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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71/161)

폭주 에스퍼 64화

차마 차인호에게 직접 전화하지도 못하고 결국 TV로 빛나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아낸 주현은 이유도 모른 채 가슴이 답답하고 지끈거리는 증상으로 괴로워했다.

그건 차인호가 C동에 올 때까지 지속되었는데, 그동안 컨디션 난조로 인해 위험한 상황이 몇 번이나 있었다. 다시 말해, 주현이 평소보다 날카롭게 반응한 건 여러 이유가 뒤섞인 탓이라는 말이다.

“정말 죄송하지만, 일이 바빠 당분간은 일주일에 한 번밖에 올 수 없어요. 늦어도 다음 달이면 좀 괜찮아질 테니 그때까지만-”

“연애하느라 바쁘세요?”

가이딩 룸의 공기가 한순간 멈췄다.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혹은 불쾌하다는 듯 일그러진 얼굴은 여전히 아름다웠으나 기분 탓인지 평소만큼은 아니었다. 물론 주현의 주관적인 평가다.

누가 배우 아니랄까 봐 미안하다는 감정을 순식간에 지워 낸 차인호가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제 사적인 일을 주현 씨가 왜 신경 쓰시죠?”

맞는 말이다. 차인호가 연애를 하든 결혼을 하든, 주현과는 하등 상관없는 일이다. 잠시 말문이 막힌 주현이지만 이내 당연한 권리에 대해 말했던 빛나를 떠올렸다.

성냥으로 불붙인 담배를 손가락 끝에 매단 폭주 에스퍼가 말했다. 타오르는 붉은 눈동자에 가이드의 굳은 얼굴이 담긴 채였다.

“당신의 사적인 연애로 인해 제가 가이딩을 제대로 못 받게 된다면, 충분히 신경 쓸 사안인 것 같습니다.”

딱딱하게 흘러나온 것에 비해 철저한 을의 말에는 어떠한 열의도 없었다. 오히려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차인호가 그럼 다른 가이드 알아보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도 주현은 그를 붙잡을 방법이 없으니까.

하지만 차인호는 화내지도, 비웃지도, 조롱하지도, 무시하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주현에게 바짝 다가오며 어째서인지 절박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이라도 저를 좀 믿어 주면 안 돼요?”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인지 주현은 이해할 수 없다.

“그냥, 좀…… 네?”

믿음에 보답받는 인생을 살아오지 못한 주현은 쉽게 그러겠노라 말하지 못했다.

‘도대체 뭘 믿으라는 말이야?’

차인호에게 사실 주현과의 매칭을 계속해야 할 이유가 있는 걸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있는 걸까. 공적인 일일 뿐이라면서 그토록 괴로운 표정을 짓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삭막한 C동에서 갇혀 사느라 잘은 몰라도 보통 막 연애를 시작한 사람이라면 좀 더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런 생각을 했다.

주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뜨겁게 타오르던 담뱃불을 손등에 비볐을 뿐이다.

치익- 살갗이 녹아내리는 냄새가 가이딩 룸에 퍼져 나갔다. 금이 간 회색 벽이나 지저분한 천장과는 어울렸지만 노란 의자와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아서, 오히려 그가 이방인이 된 기분이었다.

스스로에게 상처를 내면서 눈꺼풀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올곧게 자신을 응시하는 에스퍼에 가이드가 헛웃음을 흘렸다. 황당함과 분노, 짜증, 그리고 희미한 열기를 마구잡이로 담은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팔을 뻗은 차인호가 주현의 팔을 움켜쥐었다. 평소보다 강압적으로 흘러들어 온 가이딩에 동그란 상처는 순식간에 아물었다.

“대충하는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세요.”

담배는 충분히 피우지도 못하고 불이 꺼졌음에도 비슷한 만족감이 차올랐다.

주현은 자신이 이상해졌다는 걸 인정했다. 하지만 매칭 가이드에게 집착하는 건 에스퍼라면 누구나…….

터져 나오려는 숨을 눌러 삼킨 폭주 에스퍼는 자신이 옆으로 내던져진 채 버려지지 않았다는 사실만을 머릿속에 새기며 차인호의 화난 얼굴을 잊기 위해 애썼다. ……잘되지는 않았다.

* * *

FW-50은 비교적 최근에 발견된 게이트로, 평균적인 게이트보다 세 배는 큰데도 위험도는 상대적으로 낮았다. 그 이유는 건너편 입구 쪽 영역을 차지한 괴물의 특성에 있다.

바닥에 뿌리를 박고 한곳에만 머무르는 식물형 괴물은 게이트가 있다 해도 넘어올 수 없고, 덩달아 다른 괴물의 출입도 막아 주기에 에스퍼로선 고마웠다. 물론 현재 주현은 사방을 둘러싼 보랏빛 줄기를 보며 고마움 따윈 한 조각도 느끼지 못하고 있긴 하지만, 여하튼.

오늘 주현이 맡게 된 임무는 설명만 들으면 간단하기 짝이 없었다.

‘게이트 너머로 가서 얼마 전 그곳에 들어갔던 에스퍼가 두고 온 물건을 가지고 와라.’

보잘것없는 내용을 진중한 목소리로 말한 태석은 평소와 같이 날카로운 눈으로 주현을 내려다보았다. 사람을 무슨 심부름꾼으로 아냐고 따지기엔 이미 다른 에스퍼가 싼 똥을 수도 없이 치운 전적이 있기에 주현은 늘 그랬듯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 물건이 뭡니까?’

