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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72/161)

폭주 에스퍼 65화

페이지를 넘긴 주현은 왜 이토록 흉악한 괴물이 있음에도 게이트 FW-50의 권장 등급이 비교적 낮은 편인지 이해했다.

앞 페이지의 가이드를 제외하고도 두 명의 숙주가 더 있었으나 그들은 사망하지 않았다. 에스퍼의 몸에 기생한 씨앗은 가이딩으로 없앨 수 있었다. 단, 포옹이나 키스 정도의 얕은 가이딩은 통하지 않았다. 어중간한 가이딩은 씨앗에 더욱 큰 영양분을 제공할 뿐이라는 가설이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아무튼 흔히 말하는 가이드와의 관계로 깨끗이 없앨 수 있으니 굳이 등급을 높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

떠오른 얼굴은 당연하게도 그의 매칭 가이드였다. 숙주가 된다 해도 사망까지 걸리는 시간은 열흘이 넘고, 넉넉한 시간에 비해 치료법이 간단하다.

다만 에스퍼에겐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 신주현과 차인호에겐 애초에 고려할 필요조차 없는 선택지였다. 그야 차인호는 가이드인 주제에 늘 악수로만 가이딩을 때우니까.

어두운 밤, 아무도 몰래 훔쳐봤던 영상을 잠시 생각하던 주현은 탁 소리가 나게 파일을 덮었다. 이래저래 말이 많고 결국 조금 성가시긴 해도, 대단하게 강한 건 아니니 조심하기만 하면 된다. 적어도 주현은 그렇게 이해했다.

‘새삼스럽지만 역시 에스퍼를 따라 게이트를 넘는 가이드 중엔 목숨을 잃거나 다치는 경우가 적지 않나 보네. 이럴 때면 차인호가 날 따라다니지 않아서 다행-’

쿵, 소리가 차 안을 울렸다. 유리창에 이마를 박은 주현은 습관적으로 떠올린 얼굴을 지우기 위해 애썼다.

그의 매칭은 그저 계약서에 따른 일일 뿐이고, 공적인 일을 사적인 장소에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사실 공적인 부분과 사적인 부분이 애매하게 뒤섞여 있는 주현에겐 어려운 일이었으나 그래도 계속해서 시도는 해야 했다. 그야 그조차 포기해 버리면 주현이 너무나도 초라해지니까.

주현은 에스퍼도 아니면서, 가이딩이 필요하지도 않으면서, 차인호와 손을 잡고 그보다 더한 것도 할 사람에 대한 이름 모를 감정을 재빨리 지워 냈다.

애초에 손에 쥘 수도 없는 걸 욕심내는 것만큼 미련한 일은 없다. 탐욕은 죄악이고, 주현은 죄를 더 늘리기엔 이미 어깨가 무겁다.

검붉은 눈동자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존재하기만 하는 무기체처럼 창문을, 정확히는 그 표면을 응시했다. 갈 길이 멀었다.

거대한 원형 게이트 앞에 선 주현은 손으로 더듬으며 온몸에 숨겨진 다양한 무기를 점검했다.

머리 위에서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는 와중에 손목과 발목을 끝까지 감싸는 새까만 옷을 입고 있으려니 내쉬는 숨결마저 뜨거웠다. 물론 피부가 부식액에 녹아내리는 것보다는 낫기에 불평할 생각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주현은 일반적인 임무에서 사용되는 것보다 훨씬 크고 무거운 탐지기의 전원을 켰다. 휴대성은 떨어져도 보다 먼 거리까지 게이트의 위치를 표시해 주기 때문에 장기적인 임무에서 주로 사용하는 물건이었다.

“임무 기한은 나흘이지만 상황에 따라 하루쯤은 늘어져도 괜찮다.”

주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분의 식량과 침낭 때문에 가방의 부피가 너무 커서 몸이 둔하게 반응할까 봐 조금 걱정되었다.

몇 번 더 가방을 고쳐 메던 주현이 차로 돌아가지 않는 직원을 바라보았다. C동에서 얼마 없는, 폭주 에스퍼를 사람 취급은 안 해도 굳이 괴롭히지도 않는 직원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번 임무는 협회에서도 실패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다. 별다른 소득이 없다고 판단한다면 굳이 기한을 다 채울 필요는 없다.”

하루 정도 이르게 나와도 눈감아 주겠다는 뜻이었다. 특혜와도 같은 말에 잠시 멈칫한 주현이 아까보다 조금 더 깊게 얼굴을 끄덕였다.

이로써 사막에서 바늘 찾기 임무가 시작되었다.

* * *

임무 전 에스퍼에게 지급되는 게이트 보고서는 해당 게이트가 얼마나 많이 연구되었냐에 따라 두께가 달라진다.

그리고 게이트 FW-50의 보고서는 지금껏 봐 온 여러 보고서 중에서도 손꼽히게 얇았다. 주로 출현하는 괴물의 특징 덕분에 우선순위가 밀린 탓도 있을 것이다.

바닥에 뿌리를 박고 기다란 푸른색 줄기를 휘두르는 괴물은 확실히 주현에게 큰 피해를 주지는 못했다. 허공에서 소리 없이 다가오기에 한 번씩 옷에 끈적한 점액이 묻어 불쾌하긴 했으나 부식액은 아닌 듯 옷이 녹아내리지는 않았다.

“하아…….”

절벽 위에 올라선 주현의 입에서 어쩔 수 없는 탄식이 터져 나왔다.

