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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75/161)

폭주 에스퍼 68화

“가이딩으로 치료할 수는 있습니까? 아니, 할 수 있으니까 나한테 말했겠지. 내가 오늘 안 왔으면 어쩔 생각이었어요? 당장 오늘 밤 내가 없어서 죽었으면 어쩔 거냐고요.”

“그런데 왔잖아요.”

“…….”

“믿어 보라면서요. 그래서 믿었는데.”

내기는 묘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끝이 무엇이든 주현은 질 생각이 없었다.

“……이런 걸 의미한 건 아닙니다.”

이를 악물고 짓씹듯 말을 뱉어 낸 차인호는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화가 단단히 난 모양새였지만 사실 진짜 최악의 소식은 아직 전하지도 않았다.

어제보다 한층 더 차가워진 손이 결국 그를 죽일 거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예쁜 꽃을 덮었다. 창백해져선 다 죽어 가는 주제에, 여전히 형형한 눈을 반쯤 접으며 폭주 에스퍼가 웃었다.

“가이딩으로 치료는 되지만 일반적인 스킨십으로는 안 됩니다. 어설프게 하면 양분을 주는 꼴밖에 안 돼서.”

가이드의 모든 움직임이 멈췄다. 아주 느리게 손을 내린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다만 주현과 그의 미소를 관찰하듯 응시했다.

어쩌면 주현은 이 장면을 바랐던 걸지도 모른다. 자꾸만 주현의 선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와서 흔들어 놓는 주제에 자신은 쏙 빠져나가는 차인호에게 한 방 먹여 주고 싶었던 걸지도.

주현과의 관계 따위 생각조차 해 본 적 없을 차인호를 흔들었으니 이제 돌아서서 나오면 된다.

그런데, 그럴 줄 알았다며 손을 내저으려던 주현보다 차인호가 한발 먼저 움직였다. 벌떡 일어난 차인호가 그대로 나갈 거라 생각한 주현이 여전히 미소 지은 채 눈을 감은 순간이었다.

“뭐 해요? 안 오고.”

소리는 오른쪽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주현의 오른쪽에 있는 것이라곤 커다랗고 낡은 침대뿐이다.

아연한 마음에 눈을 뜨자 침대 앞에 선 차인호가 셔츠 단추를 풀어 내리며 주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감정을 다스렸다기보단 상자에 넣어 자물쇠를 잠근 듯 지극히 사무적인 표정이었다.

마지막에는 좀 멋있게 보이고 싶었던 주현이 표정 관리조차 잊은 채 미간을 팍 찡그렸다. 잠시나마 무거운 몸을 잊을 정도로 큰 충격이었다.

“무슨 뜻인지 이해는 한 겁니까?”

“네. 점막 가이딩 끝까지 해야 한다면서요.”

망설임 없이 나온 대답에 주현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기온이 높아 옷을 벗어도 춥지는 않은데 이상하게 몸이 떨렸다. 그 감정이 두려움인지 환희인지 명확하게 구분하기는 어려웠다.

다만 주현은 차인호가 그를, 신주현을 선택했다는 사실에 가슴팍이 간지러워지는 걸 느꼈다. 적어도 세상에 한 명 정도는 약간의 희생을 감수해서라도 주현의 삶을 바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심지어 그 사람이 차인호라는 사실이 그를 이상하게 만들었다.

좀 더 솔직해지자면 기뻤다. 얼떨떨하기도 했다. 차인호가 C동에 오는 일반적인 가이드와는 다르다는 걸 알기에 더더욱 그랬다.

조금쯤은 범규의 마음이 이해되기도 했다. 내 죽음에 누군가가 울어 준다면 이것과 비슷한 기분이지 않을까.

잠깐의 들뜸이 가라앉은 자리에는 동정과 미안함이 있었다. 주현은 살고 싶었으나 그럴 기회가 왔음에도 곧바로 붙잡지 못했다. 원하는 걸 손에 쥐어 본 적이 없어서일까, 자신은 받을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기 때문이다.

계약에 묶여 이런 시커먼 남자와 잠자리를 가지게 생긴 차인호를 위해 주현은 탈출구를 마련해 주기로 했다.

“책임감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거 압니다. 다른 가이드 구해도 되는 거고, 특히나 당신은 이제 연인도 있으니까-”

“신주현.”

“…….”

“진짜로 화나게 하지 말고 이리 와.”

이미 화가 나서 이를 악물고 있으면서 차인호는 그리 말했다.

아무리 약해졌다고 한들 결국 능력이 있는 한 차인호는 주현을 이길 수 없다. 그렇기에 주현이 움직이길 바란다면 그는 명령이 아닌 부탁을 해야 한다.

그럼에도 주현이 반박조차 없이 순순히 침대로 향한 것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 차인호의 벌어진 셔츠 너머로 정체 모를 커다란 흉터가 보여서. 그것에 호기심이 생겨서. 그 외에는 어떠한 이유도 그를 움직이지 못한다.

자연스럽게 주현을 침대에 눕히던 차인호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가볍게 혀를 찼다. 찡그린 미간이 선명했다.

“어떻게 하실래요?”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게 포지션을 정하자는 말이라는 걸 깨달았다. 물론 주현에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제가 힘 조절 실수하면 그쪽은 죽어요.”

주현은 침대에 누웠고, 차인호는 기분은 나빠도 얼추 납득한 듯했다.

침대 헤드에 단단히 고정된 수갑으로 뻗어지던 손은 제 손목을 묶기도 전에 차인호로 인해 멈췄다.

“이딴 거 필요 없어요.”

여전히 화가 난 듯 거친 목소리였다. 주현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손목을 누르는 힘이 조금 약해졌다.

