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68/161)

폭주 에스퍼 62화

그의 상황은 주현과는 완전히 정반대였다. 돈과 권력, 명예를 다 가지고 있는 연우의 어머니는 모든 걸 가지고도 부족하다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 여자의 예쁜 인형이었어.”

그리 속삭이는 연우의 목소리는 아주 작고 나약해서, 2층에 누워 있던 주현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말았다.

“여기저기 끌고 다니며 자랑하는 인형 말이야. 인형이니까 주인이 정해 준 말만 해야 하고, 정해 준 옷만 입고, 정해 준 음식만 먹고, 정해 준 대로 움직여야 했어.”

주현으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삶이었다. 단 한 번도 자랑스러운 자식이 되어 본 적이 없어서 어떤 심정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다 남들에게 보이기 부끄러울 정도로 망가지니까 내다 버렸지.”

연우의 목소리에는 분노도 슬픔도 없었다. 그저 깊은 체념과 피로가 묻어났다. 유리창을 때리는 거센 빗소리에 연우의 진심이 묻혀 사라질 것 같았다.

“흉터가 남을 거라고 하자마자 쟤 내 아들 아니라고 비명 지르는 게 얼마나 웃겼는지 몰라.”

결국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난 주현이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어두운 방에서 유독 눈을 사로잡는 하얀 붕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간 주현이 연우의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민재 덕분에 누군가와 온기를 나누며 잠드는 게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알고 있는 주현이 당황한 연우에게 가까이 달라붙었다.

“나랑 반대네.”

“…….”

“우리 엄만, 나보고 왜 태어났냐고 했는데.”

좁은 침대라서 서로의 얼굴이 무척 가까이서 보였다. 잠시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던 연우가 느린 어투로 말했다.

“슬펐겠네.”

슬펐나? 잘 모르겠다. 그저 그 말에 반박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화가 났던 기억이 있다. 다락방에서 혜린이 해 주었던 말은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았다.

‘넌 화난 게 아니야. 슬픈 거지.’

입술을 달싹이던 주현이 침을 꿀꺽 삼켰다. 입술 새로 흘러나오는 목소리엔 작은 깨달음이 담겨 있었다.

“그땐 그랬는데 이젠 괜찮아.”

깁스를 푼 연우의 왼팔은 햇빛을 보지 못한 탓인지 오른팔보다 하얗고 가느다랬다. 그런 팔이 주현의 등을 감싸 안았다.

“형 아빠는 어땠어?”

“글쎄. 얼굴도 몇 번 못 봐서 이렇다고 말할 거리도 없어.”

“난 새아빠가 있었는데, 날 엄청 괴롭혔어. 그래서 아직도 누가 날 만지는 게 싫어. 무서워.”

비슷한 말은 보호소의 다른 아이들에게도 말했지만 무섭다고 털어놓은 건 처음이었다.

잠시 움찔거린 연우가 주현에게서 슬그머니 멀어지려 했다. 그에 주현은 더욱 가까이 연우에게 달라붙었다.

연우가 다른 아이들과 조금 다르게 느껴지는 부분이 바로 이런 점이다. 그들은 같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 결은 달라도 뜻대로 살 수 없었다는 점에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처음으로 만난 이해자. 혜린이 왜 두 사람이 닮았다고 했는지 이제는 알고 있다.

“형은 어때? 지금도 슬퍼?”

주현은 오랫동안 슬펐다. 사실 아직도 가끔 헤어날 수 없는 깊은 슬픔에 빠져 분노에 휩싸이기도 한다.

그래도 괜찮다. 진정으로 가족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생겼고, 처음으로 내일이 기대되는 나날이 이어지고 있으니까. 주현은 연우 또한 그렇기를 바라며 몇 번을 봐도 여전히 예쁜 눈을 바라보았다.

붕대로 가려지지 않은 입술은 아주 느리지만 묘한 확신을 가지고 움직였다.

“아니.”

나도. 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힘을 줘서 연우를 끌어안았을 뿐이다.

그 외에도 홍연우에 대해 주현이 알아낸 점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가끔 아주 부드럽게 말한다든가, 기분이 좋으면 서투른 솜씨로 주현의 머리를 쓰다듬는다든가, 꼬맹이들이 부르는 미라라는 별명을 내심 마음에 들어 한다든가, 예전에 형이 있었다든가.

때때로 늦은 밤 몰래 주현의 볼에 입을 맞춘다든가. 그때마다 주현이 자는 척한다는 걸 알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든가. 반대의 상황도 가끔, 아주 가끔 일어났다든가.

아무튼 주현은 동백 보호소에 오기 전엔 어떻게 살았나 의아할 정도로 충실하고 행복한 하루하루를 살았다.

그리고 세상은 늘 그렇듯 주현이 행복해하는 꼴을 가만히 두고 보지 못한다. 홍연우가 동백 보호소에 들어온 지 7개월 하고도 13일이 지난 날, 열네 살의 신주현은 에스퍼로 발현하고 그와 동시에 폭주한다.

폭주는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일어났으며, 당시 동백 보호소에 있던 이 중 살아남은 생존자는 없다.

인생은 지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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