데 그중 최고는 주현이 ‘폭주 에스퍼’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다는 점이다.
위험한 폭탄을 인간으로 취급해 주는 것에 감사해야지, 감히 이런 마음이나 키웠다고 욕이나 안 들어 먹으면 다행이었다.
어쨌든 그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다. 철저하게 숨기고 티끌만큼이라도 새어 나가지 않게 짓밟아 기어코 썩어서 흔적도 없이 녹아 버리게 만드는 것.
이 마음은 독이다. 누구도 반기지 않는, 세상에 존재하지 말아야 하는 맹독. 사랑에 빠졌다기보단 절박한 살인마에 가까운 눈빛으로 폭주 에스퍼가 다짐했다.
* * *
“…….”
“…….”
“……하아.”
작은 숨소리에 주현은 놀라지 않은 척하려 무진 애를 썼다. 그런 심정과는 반대로 찌푸려진 미간은 한층 더 험악해졌다.
차인호는 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곤 그가 사 온 푹신한 의자에 등을 기댔다.
“죄송해요.”
뜬금없는 사과는 분명 차인호의 입에서 나온 게 맞았다. 퍼뜩 고개를 든 주현은 문득 오늘 처음으로 차인호의 얼굴을 들여다봤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조금 피곤해 보였고, 그 이상으로 초조해 보였다.
“제가 뭔가 잘못을 저질렀으니 그렇게 꽁해 있는 거잖아요.”
“누가 꽁해 있다는 말입니까?”
“신주현 씨 당신이요.”
입을 벌렸다 할 말을 찾지 못해 그대로 닫은 주현이 오늘따라 더더욱 아름다운 차인호를 강하게 노려보았다. 그렇게 하면 희미하게 뜨거워진 볼이 분노 때문이라고 속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번에 그 일 때문이라면, 치료라서 어쩔 수 없었다는 거 아시잖아요.”
차인호가 말하는 ‘그 일’이라는 게 정사를 말하는 건지 그 후의 키스라고 부를 수도 없는 입맞춤을 말하는 건지. 주현은 답을 모르면서도 동시에 알 것 같았다. 또다시 그어진 선에 상처받은 자신을 꾸짖은 그가 쥐고 있던 담배 필터를 손톱으로 누르며 대답했다.
“저 딱히 화난 거 아닙니다. 그동안 가이딩 한두 번 받은 것도 아니고, 더한 것도 질리도록 했습니다. 이제 와 그런 걸로 화날 리가 없잖습니까.”
물론 차인호와의 잠자리는 질리도록 받은 가이딩 중에서 손꼽을 만큼 좋았으나 절대로 입 밖에 내지는 않을 것이다.
관계 한 번으로 질척거리는 에스퍼 이야기는 간혹 소재거리로서 미디어에 나오곤 한다. 그에 대해 C동 에스퍼들은 흔하지는 않지만 실제로 가끔 있는 일이라고 말했었다.
주현은 차인호에게 그런 에스퍼로 인식되고 싶지 않았다. 그날이 주현에게 특별했다는 걸 차인호가 알게 된다면, 눈치 빠른 그는 주현의 마음까지 속전속결로 알아챌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한가득 담아 거들먹거리는 말에 차인호는 기뻐하지도 안도하지도 않았다. 대신 미묘한 표정을 지었는데 그게 어째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좀 짜증 나 보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