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61화
역시나. 연우의 주먹은 제법 날랬지만, 제대로 힘주는 방법을 모르는지 크게 아프지는 않았다. 물론 아예 안 아프다는 건 아니다. 다만 고통으로 울거나 당황해서 굳을 정도는 아니라는 말이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주현이 곧장 덤벼들었다. 두 사람의 싸움은 석규가 뒤에서 주현을 끌어안으며 물러선 후에야 끝이 났다.
소란을 들은 선생님들이 아연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살피는 게 느껴졌다. 그 외에도 보호소의 모든 아이가 뛰어와 웅성대고 있었지만, 주현의 시선은 오로지 혜린의 부축을 받는 연우에게 닿아 있었다.
먼저 덤빈 것치고 예상한 대로 볼품없는 실력을 가진 탓에 주현보단 연우가 훨씬 더 엉망이었다. 적당히 힘 조절은 했으니 정말로 크게 다친 곳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단단한 깁스에 머리를 제대로 맞은 주현이 더 큰 부상을 입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주현을 아는지 모르는지, 홍연우는 여전히 가려진 얼굴로 바닥을 응시하며 비틀비틀 일어섰다. 최악의 룸메이트가 생긴 날이었다.
* * *
“석규 형, 나랑 방 바꿔 줘.”
“싫어. 짐 옮기기 귀찮단 말야.”
“그럼 민재.”
“으응?”
“아이스크림 사 줄게.”
“좋아!”
“민재야, 너 주현이 형 방이 화장실에서 제일 먼 거 알지? 밤에 어쩌려고 그래.”
은하의 차분한 말에 민재는 곧장 동의를 철회했다. 민재가 넘어오지 않는 걸 보면 다른 꼬맹이들도 마찬가지일 게 분명했다. 원하는 걸 얻지 못한 주현이 커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힘들어?”
문제집을 풀던 혜린의 물음에 주현은 눈을 가늘게 뜨곤 지난 일주일을 되돌아보았다.
연우와 한바탕한 후로 방 분위기는 그야말로 얇은 얼음판 위에 있는 것과 같았다.
막 입소한, 그것도 크게 다친 연우와 쌈박질을 했다는 이유로 주현은 처음으로 원장 선생님에게 혼이 났다. 다행히 사정을 듣고는 연우 또한 꾸중을 들었기에 크게 상처받지는 않았다.
그 후로 두 사람은 마찰을 빚지 않기 위해 은근히 애썼는데, 대표적인 게 바로 눈조차 마주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서로를 무시하며 투명 인간 취급하는 상황은 몇 달간 보호소의 따스함에 빠져 있던 주현에겐 조금 버거웠다.
“나보다 심한 것 같아.”
딱히 언급하는 사람은 없지만, 주현은 보호소에 오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자신이 얼마나 예민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때를 떠올렸는지 몇몇 아이가 피식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와중에 문제를 풀었는지 페이지를 넘긴 혜린이 아무렇지 않은 어투로 말했다.
“내가 보기엔 둘이 똑같은데?”
“뭐? 어디가?”
깜짝 놀란 주현이 책상에 엎드리고 있던 몸을 벌떡 일으키자 혜린이 작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주변의 다른 형, 누나들도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쁜 애는 아니라는 점이 똑같아. 가서 말 걸어 봐. 혹시 알아? 생각보다 괜찮은 애일지.”
말 걸었다가 그 꼴 난 거 기억 안 나냐고 하기엔 예전에 주현이 벽을 칠 때도 모두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다가왔다는 게 떠올랐다. 그걸 생각하면 이미 거절당했으니 끝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거기다 동백 보호소는 일반적인 보호소가 아니기에 더더욱.
바로 그러한 이유로 주현은 보호소 뒤뜰, 연우가 곧잘 머물곤 한다던 널따란 잔디밭에 들어섰다.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도시의 바람보다 훨씬 더 신선했다.
마구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넘기며 조심히 걷던 주현은 나무 그늘 아래에서 연우를 발견했다. 그는 휴대폰을 보고 있었는데, 인기척을 느꼈는지 곧장 고개를 들었다. 붕대 때문에 잘은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시선이 마주쳤다.
괜히 멋쩍은 마음에 먼저 눈을 돌린 주현이 근처 잔디밭에 털썩 앉았다. 딱히 할 일이 없어 벌러덩 잔디밭에 누울 때까지도 연우의 시선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한 시간 같은 몇 분이 지나고, 연우는 말없이 일어나 어딘가로 가 버렸다. 아쉽지는 않았다. 여전히 조금 회의적이지만, 만약 그가 예전의 주현처럼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주변에 날을 세우고 있는 거라면 조금쯤 참아 주지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으므로.
동백 보호소의 다른 아이들처럼 주현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날부터 주현은 매일 뒤뜰에 가서 연우 근처에 앉아 낮잠을 자거나 책을 읽었다. 때때로 그가 없을 때도 있었지만, 다섯 번 중 세 번 정도는 뒤뜰에서 마주쳤다.
한 번은 연우가 먼저 떠났고, 한 번은 화장실이 급했던 주현이 먼저 일어났다. 어느 날은 낮잠을 자고 일어나니 연우가 사라졌고, 또 어떤 날엔 두 사람이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 방으로 돌아갔다.
그런 날이 늘어나다 보니 주현은 점차 연우의 옆에서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언제 미운 말을 들을지 몰라 신경을 곤두세우던 몸은 편안하게 늘어졌고, 마음 또한 그랬다.
