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화 (66/161)

폭주 에스퍼 60화

열다섯 살 단발머리 여자아이, 혜린은 부모님이 도박 중독에 걸려 모든 것을 잃고 이곳에 왔다고 했다. 빚을 감당하지 못하고 둘이서 함께 목을 매단 걸 발견하고 신고한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

그녀는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밤새 비명을 지르거나 마구 자해해 이곳에 오게 되었다고 했다.

“날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늘 거절당했어. 그렇게 보육원을 전전하다 여기 왔는데……. 가족이 생겨서 좋아.”

혜린은 주현과 똑같이 무릎을 감싸 안고는 허공을 보며 작게 웃었다.

그녀의 얼굴을 몰래 보던 주현은 손톱으로 피부를 긁적였다. 털어놓기 쉽지 않은 이야기를 해 준 그녀에게 뭐라도 보답하고 싶었지만, 그는 줄 게 아무것도 없었다.

누군가 올라올 생각을 하지 않는 다락방 사다리를 응시하던 그가 툭 내뱉었다.

“나는 매일 화가 나.”

누구에게도 한 적 없는 말이었다. 사실 속에 있는 말을 타인에게 뱉은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고작 한마디 했을 뿐인데 벌써부터 후회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혜린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초조함과 묘한 개운함이 뒤섞여서 주현의 어깨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나를 투명 인간처럼 대하는 엄마를 보면 화가 나고, 새아빠가 나를 때리면 너무 화가 나서 머리가 아파. 나 빼고 세상 사람 다 행복한 것 같아서 열받아 미칠 것 같아.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너무 싫어서 화나.”

쓸데없는 말을 한다고 혜린이 화내면 어쩌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열린 입은 닫힐 줄을 모르고 계속해서 말을 뱉었다.

“민재가 울면 화나고, 내가 멍청해서 수업을 따라갈 수 없으면 화나. 여기가 너무 좋은데 진작 오지 못해서 너무너무 화가 나.”

큰 소리로 말한 것도, 빠르게 말한 것도 아닌데 주현은 어느새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가 가라앉는 걸 반복했다.

어쩌면 그의 인생에서 가장 길게 말한 순간일지도 몰랐다. 동백 보호소에 오기 전까지 주현의 말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다락방에는 곧 고요가 찾아왔다. 밑에서 아이들이 크게 웃으며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려왔다. 숨바꼭질인데 마치 술래잡기라도 하듯 요란했다.

주현은 말 없는 혜린을 슬그머니 바라보았다. 진짜 아빠는 어떻게 됐냐고 물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뭐라고 말해야 할까. 내가 죽였어. 그게 정답이지만 주현은 기껏 생긴 친한 사람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허공을 보며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혜린은 돌연 휙 고개 돌려 주현과 시선을 맞췄다. 유난히 옅은 갈색 눈동자가 먼지가 떠다니는 다락방에서 빛났다.

“넌 화난 게 아니야. 슬픈 거지.”

“어! 찾았다!”

바닥에 나 있는 구멍으로 올라온 작은 머리가 활짝 웃으며 외쳤다. 은비의 머리카락을 땋아 준 사람은 주현이었다. 엉성하고 삐딱하게 묶였는데도 은비는 마음에 든다면서 머리를 풀지 않았다.

“혜린이 언니랑 주현이 오빠 찾았어!”

“이제 누구 남았지?”

높은 목소리들이 한데 뒤엉켜 신이 나선 떠들어 대었다. 혜린은 엉덩이를 털며 일어나 은비와 함께 사다리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넌 화난 게 아니야. 슬픈 거지.’

혜린은 동백 보호소에 있는 모든 아이 중 가장 똑똑했다. 주현과는 달리 매일 아침 부원장 선생님이 태워 주는 차를 타고 학교에 가는 그녀는 반에서 항상 1, 2등을 다툰다고 했다.

그렇게 똑똑한 사람이 한 말이니 맞을지도 몰랐다. 엄마가 나를 사랑해 주지 않아서 슬프고, 새아빠가 나를 아프게 해서 슬프고, 행복하지 않아서 슬프고, 평범하게 공부하지 못해서 슬프고, 좋은 일이라곤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인생이 억울해서 슬프고.

말이 되네.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래도 주현은 제 입으로 인정하지는 않을 터다. 그는 자존심 빼면 시체인 인간이라서 슬퍼하기보단 분노에 미쳐 날뛰는 걸 고를 것이기 때문이다.

“오빠 얼른 와!”

다시금 머리를 쏙 내민 은비가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저 아래에서 민재의 칭얼거림도 들려왔다. 주현은 가라앉는 분노를 느끼며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 * *

주현의 방에 또 다른 아이가 들어온 건 그가 동백 보호소에 온 지 4개월 정도가 지난 날이었다. 원장 선생님을 곧잘 돕곤 하는 은하가 가장 먼저 소식을 아이들에게 전해 주었다.

“어떤 애일까?”

“나보다 동생이었으면 좋겠어!”

“나도!”

보호소에서 가장 어린 쌍둥이, 서하와 서후의 외침에 귀엽다는 듯 키득거린 아이들이 남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 왔다!”

