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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70/161)

폭주 에스퍼 63화

차인호는 화질이 안 좋은 화면 너머에서조차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러나 실제로 보면 훨씬 더 아름답다. 딱히 타인의 미추에 대해 큰 관심 없는 주현조차 때때로 숨을 멈출 정도로.

화면 속 차인호가 이름 모를 상대역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차인호와의 마지막 포옹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할 수 없는 주현은 채경이 채널을 돌리는 걸 내심 반겼다.

마음이 넓은 사람은 절대로 아니지만, 이토록 좁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 주현이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차인호는 신주현의 매칭 가이드니까. 다른 에스퍼들의 말에 따르면 가이드, 특히나 매칭 가이드에게 집착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생각은 그를 두렵게 만든다. 이 매칭은 얼마 안 가 끊어질 게 확실하기 때문이다.

썩은 동아줄에 모든 걸 걸고 매달리면 안 되는데 자꾸만 그렇게 하는 자신을 말리고 싶었다. 남은 건 추락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끈질기게 줄을 붙잡은 에스퍼가 부딪히듯 눈을 감았다.

* * *

7월에 들어선 지 보름이 훌쩍 넘었다. 여름 햇살은 따갑지만, 여느 때보다도 훨씬 풍성하게 잎사귀를 피운 나무를 보는 건 나쁘지 않았다.

몸을 아늑하게 감싸는 편안한 의자에 앉아 창살 너머를 구경하던 주현은 등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귀를 쫑긋하면서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무려 닷새 만에 만나는 차인호는 일이 바쁜지 제법 피곤한 얼굴이었다.

“안녕하세요. 제가 좀 늦었죠?”

열두 시에 오기로 했으면서 한 시가 넘어서야 도착한 차인호가 미안함을 내보이며 건너편에 앉았다.

“어디 다친 곳 있으세요?”

눈에 띄는 상처는 없지만, 차인호가 오지 않은 5일 동안 총 세 개의 임무에 나갔던 주현은 최대한 능력을 아꼈음에도 여실히 느껴지는 가이딩 부족을 구태여 입에 담지 않았다.

그날, 주현에게 두 사람의 사이는 오로지 계약서에 따른 공적인 일이라고 낙인찍은 후에도 차인호의 태도는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어쩌면 애초에 다른 매칭 에스퍼, 가이드와 같이 가까운 사이가 아니기 때문에 티가 덜 나는 걸지도 모른다.

주현이 테이블 위로 손을 내밀었고, 그의 가이드는 별말 없이 손가락을 얽었다.

따뜻하고 부드럽다. 크기는 엇비슷하지만 매끄럽게 관리된 예쁜 손과 주현의 울퉁불퉁하고 흉터가 흩뿌려진 손은 비교하기도 민망했다.

손끝에서부터 서서히 퍼져 나가는 가이딩은 이젠 익숙해질 만도 한데 여전히 경이롭게 느껴진다. 두통과 피로에 물든 팔다리, 그 외 자잘한 상처까지 서서히 아물며 주현의 컨디션을 좋게 만들었다.

들쭉날쭉한 주기로, 그것도 모욕감과 고통을 동반한 가이딩 속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주현은 이 친절한 가이딩을 잃고 싶지 않았다.

물론 불가능한 일이다. 애초부터 1년이라는 모래시계 위에서 만들어진 관계이므로. 시간이 끝나 시계가 뒤집히면 그대로 고꾸라질 사이는 영원과는 거리가 멀었다.

주현도 알고 있다. 빼앗기는 것에 익숙한 그는 행복, 또는 약간의 따스함이 인생에서 길게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무척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차인호는 사정이 나은 편이다. 그와 그의 가이딩을 잃을 날이 언제인지 정확히 알고 있으니까.

설령 관계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다 한들 앞으로 몇 개월이면 확실하게 이별한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 놓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주현은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앞으로 몇 개월 동안은 누가 뭐라 해도 차인호는 신주현의 매칭 가이드다.

‘그 시간만이라도 아늑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보내자.’

작게 소망했으나 주현의 바람은 조금 다른 의미로 색이 바랬다.

주현은 차인호의 연애가 자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가슴이 울렁거리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정말이지 엿 같게도.

* * *

“아, 맞다. 괜찮으세요?”

질문한 사람은 임무 중 만난 에스퍼로, 만나자마자 방송을 봤다며 먼저 살갑게 말을 걸어온 드문 사람이었다. 그는 물리적인 힘은 약하지만 활용도는 다양한 탐지 계열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이번 임무에 함께하게 되었다.

뜬금없는 질문은 임무가 거의 끝난 후, 다른 이들을 배려해 홀로 떨어져 있던 주현에게 선뜻 다가온 에스퍼가 손뼉을 짝 치며 뱉은 말이다. 아직 눈이 붉지 않은 사람의 호의에 익숙해지지 못한 주현은 발끝으로 조약돌을 굴리며 물었다.

“뭐가 말입니까?”

“아니, 매칭 가이드 중에 최악은 다른 사람, 특히 일반인이랑 사귀는 가이드잖아요.”

일반인 연인이 있는 매칭 가이드. C동 에스퍼들에게서 종종 듣곤 하던 이야기다. 매칭 가이드는 필연적으로 스킨십의 수위가 높을 수밖에 없어서 에스퍼와 가이드는 연인 사이인 경우가 많다.