지금껏 수도 없이 누웠던 침대가 오늘따라 유독 좁게 느껴졌다. 차인호와 가까워진 탓에 몸에 힘이 솟았으나 그대로 어깨의 꽃이 욕심내며 흠뻑 들이마시는 걸 알 수 있었다.

당신 여자 친구는 당신이 폭주 에스퍼랑 침대에서 뒹구는 것에 정말 어떠한 유감도 없냐고. 그 질문은 목에서 나오기도 전에 먹혀 사라졌다.

차인호의 키스는 거친 시작에 비해 무척이나 정성스러웠다. 주현에겐 과분할 정도로.

떠 있던 해가 가라앉고 창밖이 붉어졌을 때쯤 가이딩이 끝났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꽃은 사라졌다. 몇 시간이나 이어진 정사 동안 어깨를 신경 쓸 틈이 없어서 언제 사라졌는지는 모른다. 차인호의 시야에선 어깨가 곧바로 보였을 테니 마지막쯤에 사라지지 않았을까 예상할 뿐이다.

이건 다른 얘기지만, 차인호는 의외로 침대에서 어리광이 많아지는 타입인 것 같다.

목에 팔을 둘러라,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 어깨를 물어 달라……. 그동안 만났던 어떤 가이드도 하지 않은 요구였다. 분명 훨씬 치욕스럽고 아픈 요구도 순순히 받아들였는데, 왜 고작해야 그런 일에 얼굴이 뜨거워졌는지.

혹여나 실수로 그를 다치게 할까 봐 온몸에 힘을 준 채 긴장하고 있었는데, 그런 줄도 모르고 제 목에 팔을 걸치라 말하는 차인호가 원망스러웠다.

꽃이 사라진 주현의 어깨는 흐릿한 흉터를 제외하면 새하얬다. 가이딩을 하며 차인호가 끈질기게 핥고 빨고 물었지만, 자국이 생기는 즉시 치료되어 사라져서 남은 건 하나도 없다.

하나쯤은 남아도 괜찮지 않았겠냐고, 저도 모르게 한 생각에 주현은 몸서리치며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그러지 마세요.”

욕실 쪽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약간의 나른함을 제외하면 평소와 같았다. 젖은 머리를 낡은 수건으로 털며 나온 차인호는 싸구려 모텔조차 되지 못하는 가이딩 룸에서 홀로 빛나고 있었다.

그의 몸에 남아 있는 자신의 잇자국을 차마 마주 볼 수 없던 주현이 슬그머니 머리카락에서 손을 떼어 냈다.

느긋하게 다가온 차인호는 침대에 앉더니 곧장 주현의 어깨로 손을 뻗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꽃을 찾으려 한참을 더듬던 그가 안도한 표정으로 멀어졌다.

“치료는 된 것 같네요. 다른 부작용에 대해서 들은 거 있어요?”

“제가 알기론 없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차인호는 다른 말 없이 셔츠를 주워 팔을 넣고 단추를 잠그기 시작했다. 여전히 발가벗은 채 침대에 누워 있던 주현에겐 셔츠에 가려지는 몸이 선명하게 보였다.

운동으로 만들어진 복근, 제법 화려한 흉터들. 교통사고라도 당한 걸까? 그런 걸 물어볼 만큼 가깝다고 확신하지 못하는 주현은 완전히 가벼워진 몸 상태를 숨기며 졸린 척 눈을 끔뻑였다.

이곳에 왔을 때와 같이 단정하게 옷을 입은 차인호는 베개 옆에 널브러져 있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잠자리 중 몇 번이나 울린 전화를 망설임 없이 끊다가 결국 완전히 전원을 꺼 버렸던 만큼 뭔가 중요한 연락을 놓쳤을지도 모른다.

몇 번 스크롤을 내리던 그는 힐끗 주현을 보았다. 내내 차인호를 보고 있었기에 곧장 시선이 맞닿았다.

내심 움찔했으나 시선을 피하면 지는 것 같아서 부러 그를 노려본 주현은 차인호의 커다란 한숨 소리에 눈을 가늘게 떴다.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문지른 차인호는 결심했다는 듯 화면을 두드리곤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접니다, 차인호. 갑작스럽지만 그 일은 없던 걸로 하죠. 좀 귀찮아도 다른 방법이 있을 겁니다.”

뭔지는 몰라도 제법 심각한 이야기인 것 같았다. 이불을 반쯤 덮고 누워 있던 주현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개인적인 일입니다. 네. 도저히 안 될 것 같아서.”

에스퍼와 가이드의 시선이 다시 마주쳤다. 잠시간 주현을 응시하던 차인호는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눈을 돌렸다.

“뭐, 비슷합니다.”

차인호의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그의 셔츠 깃을 적셨다. 동그란 자국을 가만히 주시하던 주현이 눈을 감았다.

불을 켜지 않은 덕에 저물어 가는 황혼은 가이딩 룸을 가득 채웠다. 저물기 직전에 가장 강한 향을 뿜는 꽃처럼, 태양도 가라앉기 직전에 가장 짙은 색으로 하늘을 물들인다.

갓 배어난 피와 같은 붉은빛은 점차 식으며 보라색이 되었다. 그 색을 한껏 뒤집어쓴 차인호가 가라앉은 표정으로 전화를 끊었다.

“제 번호는 뒀다 뭐 합니까?”

씨앗의 숙주가 되었다는 걸 왜 진작에 알리지 않았냐는 타박에 주현은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그의 반응이 무서웠다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주현은 변명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애쓰며 툭 내뱉었다.

“공적인 일이라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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