뒤뜰에서의 기묘한 시간이 보름 정도 지난 날이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잔디밭에 들어선 주현은 멈칫 굳어 버리고 말았다. 평소 그가 드러눕곤 하던 자리에 선객이 있었던 탓이다.
커다란 사마귀가 미동도 없이 서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딱히 벌레를 무서워하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크면 죽이기가 좀 뭐했다.
결국 주현은 조금 비켜난 자리에 앉았는데, 연우에게 몇 걸음 더 가까운 장소였다. 고개의 움직임으로 보아 연우는 분명 주현을 힐끔 살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침묵했을 뿐인데 어째서인지 처음으로 곁을 허락받은 것 같아서, 주현 또한 얌전히 누워 조금 기쁜 기분으로 일광욕을 즐겼다.
다음 날에는 사마귀가 어딘가로 가고 없었다. 그럼에도 주현은 어제와 같은 자리에 앉았고, 이번에도 홍연우는 침묵을 유지했다.
다시 한번 시간이 흘렀다. 본인도 이유는 모르겠지만 점차 가까운 자리에 앉던 주현은 마침내 연우의 자리인 나무 밑에서 고작해야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눈을 감아도 햇살이 너무 강해 온 시야가 새하얬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번에는 연우가 입을 열었다. 그가 원장 선생님이나 다른 아이들이 아닌 주현에게 말을 거는 건 첫날 이후 처음이었다.
“그늘로 와.”
주현의 얼굴조차 보지 않고 툭 뱉은 말에 어쩐지 가슴이 뛰었다. 가장 비슷한 걸 찾자면 처음으로 나비를 쓰다듬었을 때 느꼈던 감정과 닮았다.
그날 주현은 저도 모르게 연우의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노을이 저물 즘에 깨어난 그는 여전히 그의 머리를 받치고 있던 연우를 발견했다. 입을 벌리고 잤는지 침이 흘러 축축한 턱을 닦은 주현은 동그란 자국이 남은 연우의 어깨를 어색한 손길로 문질렀다.
“……깨우지.”
“코까지 골면서 자는데 어떻게 깨워.”
“나 코 안 골거든?”
새아빠에게 온갖 걸로 트집이 잡혔는데 시끄럽게 잔다고 맞은 적은 없으니 얌전히 잘 게 분명했다.
당당한 주현을 잠시 바라보던 연우가 피식 웃었다. 여전히 꼼꼼하게 감긴 붕대 때문에 미소가 보이지는 않았으나 작은 숨소리와 반쯤 휘어진 눈 때문에 알 수 있었다.
그동안은 몰랐는데, 홍연우는 무척 예쁜 눈을 가지고 있었다. 남들보다 두 배는 길어 보이는 풍성한 속눈썹과 부드러운 눈매, 그리고 노을 색으로 반짝이는 동그란 눈동자.
조금 놀라 주현이 굳은 사이 먼저 일어난 연우가 건물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는 몇 걸음 가지도 않고 돌아섰다.
“안 가?”
딱히 다정한 말투가 아닌데도, 오히려 퉁명스러움에도 주현은 제법 큰 기쁨을 느끼며 연우의 옆으로 달려갔다.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진다는 건 언제나 기쁜 일이었다.
이건 비밀이지만 주현은 연우가 아직 다른 아이들과 그다지 살갑게 대화하지는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그리 길게 이어지진 않겠지만, 어쨌든 ‘특별’이었다. 누군가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경험은 아예 없다고 해도 좋을 주현이 남몰래 웃었다.
* * *
연우와 가까워지고 그에 대해 알게 된 것이 많이 있다. 먼저, 다친 이유는 교통사고 때문이다. 음주 운전 차량이 차의 옆면을 그대로 들이박아서 뒷좌석에 있던 그가 크게 다쳤다고 했다.
‘수술로도 지울 수 없는 엄청 큰 흉터가 남을 거래.’
그리 말하던 연우는 어째서인지 웃고 있어서 조금 섬뜩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연우는 비를 싫어한다. 비만 오면 상처가 쑤시는 탓에 소리 없이 우는 걸 몇 번이나 발견했다. 그럴 때마다 옆을 맴돌면 안 아픈 척하는 통에 한 번은 싸운 적도 있다. 결국 비가 올 땐 주현이 손을 잡아 주기로 했다. 잘은 모르지만,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또 고작해야 한 살 차이임에도 연우는 아주 똑똑했다. 주현은 한 학년 아래의 진도를 따라가는 것조차 버거운데, 그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석규의 숙제를 도와주기까지 했다.
연우는 일주일에 한 번씩 치료를 위해 시내에 있는 병원으로 간다. 그때마다 처음 보호소에 함께 왔던 남자가 운전해 준다. 그의 말로는 운전기사라는데, 그런 게 실제로 있다고 확신하지 못하는 주현은 반쯤 거짓말이라고 의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홍연우는 부모님, 특히나 엄마를 싫어한다. 그가 말해 준 건 아니다. 주현이 알아서 눈치챘다. 비슷한 이야기만 나와도 인상을 쓰고 명백하게 방어적으로 구는 걸 보면 모를 수가 없었다.
말해 줄 생각은 없지만, 그 사실에 주현은 내심 동질감을 느꼈다. 그러다 비가 유난히 많이 오던 날 밤, 연우가 말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