‘설사 처음에는 단순한 비즈니스였어도 살을 부대끼다 보면 감정이 싹트기 마련이지.’

지금은 없는 에스퍼가 주현의 어깨를 툭 치곤 코를 찡긋거리며 웃었던 장면이 아직도 머릿속에 선명히 남아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끝까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비즈니스로 끝나는 경우도 적지 않게 있으나 가이드에게 일반인 연인이 생기는 것은 다른 이야기라고 했다.

“아무리 매체에서 가이딩에 대해 떠들어도 일반인한테는 단순한 애정 행각으로밖에 안 보이니까, 결국 자기 애인이 일하는 게 아니라 바람피우는 것처럼 느껴진다더라고요.”

말을 마친 에스퍼의 곱슬기 있는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흔들렸다. 이름 모를 달콤한 향기가 희미하게 맡아졌다.

그런 말을 왜 자신에게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주현은 발랄한 목소리를 방해하지 않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무뚝뚝한 대응에도 개의치 않은 에스퍼가 팔짱을 끼곤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특히 내 매칭 가이드가 연애하느라 나한테 소홀해진다? 와, 그러면 전 진짜 미칠걸요. 차라리 매칭을 끊으면 끊었지, 애인 눈치 보느라 가이딩 대충하는 건 못 참아요.”

에스퍼의 갈색 눈동자가 휙 주현에게 꽂혔다. 일정 거리 이내라면 날아다니는 민들레 홀씨 하나마저 짚어 낸다는 에스퍼의 시선에는 어딘가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인호 씨는 안 그래요? 다솔 씨가 가이딩에 좀 관대한 편인가?”

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짧은 탄식이었다.

주현의 머리는 제법 빠르게 돌아간다. 살아남기 위해선 상황을 기민하게 파악해야 했기 때문이다. 작은 상처가 난 살갗을 손톱으로 꾹 누르며 주현이 대답했다.

“……차인호 씨는, 똑같습니다.”

자존심을 빼면 남는 게 없는 남자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노려보았다.

주현은 에스퍼가 능력을 사용하지 않고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렇지 않다면 필요 이상으로 힘이 들어간 어깨나 기어코 아문 상처가 다시금 열려 작은 핏방울이 맺혔다는 걸 알아챌 테니까.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혹시 나중에라도 뭔가 달라진 것 같고 가이딩을 충분히 해 주지 않는다면 당당히 항의하세요. 매칭 에스퍼의 당연한 권리니까요.”

철저한 갑을 관계 안에서 을에게는 어떠한 권리도 없다. 그걸 말하느니 혀를 깨물 주현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감정을 숨기기 위해 입꼬리를 밀어 올린 주현이 에스퍼와 눈을 맞췄다. 놀란 표정을 짓던 에스퍼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뭔가 방송이랑은 다르시네요.”

“그렇습니까?”

“네. 좋은 쪽으로 달라요.”

아무래도 태생적으로 긍정적인 사람인 것 같다. 주현과는 완전히 상반된다고 말할 수 있다.

차인호에게는 연인이 있다. 에스퍼도 가이드도 아닌, 일반인에 이름은 다솔인 듯하다. 이제야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주현을 밀어내곤 두 사람의 매칭은 오로지 공적인 일일 뿐이라고 도장 찍은 건 그의 입장에선 전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다. 언제부터 연인이 생겼는진 몰라도 원만한 연애를 위해선 매칭 에스퍼에게 한 번쯤은 명확한 선을 그어 놔야 했을 것이다.

이상하게도 주현의 속내를 꼬집곤 하는 차인호이니, 그의 묘한 마음을 눈치챈 걸지도 모른다.

가슴이 답답했는데 이 증상이 가이딩 부족으로 인한 것인지 혹은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주현은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분노와 닮은 감정을 곱씹으며 품에서 담배를 꺼내 든 주현은 짧은 망설임 끝에 성냥이 아닌 라이터를 꺼냈다.

경쾌한 딸깍 소리와 함께 기름 냄새가 훅 풍겼다. 제법 오랜만에 입에 무는 담배는 잠깐의 공백 따윈 없다는 듯 입술에 달라붙었다.

목이 타는 감각을 느끼며 한숨처럼 길게 연기를 뱉고 나서야 혼자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힐끗 옆을 보니 에스퍼는 정확히 이렇다 말할 수 없는 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냄새가 싫은가 싶어 멈칫한 순간, 그가 불쑥 입을 열었다.

“제 이름 뭔지 아세요?”

주현은 눈을 가늘게 뜨며 시선을 피했다. 다른 이들과 뒤섞여 한꺼번에 소개받은 데다 딱히 교류할 생각이 없던지라 주현은 물론 그의 이름이 뭔지 모른다.

예상했다는 듯 장난스럽게 혀를 찬 에스퍼가 제법 귀여운 미소를 지었다.

“나빛나예요, 나빛나. 토마토처럼 앞뒤가 같아요. 아까도 이 말 했는데.”

“……앞으로는 기억하겠습니다.”

그것으로 만족한 듯 빛나는 생긋 웃고는 다른 에스퍼와 가이드, 협회 직원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홀로 남은 주현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기분을 느껴야 할지 감조차 잡지 못했다. 결국 다시금 연기를 내쉰 그가 어깨를 조금 웅크렸다.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그도 모른다.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나서야 담배 없이도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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