지구보다 대체로 색감이 알록달록한 자연에는 당연하게도 사람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끝없이 펼쳐진 화려하고 위험한 정글에서 살아남으며 무엇인지도 모를 물건을 찾아야 한다는 현실이 막막했다.

직원이 대놓고 큰 기대는 없다 말할 정도니 실패한다고 해서 처벌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3일간 하는 시늉 정도는 해야 했다. 안 그래도 부족한 가이딩이 일주일에 한 번으로 줄었으니 더더욱 능력을 아껴야 한다는 건 말할 것도 없다.

구름이 가득 낀 회색 하늘을 올려다본 주현은 결국 능력을 사용해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대신 벽을 잡고 조심조심 내려가는 걸 선택했다.

약간의 찰과상과 함께 바닥에 도착한 주현이 어깨를 기어오르는 거미와 흡사한 괴물을 손등으로 쳐냈다.

임무를 맡긴 협회조차 성과가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고, 실제로 성공하는 게 더 이상한 임무이긴 하지만, 사실 주현은 나아갈수록 약간의 희망을 찾았다.

이곳에 왔던 S급 에스퍼의 능력은 풍압을 조절하는 것이다. 아주 가느다란 산들바람으로도 거대한 괴물을 죽일 수 있는 대단한 능력인데, 물론 그 여파 또한 엄청났다.

주현의 눈앞에는 강력한 폭풍우가 몰아치고 간 듯 처참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이번이 벌써 세 번째로, 분명 에스퍼의 능력이리라.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그가 두고 왔다는 물건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틀 후, 주현은 처음으로 사람의 손길이 닿은 물건을 발견했다. 그야말로 우연과 우연이 겹쳐서 일어난 일이었다.

흔적을 연달아서 발견했고, 아침부터 굵은 빗줄기가 쏟아졌고, 이유는 몰라도 괴물들이 잠잠했고, 미리 봐 두었던 작은 동굴에는 이미 선객이 있었고, 그래서 빗물에 젖어 축 늘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바삐 걸음을 옮기던 주현은 질척해진 바닥을 잘못 디뎌 좁은 틈새에 발이 푹 빠지고 말았다.

무엇 하나 도와주지 않는 상황에 눈을 꾹 감았다 뜬 주현의 시야에 문득 이질적인 색이 잡혔다.

역시나 알록달록한 색이지만 움직이지 않는 비교적 평범한 풀숲 너머, 주현보다 조금 더 크게 자란 나무에 걸려 있는 건 어딜 봐도 커다란 배낭이었다.

앞쪽에 있는 괴물과 바위가 미묘하게 시야를 가려서 조금만 고개를 꺾어도 가려지는 절묘한 위치에 있는 배낭은 보고서에 누락된 부분이 없다면 에스퍼의 것일 가능성이 컸다.

무식하지만 힘으로 발목을 빼낸 주현이 조심스레 풀을 헤치며 나무로 다가갔다.

갈색 가방은 푹 젖어선 빗물로는 지워지지 않는 먼지로 더러웠으나 주현은 거리낌 없이 맨손으로 품에 안았다. 두고 왔다는 게 이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가방. 위치를 보면 대충 던진 게 아니라 계산해서 숨겨 둔 것인데 무슨 사정이 있었을까?

주머니에 손을 넣어 묵직한 탐지기를 꺼내자 레이더 화면으로 봐도 상당히 먼 곳에 게이트가 표시되는 게 보였다. 능력 없이 오로지 다리로만 걸어서 간다면 하루는 걸리는 거리였다. 그래도 지금부터 출발한다면 내일 아침 해가 뜨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 터였다.

주현의 표정이 밝아졌다.

단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S급 에스퍼가 고작 가방을 두고 왔다는 말을 유언으로 남길까 하는 의문이었다. 물론 등급이 높다 해서 인간성이나 생각 또한 깊다는 건 아니지만, 산전수전 다 겪었을 에스퍼가 자신의 죽음을 예측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결국 주현은 힌트를 찾길 바라며 죽은 에스퍼의 가방을 열었다.

비를 피해 움푹 들어간 절벽 아래에 엉덩이를 깔고 앉은 주현은 옆으로 늘어놓은 물건들을 훑어보았다. 간단한 무기, 생수, 식량, 여분의 옷 등 지극히 평범한 물건만이 가득했다.

주현이 가져온 것들과는 비교도 우스울 만큼 하나같이 월등히 질이 좋았지만, 여전히 궁금증을 풀어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임무는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는 게 아니라 단순히 잃어버린 물건을 찾는 것뿐이다.

고민하던 주현은 쓸 수 있는 생수 등을 빼고 물건을 다시 정리하다 가방 안쪽, 지퍼로 잠긴 주머니에 무언가가 들어 있다는 걸 알아챘다.

죽은 자에 대한 예의 어쩌고저쩌고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협회의 손에 들어가면 눈에 불을 켜고 뒤질 텐데 조금 빠르다고 달라질 건 없다.

주머니에서 나온 건 겉표지가 가죽으로 된 다이어리와 종이 뭉치, 그리고 손바닥에 쏙 들어오는 작은 상자였다. 마구잡이로 밀어 넣은 듯 잔뜩 구겨진 종이와 상자를 옆에 둔 주현이 다이어리를 열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일기장이었다. 정갈한 글씨로 이어지는 일기를 보지 않고 넘긴 주현이 에스퍼가 임무를 시작한 날짜에서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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