‘그걸 알아내는 것까지가 네 임무다. 해당 에스퍼는 게이트에서 나오자마자 죽었고, 그 직전에 남긴 말이 게이트에 뭔가를 두고 왔다는 거니까.’

즉, 그 뭔가의 정체도 모르고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지만,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언급할 정도면 중요한 걸 테니 그걸 찾아오라는 말이었다. 만약 여기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되묻는다면 주현은 멍투성이가 된 채로 임무에 나가야 할 것이다.

얌전히 입을 다문 주현에게 축객령을 내린 태석은 곧장 손을 씻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갔다.

차에 올라타기 전, 직원에게서 임무에 대한 상세 서류를 받은 주현은 생각보다 이 임무가 더욱 고될 것이라는 확신을 느꼈다.

아무리 에스퍼의 유언이라지만 협회가 새로운 임무를 부여할 정도니까 그 에스퍼의 위치가 그리 낮지는 않을 거라 예상하긴 했었다. 그러나 S급일 줄은 몰랐다.

S급 에스퍼를 죽인 괴물이 있는 게이트로 주현을 보내는 데 어떠한 유감도 없는 협회를 속으로 욕한 주현이 파일을 펼쳤다.

보고서에 따르면 해당 에스퍼는 개인적인 용무로 FW-50에 들어갔다고 한다.

고위 등급의 에스퍼가 개인적인 능력 상승이나 훈련 등을 위해 게이트 사용 허가를 받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러나 FW-50은 일반적으로 훈련에 적합한 게이트가 아니라서 의구심이 들었으나 자세한 개인사까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여하튼 애초에 최대 보름으로 잡은 긴 일정이었다. 단순히 스릴 있는 캠핑이라기에도 지나치게 길었으나 어쨌든 협회의 승인을 받고 에스퍼는 홀로 게이트로 떠났다. 가이드를 데려가지 않은 이유가 뭔지는 모른다.

‘가이딩 효율이 좋아서 잦은 가이딩이 필요 없는, 부럽기 짝이 없는 신체인가.’

그리고 11일 후, 게이트에서 나온 에스퍼는 매칭 가이드에게 전화해 안에 두고 온 게 있다는 말을 끝으로 목숨을 잃고 만다. 가이드의 요청으로 협회 인원과 함께 도착한 게이트 앞에는 큰 부상이 보이지 않는 에스퍼의 시신이 있었다.

전체적으로 두루뭉술한 설명에 혀를 찬 주현이 종이를 넘겼다. 뒷장에는 그가 들어갈 게이트에 대한 보고서가 있었다.

[게이트 ‘FW-50’의 환경 및 서식 생물 보고서.]

주현은 무려 4페이지를 차지한 저자 소개와 협회 찬양을 능숙하게 넘기곤 곧장 필요한 정보를 찾아냈다.

[……이하 ‘FW-50-1’은 주로 푸른색과 보라색 몸체를 가진 식물형 괴물로, 질긴 줄기를 가지고 있으며 생물체를 사로잡아 부식액으로 녹여서 영양분을 섭취한다.

부식액은 줄기 표면에서 새어 나오며 줄기가 소화기관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질기고 유연한 줄기는 한 개체마다 대략 30개 정도 있다. 수가 많지만 움직임이 단순해서 상위 등급의 에스퍼에겐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

다만 FW-50-1의 가장 큰 위험은 줄기가 아니다. 괴물은 생명체의 신체에 씨앗을 기생시켜 번식하는데, 이로 인해 가이드 한 명이 목숨을 잃었다.

해당 가이드는 팔뚝에 씨앗이 심어졌으며, 신체적 변화가 나타날 때까지 단순한 찰과상으로 알고 있었다. 아래는 해당 숙주가 사망할 때까지의 경과 관찰이다.]

밑으로 이어진 서술은 담담했다. 숙주가 된 가이드는 하루가 조금 지나서 약간의 소양감을 느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유 모를 간지러움은 커졌고, 이틀째에 환부에 자그마한 문양이 생겼다고 한다.

꽃봉오리와 닮은 문양은 점차 커졌는데, 이때 가이드는 소양감마저 사라지고 아무런 통증도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나흘이 지나자 꽃이 반쯤 피어났다. 붉은색 꽃은 지구상의 어떠한 식물과도 일치하지 않았다. 그제야 실시된 수술은 실패로 끝났다. 단순한 문양임에도 꽃과 가이드의 혈관이 이어져 수술을 속행하면 쇼크사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이때 가이드는 처음으로 극심한 통증을 느꼈으며, 진통제는 소용없었다. 비록 수술은 실패했으나 협회에서는 꽃이 숙주의 생명력을 갉아먹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식사량의 변화가 없음에도 3㎏이 줄어든 숙주는 수면이 늘고 안색이 창백해졌으나 여전히 통증을 못 느꼈다.

9일 후, 환부의 문양이 만개했다. 숙주는 극심한 피로로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붉은 꽃이 서서히 피부 너머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하루에 걸쳐 출혈 하나 없이 꽃이 피어났고, 다음 날 숙주는 사망했다.

“숙주의 사망과 동시에 시들었다…….”

보고서에 실린 마른 꽃을 응시하던 주현이 씁쓸하게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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