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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63/161)

폭주 에스퍼 57화

결국 에스퍼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지만, 목숨은 붙어 있었다. 사람들은 그 에스퍼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곤 차에 태웠다.

저렇게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폭주한 에스퍼는 취급이 좋지 않다. 특히 피해가 클수록 더욱 그랬는데, 국민을 지켜야 할 에스퍼가 오히려 피해를 입힌 데다 한 번 폭주한 에스퍼는 언제 다시 폭주할지 모르기 때문이라 했다.

그들이 어떻게 되는지는 주현도 모른다. 그는 모르는 게 너무 많아서 그런 걸 신경 쓸 틈이 없다.

새아빠는 재미없다는 표정으로 채널을 돌렸다. 한 선수가 배트로 공을 치고 힘껏 달렸지만, 공이 돌아오는 속도가 더욱 빨랐다. 그는 터덜터덜 벤치로 돌아갔다.

주현은 아까 그 에스퍼가 무슨 일을 하다 폭주했는지 궁금했다. 어쩌면 아까 그 아나운서가 그에 대해 말해 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새아빠는 채널을 돌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그냥 입 다물고 얌전히 흰 공이 날아다니는 걸 지켜봤다. 재미는 없었다. 그의 인생이 언제는 재미있었느냐마는.

주현은 반항적인 아이였고, 자랄수록 더욱 심해졌다.

머리가 자라기 시작한 아이들은 주현이 자신들과는 다르다는 걸 깨달았고, 그것은 따돌림의 원인이 되었다.

주현은 친구 사귀는 데 큰 관심이 없었다. 애초에 그는 아이를 좋아해 본 적도 없다. 오히려 부모에게 사랑받아 통통한 볼 가득 미소를 매달곤 깨끗한 옷을 입은 채 좋은 냄새를 풍기며 걱정 하나 없이 뛰어다니는 아이들은 주현의 역린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는 참는 법을 무척 잘 알고 있었다. 왜 매일 같은 옷을 입냐고 물어도 참았고, 왜 그것도 모르냐고 물어도 참았다. 그의 책상에 낙서가 있거나 냄새난다고 소곤거리는 것도, 키득거리며 비웃는 것도 전부 참았다.

그러나 급식실에서 일부러 주현과 부딪힌 주제에 그가 나가떨어져 식판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자 되레 놀란 표정을 짓는 것은 참지 못했다.

이유는 많았다. 어제 점심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배가 무척 고팠다거나 음식물로 더러워진 옷 때문에 집에 전화해도 그를 데리러 올 사람은 아무도 없다거나.

뭣보다 배가 너무 고파서 모르는 척 한 번 더 배식받을 수 없을까, 하는 비참한 생각을 하게 만든 아이가 너무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선생님들은 더 이상 주현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에게 신경을 써도 돌아오는 것은 노려보는 눈과 괜찮다는 악에 받친 목소리뿐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아이를 때린 주현 때문에 담임이 집에 전화하고, 새아빠에게 망신시키지 말라며 주먹으로 혼난 후 학교에서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반항적인 아이에서 조용한 아이로 바뀌었다. 모든 것을 안으로 삼키기 시작했다. 찌푸린 미간은 펴졌고, 눈은 언제나 바닥을 바라보았다. 누군가가 놀려도 입을 다물고 있으면 금방 물러간다.

사는 건 편해졌는데 행복하지는 않았다. 주현의 나이, 열 살의 일이었다.

* * *

모든 아이는 열두 살 때 검사를 받는다. 에스퍼나 가이드로 발현할지 알 수 있는 검사라고 하는데, 그보다 어릴 때는 측정이 틀리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발현은 보통 열세 살에서 열여섯 살 사이에 한다. 간혹 아주 늦은 나이에 발현하는 사람도 있다고는 하는데 일반적인 일은 아니었다.

가이드는 발현해도 약간의 탈진감 빼고는 별다른 변화가 없지만, 에스퍼의 발현은 특히나 조심해야 했다. 힘을 조절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 탓에 에스퍼로 발현할 가능성이 높은 아이들은 주기적으로 센터에 방문해서 미리 가이딩과 함께 여러 교육을 받는다. 검사는 학교에서 교사의 지도 아래 다 같이 센터에 가서 받고, 통지서는 후에 학교로 보내 준다.

그리고 검사 당일, 주현은 학교에 가지 않았다. 멍든 눈 때문에 새아빠가 가지 말라고 했다.

그는 인구 대부분이 일반인으로 나온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궁금해하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멍이 낫는 건 오래 걸리고, 엄마는 따로 센터에 데려가 검사받겠다고 담임 교사에게 전화했다. 물론 주현은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다.

문득 나비가 보고 싶었다. 노인은 나비를 무릎에 올리고 있을 때면 의자에 앉아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도 그렇게 행복해 보였다.

할머니를 생각하자 다시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주현은 둘 중 누구를 더 원망해야 할지 몰랐다. 작별 인사 한마디 없이 영원히 떠나 버린 할머니와 언제든 돌아올 수 있으면서 결코 돌아오지 않는 나비. 본인의 선택이란 점에서 나비가 더 미웠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가 나비였어도 자신을 쓰레기처럼 내던지는 새아빠가 있는 집에서는 살기 싫었을 것이다. 그 순간 주현은 생각했다.

‘왜 나는 나비가 될 수 없는 걸까.’

* * *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걸 몽땅 집어넣었음에도 가방은 크게 무겁지 않았다.

새아빠의 지갑에 들어 있던 현금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꺼낸 주현은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제 방을 둘러보았다. 또래 아이의 방에 가 본 적은 없으나 이토록 허전하고 텅 비어 있는 건 이상하다는 걸 그도 알고 있다.

