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69화
“다른 말은 죽어도 안 듣는 주제에 이런 것만 또 곧장 듣죠?”
철없는 아이를 보듯 빈정거리는 말투에 기분이 상했으나 딱히 할 말은 없던 주현이 이불을 뒤집어썼다.
희미하게 싸구려 섬유 유연제 향이 났다. 그리고 그보다 짙게 차인호 냄새가 났다.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향긋한 냄새가 마음을 진정시켰다.
분명 가이딩으로 상처는 물론이거니와 체력도 회복됐을 텐데, 이런 식으로 가이딩을 받고 나면 늘 묘한 피로감을 느꼈었다. 차인호와 매칭한 후 처음 느끼는 감각이기도 했다.
그래도 오늘은 분노와 수치심과 살의는 들지 않았다. 늘 함께 따라오는 감정이었는데도 오늘은 잠잠했다.
얼른 일어나서 씻고 방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다른 가이드들과 함께 있을 땐 1초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는데, 지금은 조금 더 이 시간이 이어지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완전히 반대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옛날의 주현이 그랬듯 차인호도 당장 이곳을 벗어나고 싶을까?
궁금했지만 이불을 걷지는 않았다. 애초에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야 차인호가 먼저 주현의 이불을 빼앗았으니까.
이불 밖 세상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어둠 속에서 차인호는 주현을 향해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뭐라 말할 새도 없이 그가 다가왔고, 훅 차오르는 가이딩에 주현이 숨을 못 쉬던 순간이었다.
꽃이 피었던, 지금은 새하얀 어깨를 매만지는 손길은 늘 그렇듯 따스하고 부드럽다. 소리 없는 입맞춤엔 온도가 있었다.
애들끼리 할 법한 가벼운 키스가 끝나고, 잠시간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붉은 눈동자를 응시하던 차인호가 몸을 일으켰다.
그제야 주현은 차인호의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제 볼에 안착했다는 걸 깨달았다. 떨어질 당시에는 느끼지조차 못했었다.
“이것도 일입니까?”
툭 튀어나온 질문은 뇌도 혀도 목구멍도, 누구도 말하라고 입력하지 않았는데 멋대로 흘러나왔다. 어쩌면 꽃이 사라진 어깨, 어쩌면 좀 더 아래, 어쩌면 갈비뼈 안쪽 그 어딘가에서 입력했을지도 모른다.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다. 실수도 당당하면 의도가 된다. 주현이 올곧게 차인호를 응시했다. 잠시 멈칫했던 가이드는 제 가방을 들곤 돌아서서 문으로 향했다.
“저기요. 차인호 씨.”
“이번 주 안으로 한 번 더 올게요. 혹시 모르니까.”
“대답하세요.”
그 엿 같은 공적인 일을 철회하라고는 하지 않을 터다. 다만 선을 그은 주제에 이런 식으로 여지 주는 짓만은 하지 말라고 따지고 싶었다.
그러나 차인호는 끝내 대답하지 않고 문을 벗어났다. 주현의 미간이 팍 구겨졌다.
“야!”
철문이 닫히고, 찰나의 순간으로 차인호에게 명중하지 못한 베개가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씩씩거리며 숨을 고르던 주현은 망가뜨릴 것을 찾지 못하고 다시금 침대에 털썩 누웠다. 베개가 없어서 낮은 위치에 늘어진 머리가 기분 나빴다.
옆으로 웅크린 주현이 이불을 어깨까지 올렸다. 차인호와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사실 좋았다. 죽기 일보 직전인 상태였음에도 기분 좋다고 느낄 정도였으니까.
차인호는 누구에게나 그렇게 구는 걸까? 폭주 에스퍼인 주현에게도 이런 식인데, 다른 일반적인 에스퍼, 특히 연인에게는 어떤 행동을 보이는 거냐고.
생각해 봐야 소용없다. 물론 주현과는 영원히 상관없는 일이니 괜한 생각으로 시간 낭비할 필요는 조금도 없다. 차인호의 연인에게 질투하는 건 그만둘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
주현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자신이 한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질투? 하, 참 나. ……참 나!”
그도 그럴 것이, 주현이 차인호의 연인을 왜 질투하겠는가? 그럴 이유가 그야말로 티끌만큼도 없었다.
가이딩이 문제라면 이번 일로 차인호는 매칭 가이드로서 소홀히 하지 않을 거란 걸 주현에게 확신시켰다. 가이드가 가이딩만 잘하면 됐지, 그 외에 어디서 뭘 하든 주현이 신경 쓸 이유 따윈 없다.
그래, 그렇고말고. 게다가 하필 연인에게 질투한다니. 꼭 주현이 차인호를 좋아하기라도 하는 것 같지 않은가? 그러니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은……. 생각은…….
주현은 빵빵하게 차오른 가이딩을 핑계 삼아 능력으로 담배를 가져왔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손이 떨려 몇 번 만에야 겨우 불붙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아마도…….’
씁쓸한 연기가 입술 틈에서 쏟아져 나왔다. 에스퍼가 가이드에게 집착하는 건 호르몬 변화로 인한 당연한 반응이라고 했다. 그러나 주현은 지금까지 만난 그 어떤 가이드에게도 호감이라고 할 만한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다.
차인호는 매칭 가이드라서 뭔가 다른 걸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 눈부신 얼굴이나. 혹은 성격. 빌어먹게도 주현이 차인호를 좋아할 이유는 너무나도 많았다. 하지만 이유가 많다는 것과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건 완전히 다른 일이다.
주현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사방에서 총알이 날아오던 날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였다.
‘차인호에게 미움받을까 봐 전전긍긍한 적?’
있음.
‘차인호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한 적?’
있음.
‘가이딩 다 됐으면서도 모른 척 손잡고 있었던 적?’
있음.
“…….”
증거가 너무나도 많았다. 주현의 뇌는 아닌 이유를 찾는 게 더 빠를 거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신주현은 차인호를, 그의 매칭 가이드를, 아까 전 이유 모를 입맞춤을 한 뒤 휙 사라진 망할 놈을…….
“……X발.”
폭주 에스퍼의 얼굴이 이불에 푹 파묻혔다. 힘껏 깨문 뺨 안쪽이 따끔거렸다. 내기는 완벽하게 주현의 패배다.
* * *
다음 날, C동 TV에 나오는 모든 연예 프로에서 차인호와 함다솔이 연인이 아닌 단순한 친구 사이로 남기로 했다는 소식을 종일 내보냈다. 그날 주현은 무슨 좋은 일 있냐는 질문을 세 번이나 받았다.
기쁨과 짜증과 분노가 뒤섞인 이상한 마음으로 바라본 창밖에는 화사한 여름 꽃이 피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