커다란 창문 너머로 까만 자동차가 보호소 마당에 들어오는 게 보였다. 차에 대해 잘 모르는 주현이 보기에도 상당히 비싸 보이는 차였다. 미리 기다리고 있던 원장 선생님과 부원장 선생님이 운전석에서 내린 남자와 대화를 이어 나갔다.

“여자애일까 남자애일까?”

“음, 난 여자애! 우리 방에 들어오면 좋겠다.”

“남자애면 주현이 방에 들어가겠네.”

석규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주현이 새까만 선팅 탓에 안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 자동차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얼마 후, 대화를 마친 남자가 문을 열었다. 뒷좌석에서 익숙하게 내린 아이는 멀리서 보는 터라 확실하진 않았으나 주현보다 반 뼘 이상 큰 키를 가지고 있었다. 사실 주현이 또래에 비해 유난히 작은 터라 키를 비교해 나이를 짐작하는 건 정확도가 떨어지기는 했다.

여하튼 그 아이는 새하얀 셔츠와 척 보기에도 매끄러운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가장 큰 특징은 그것이 아니었다.

“다쳤나 봐.”

“그러게. 아파 보여.”

아이의 얼굴을 칭칭 감은 새하얀 붕대는 얼마나 꼼꼼히 감았는지, 두 눈과 숨구멍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보여 주지 않았다. 그 외에도 왼팔을 감싼 깁스를 미루어 제법 큰 사고가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어릴 때부터 두들겨 맞으며 자란 덕에 맷집은 제법 있다고 자부하는 주현이지만 고통을 잘 참는다는 건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는 말과는 다르다.

굳게 감긴 붕대는 목덜미까지 감싸고 있었다. 얼마나 아플지를 생각하니 절로 눈썹이 구겨졌다. 원래라면 자신의 상처를 돌보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타인의 상처 따윈 관심조차 없었을 텐데, 주현의 과거사를 들으며 대신 울어 주었던 보호소 가족들 덕분일지도 모른다.

그때 원장 선생님 앞에 서 있던 아이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붕대 때문에 확신할 수는 없지만, 어쩐지 시선이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주현이 고개를 갸웃하기도 전에 아이는 선생님들의 손짓을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아이들이 예상한 대로 새로 들어온 아이는 몇 개월간 비어 있던 주현의 1층 침대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름, 홍연우. 나이, 열네 살. 즉 주현보다 한 살이 많다. 그러나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딱히 나이 차이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주현은 자신의 보호소 첫날을 생각하며 괜히 짐 정리 중인 연우를 흘끗거렸다. 그러다 값이 상당해 보이는 상자를 책상 위에 두는 연우를 향해 말했다.

“중요한 물건은 서랍에 넣어 두는 게 좋을걸. 안 그러면 애들이 망가뜨려.”

대답은 없었다. 잠시 2층 침대에 올라가 있던 주현을 바라본 연우는 다시금 고개 돌려 정리를 계속했다. 무시인지 쑥스러움인지는 구분할 수 없었다. 표정을 알 수 없다는 게 이토록 불편한 일인 줄 처음 알았다.

“옷걸이 부족하면 은하 누나한테 달라고 하면 돼.”

“야.”

“어?”

“닥쳐.”

그 짧은 말은 길이에 비해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서야 완전하게 이해되었다.

닥쳐. 닥쳐? 닥쳐. 멍하게 단어를 곱씹던 주현의 얼굴은 점점 구겨지더니 이내 완전히 이를 드러낸 사나운 사냥개처럼 살벌해졌다.

보호소에서 지내며 아주 부드러워졌지만, 사실 주현은 평생을 날카롭게 벼려진 상태로 살아왔다. 고작 몇 개월만으로는 날을 완전히 무디게 만들 수는 없는 법이다.

원장 선생님의 근심 어린 표정만 안 떠올랐어도 주현은 곧장 침대에서 내려와 연우와 한바탕했을 것이다. 그러나 보호소에서 다양한 걸 배운 주현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그런 자신이 약간 자랑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뭐라고?”

주현은 지극히 신사적으로 물었다. 연우가 얼버무리거나 하다못해 그냥 무시하기만 해도 그냥 넘어가 줄 의향이 충분했다.

하지만 연우는 상황을 쉽사리 넘어갈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는 주현을 바라보지조차 않으며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중얼거렸다.

“말귀도 못 알아먹는 놈이랑 어떻게 방을 같이 쓰라는 거야.”

“나 환자라고 안 봐줘.”

그제야 연우가 느릿하게 뒤로 돌아섰다.

무표정하게 하얀 붕대를 응시하던 주현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모든 감정을 버리고 자존심으로 꽉꽉 채우던 버릇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물론 주현이라고 진짜로 환자를 때릴 생각은 없었다. 그저 자신을 무시하는 상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를 뿐이다. 보고 자란 대로 행동하면 보통은 더러워서라도 주현을 피한다. 그러면 일단 불편한 상황은 모면할 수 있기 때문에 주현이 가끔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주현의 센 척을 연우가 알아챘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다지 강해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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