가벼운 가방이 신경 쓰여 몇 번 더 방을 돌아다니던 주현은 가방을 더 채우지 못한 채 괜히 멀쩡한 문을 두고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밤공기가 시원하다 생각했으나 사실은 몸이 떨릴 정도로 추웠다. 게다가 무섭기도 했다. 하지만 그걸 인정하기엔 주현은 너무 자존심이 셌다.

녹색 철조망에 손가락을 끼워 기어오르고 남의 집 마당을 몰래 지나기도 했다. 공원 벤치에 누웠을 땐 난생처음 자유롭다고 느꼈다.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가로등 불빛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떠 봤자 보이는 건 별이 몇 개 있지도 않은 검은 하늘뿐이라 감고 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는 빈 지갑을 보고 화를 낼 새아빠를 생각했고, 얼굴 본 지 몇 달은 된 엄마에 대해서도 생각하다 이내 학교에 대해서 생각했다. 생각은 흐름을 타고 거듭되었다.

그를 때리지만 결국 키워 준 새아빠. 미워하지만 낳아 준 엄마. 배우고 싶지만 가르쳐 주지 않는 학교. 더 이상 먹을 수 없는 할머니의 우유나 만질 수 없는 나비의 털. 낡은 이불. 학교 쓰레기통에서 주워 침대 옆에 붙였던 야광별.

전부 다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하니 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주현은 엄마와 새아빠가 그를 찾으리라곤 기대도 하지 않았다. 학교 선생님도 마찬가지다. 그는 주현을 처음 본 순간부터 싫어했다.

주현은 전 재산이 들어 있는 가방을 꼭 끌어안고 잠들기 위해 애썼다. 그를 보호할 수단이 아무것도 없다는 건 불안한 일이었지만, 최소한 사방 어디로든 도망갈 수 있었다. 그 사실을 위안 삼으며 주현은 거리에서의 첫날을 보냈다.

* * *

새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주현은 의외로 거리에서 살아남는 것에 재능이 있었다. 공원 벤치에서 잠을 자고 놀이터 모래밭을 파헤쳐 동전을 주워 먹고 살았다. 덕분에 언제나 꼬질꼬질했지만, 어린 얼굴은 그를 그저 신나게 뛰어논 평범한 아이로 만들어 주었다.

물론 자세히, 오래도록 지켜본다면 그가 집 없는 아이라는 걸 알겠지만 주현에게 그렇게까지 관심 있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생활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계절이 바뀌고 있었고, 아이들이 매일 동전을 떨어뜨리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주현은 나쁜 아이가 되기로 했다. 평생을 눈치 보며 살아온 그는 무척 기민하고 재빨랐고, 더러운 옷 안으로 숨긴 빵과 과자를 들키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역시 동업자의 눈은 속일 수 없었나 보다.

“너, 돈 필요하지?”

주현보다 몇 살 더 많아 보이는 남자아이가 대뜸 다가와 물었다. 나날이 더러워져 가는 몸으로 초코바를 씹어 먹던 주현은 처음에는 고개를 저었다. 그를 경계해서가 아니라, 거지새끼로 보였다는 게 화나서.

남자아이, 성규는 일손이 필요해서 그런 거라며 주현을 살살 달랬다. 초코바를 다 먹었음에도 고픈 배를 느끼던 주현은 눈을 가늘게 뜨며 어떤 일인지 들어 보고 결정한다고 말했다.

“간단해. 가방을 받아서 누군가에게 전달해 주기만 하면 끝나.”

어린아이도 할 수 있는 쉬운 심부름이었지만,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절대로 가방 안을 보거나 훔쳐서 달아나지 말라는 것이었다.

어린 주현이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냄새가 풀풀 풍기다 못해 흘러넘치고 있었다. 힐끗 바라본 성규는 웃고 있었는데, 주현을 바라보며 웃은 사람은 그의 삶에서 너무 적었다.

눈치 빠른 주현은 위험한 일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는 배가 고팠다. 목욕탕이라도 가서 씻고 싶었고, 싸구려 모텔이라도 좋으니 안전한 곳에서 자고 싶었다.

“좋아. 할게.”

그래서 주현은 하겠다고 했다.

네모난 가방은 생각보다 무거웠지만, 부피가 작아서 그리 힘들이지 않고 운반할 수 있었다. 그는 한 시간을 쉬지 않고 걸었다. 미리 받은 돈만으로도 며칠은 걱정 없이 살 수 있었고, 그 기간을 연장할 생각에 신까지 났다.

메모지에 적힌 주소는 어둡고 더러운 골목을 한참이나 들어가야 겨우 나왔다. 주현의 집도 그리 밝은 곳에 있지는 않았지만, 이곳은 차원이 달랐다. 분위기가 차갑고 사람들의 시선이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곳은 생각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어두운 뒷세계의 일부분이었다. 범죄가 끊이지 않고, 사회에서 내쳐진 사람이나 범법자가 모여드는 무자비하고 싸구려 같은 시궁쥐들의 소굴. 사람들은 그곳을 쓰레기장이라 불렀다.

제정신 박힌 사람이라면 결코 스스로 쓰레기장에 발 들이지 않겠으나, 그 누구도 주현에게 위험하다고 말해 주지 않았기에 그는 당당한 발걸음으로 쓰레기장을 쏘다녔다.

그러나 모순되게도 그 덕분에 주현은 어떠한 범죄도 당하지 않고 멀쩡하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지저분한 몰골이 그를 토박이처럼 보이게 했고, 꼿꼿한 목과 등에 멘 수상한 가방으로 누군가의 심부름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한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누가 시킨 것인지 모르는 이상, 섣불리 손대는 것은 쓰레기장에서 자살행위와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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