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67화
단단한 손바닥이 차가운 거울에 부딪혔다. 다행스럽게도 씨앗이 심어진 부위는 옷을 입으면 아무도 보지 못하게 가려지는 곳이다.
‘숨기자.’
주현은 누구에게도, 정확히는 그의 매칭 가이드를 제외한 어떤 이에게도 어깨를 보여줄 생각이 들지 않았다. 포기하는 게 아니다. 절대로 스스로 목숨을 내던지는 일이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저를 좀 믿어 주면 안 돼요?’
그리 말한 차인호를 믿어 보기로 한 것이다. 제 가이드에게 줄 꽃 한 송이를 위해 목숨을 버린 자도 있는데, 그에 비하면 한 번 믿어 보는 것 정도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비록 졌을 때 주현이 잃을 담보가 그의 목숨이라는 점만 빼면 더할 나위 없이 재미있는 내기였다.
기한은 앞으로 4일. 그 안에 차인호가 C동에 와서 주현과 잠자리를 가진다면 차인호의 승리고, 결국 씨앗으로 인해 주현이 죽는다면 그의 승리다.
자신의 매칭 가이드를 조금도 믿지 못하는 폭주 에스퍼가 미련 없이 욕실에서 벗어났다.
* * *
지구의 어떤 식물과도 특징이 겹치지 않는다는 붉은 꽃은 확실히 아름답기는 했다.
이젠 거울을 보지 않아도 시야에 잡힐 만큼 자란 꽃을 손바닥으로 문지른 주현이 옷깃을 여몄다. 그의 꽃은 보고서에서 봤던 것보다 크기가 작지만 대신 색이 더 진했다. 신선한 피처럼 섬뜩한 꽃잎이 무척 선명했다.
노란색 의자는 여전히 황량한 가이딩 룸과 어울리지 않는다. 주현은 동그란 유리 테이블에 담뱃재를 털며 회색 연기를 뱉어 냈다.
씨앗이 심기고 5일. 차인호에게서 가이딩을 위해 C동에 오겠다고 연락이 왔다.
역시 S급 에스퍼여서 좀 더 빨리 목숨이 다한 듯, 5일째인 주현은 강한 피로감을 느끼긴 해도 아직 꽃이 피부를 뚫고 나오지는 않았다. 그래도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아마 내일이면 확실하게 죽겠지.’
예상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내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기대되는 마음은 피어나는 꽃과는 달리 점차 사그라들었다. 협박과도 같은 제안에 인상을 찌푸릴 차인호를 생각하면 끝까지 입 다물고 있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면 약속을 어기는 꼴이 된다.
입술을 꾹 깨문 주현이 타들어 간 꽁초를 팔 위까지 올렸다가 결국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곧 있으면 방으로 올 가이드를 위해 능력으로 창문을 여는 스스로의 모습에 알 수 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생각했던 것보다 느리게 열리는 창문과 함께 뒤쪽의 철문이 열렸다.
그의 가이드는 부드러운 발소리를 가지고 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다가와선 우아하게 의자에 앉는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저번의 대화 후 두 사람의 사이는 조금 더 서먹해졌다. 자연스럽게 차인호의 연인에 관한 주제는 입에 담지도 않았다. 애초에 서로의 사적인 일을 그렇게까지 늘어놓지도 않았으나, 어쩐지 체감이 컸다.
문득 주현은 늦은 밤 몰래 센터장의 사무실에 숨어들어 컴퓨터로 봤던 영상을 떠올렸다. 주현에게 입 맞추며 울먹이던 차인호는 사라지고 없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그 영상을 본 기억 자체가 주현의 망상일지도 모른다.
‘분명 처음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주현은 차인호와 데면데면 지내다 1년 후 매칭을 끊고 지금껏 살아왔던 대로 살아간다. 그 단순하고 쉬운 계획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 건 정확히 언제였을까?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지?’
생각보다 차인호가 좋은 사람이라서 그렇다. 무척 따스한 가이딩을 해서 그렇다. 다가오진 않아도 일정 거리 이상 멀어지지도 않으니까, 손 뻗으면 닿을 듯한 곳에 서서 예쁘게 웃으니까.
아니, 아니다. 휘청이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힘껏 손을 뻗은 주현의 탓이다.
주현이 생각하기에 그의 삶은 지옥과 다름없다. 지금껏 죽음이 두렵지 않았던 이유는 삶에 미련이 남을 만큼 원하는 게 없어서였다. 그럼에도 죽지 않은 유일한 이유는 과거의 망령과 못 갚은 죄가 아쉬워서. 그래서 그는 이제껏 살아남았다.
그러니 어깨의 꽃은 손쉬운 도구다. 어떠한 고통도, 폭주에 대한 두려움도 없이 고요하며 심지어 아름답게 그를 죽음의 장막 너머로 데려가 줄 사공이었다.
이보다 좋은 기회는 없었다. 주현은 자살하는 게 아니다. 이 또한 속죄의 하나가 된다.
그러나, 이제 와 주현은 살고 싶었다. 그러고 싶어졌다. 죽음은 쉬운 속죄고 삶은 고통이라는 걸 알면서도, 주현은 살아서, 살아남아서 산소를 낭비하며 가이딩의 안온함을 느끼고 싶었다.
‘우리, 자살만은 하지 말자.’
어린 목소리는 여전히 생생하고, 주현은 고상한 죽음을 바라는 철없는 사람이지만, 어찌 된 일인지 다음 주에도 차인호를 만나고 싶어졌다.
밖에서는 아름다운 여인과 손을 잡고 입을 맞추는 차인호라도 이 방 안에서만큼은 온전하게 ‘신주현의 매칭 가이드’로만 존재하니까. 주현이 죽으면 매칭은 사라지고, 결국 누군가의 연인인 차인호만이 남는다. 그건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과 그 너머의 미지가 두려워진 것은 아니다. 다만 매칭 가이드와의 계약이 아직 남아 있는 까닭으로. 앞으로 다시는 맛보지 못할 따스함을 조금 더 손에 쥐고 싶다는 욕심이 꽃보다 먼저 자라 버린 것이다.
설령 기대가 꺾인다 해도 그걸 하는 사람이 차인호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서 주현은 입을 열었다.
“당신은 배우니까 연기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상대와 닿을 때가 있잖아요. 그거 괜찮대요?”
뜬금없는 말에 잠시 고개를 기울인 차인호는 눈치 빠른 사람답게 금방 이해하곤 대답했다.
“그분도 배우니까 공적인 일로 감정이 상하거나 하진 않아요.”
“가이딩도요?”
주현의 눈은 아까부터 계속 창문에 닿아 있었다. 차인호를 위해 열어 놓은 창문에서는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공적인 일이니까 가이딩도 괜찮겠죠? 좀…… 큰 가이딩.”
눈동자만 굴려서 바라본 차인호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벌렸다가 이내 한순간 표정을 굳혔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어쩐지 겁에 질린 듯 창백하기까지 했다.
의외의 사태에 주현이 힘이 쭉 빠진 손으로 뻑뻑한 눈가를 문지른 순간이었다.
“어디예요? 다친 곳.”
“예?”
“제가 당신을 모를 것 같아요? 뜬금없는 말 하는 거 보면 뻔하지. 겉으로는 안 보이는데. 배? 등?”
이렇듯 차인호는 때때로 주현에 대해 잘 안다는 듯이 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정작 주현은 차인호의 가벼운 속내마저 하나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데 말이다.
자신이 그렇게나 생각을 못 숨기는 사람인가 잠시 고민하던 주현은 품에서 새로운 담배를 꺼내 들었다. 성냥으로 불을 붙이려 했지만, 손끝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미끄러지기만 했다. 날이 아니라 시간, 혹은 분 단위로 기력이 사라지고 있었다.
결국 포기하고 불붙지 않은 담배를 손가락에 끼운 주현이 고개를 들었다. 차인호는 입을 다문 채 오로지 주현의 대답만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며 입술을 달싹였으나 애원을 제외한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에는 언어만이 모든 것을 표현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눈으로 보는 게 더욱 빠를 때가 있다.
결심한 폭주 에스퍼가 옷을 벗기 시작했다. 달그락 소리를 내며 무거운 조끼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얇은 티셔츠가 손가락에 걸려 천천히 올라갔다.
빛을 볼 기회가 적은 탓에 유난히 하얀 몸이 드러났다. 셀 수 없이 많은 다양한 흉터 중에서도 눈을 사로잡는 강렬한 것이 하나 있었다. 어깨에 피어난 새빨간 꽃은 당장에라도 벌과 나비를 불러들일 듯 완전히 만개한 채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주현이 가지기엔 지나치게 예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게, 뭐죠?”
차인호는 눈조차 깜빡이지 않으며 주현의 어깨에 시선을 고정했다. 피부를 스치는 그의 손길에 꽃이 더욱 기뻐하는 게 느껴졌다.
“괴물의 씨앗입니다. 생물체의 몸에서 영양분을 먹고 자라며, 타인에게 옮기지는 않으니 안심하세요.”
“영양분을 먹고 자란다는 게 무슨 뜻이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들이닥친 질문은 어쩐지 칼날을 품고 있었다. 꽃이 아닌 주현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는 차인호의 시선은 만약 눈빛에 물리적인 힘이 있다면 아팠겠다 싶을 정도였다.
또 왜 기분이 상했는지 알 수 없어 괜히 몸을 긴장시킨 주현이 순순히 대답했다.
“말 그대로입니다. 보통 열흘이면 쇠약해진 숙주가 사망하는데 에스퍼는 그 속도가 조금 더 빠릅니다.”
“얼마나 더 빠른데요?”
“절반 정도.”
어깨를 문지르던 손이 멈췄다. 차인호는 딱히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즐거워 보이지도 않았다. 생각보다도 더 반응이 안 좋았다. 역시 괴물을 몸에 품고 있는 건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일인 것 같았다.
“이거 생긴 지 며칠 됐어요?”
“4일…… 어쩌면 5일.”
애매하게 중얼거린 말을 끝으로 정적이 이어졌다.
언제나 아름다운 차인호는 싸늘한 무표정을 해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마네킹 인형처럼 감정 없는 얼굴이지만, 두 눈만은 이름 모를 감정을 담은 채 차게 타올랐다. 그곳에 담긴 게 무엇인지는 주현도 모른다. 그가 알 수 있는 거라곤 분노와 경멸과 살의뿐이다.
예상은 했지만, 아니, 사실 이렇게까지 나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주현의 인생은 여기까지인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