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55화
마침내 독이 온몸으로 퍼진 듯 남자가 피를 토했다. 바닥으로 떨어진 핏방울이 모래에 엉기며 굳어 갔다.
한쪽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는 남자에 주현은 저도 모르게 남자를 부축했다. 가벼운 떨림을 느꼈는지 남자가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을 흘렸다.
“정말로 안 들어올 거야?”
“……애초에 받아 주지도 않을걸.”
커다란 기침과 함께 몇 번 더 피를 뱉어 낸 남자가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핏기가 사라진 손에 잡혀 나온 것은 작고 네모난 통이었다. 그는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납작한 통을 주현에게로 내밀었다.
“이걸 반란군 본부에 가져다줘. 하다못해 그냥 가지고 있기만이라도 해 줘. 협회 놈들에게 빼앗기지만 않으면 돼. 그럼 언젠가는 사용할 날이 올 테니까.”
누가 봐도 귀찮은 일이었지만, 주현은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대답 없이 통을 손에 쥐었을 뿐임에도 남자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남자가 말해 준 정보들, 정확히는 반란군에 대한 정보는 협회 입장에서 아주 큰 문제일 게 분명했다. 협회의 높으신 분들 생각이 어떨지 잘 알지 못하는 주현이 보기에도 그랬다.
그러나 주현 개인적으로는 사실 반란군에 대해 어떻다고 말할 만큼 관심이 있지는 않았다. 그야 협회든 반란군이든 폭주 에스퍼는 논외 취급할 게 당연하기 때문이다.
별도의 엄중한 관리가 필요한 위험인물. 반란군이 생각하는 미래에는 폭주 에스퍼가 다른 일반적인 에스퍼와 마찬가지로 자유롭게 사는 건 포함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주현의 행동은 오로지 남자에 대한 호의일 뿐이다.
사실 그는 어딘가 차인호를 닮았다. 외모도 겉으로 드러나는 성격도 전혀 다르지만, 주현의 눈을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는 점이나 웃을 때 한쪽 입꼬리를 조금 더 깊게 끌어 올리는 부분이 닮았다.
거기다 주현을 괴물이나 무기가 아닌, 사람 취급하는 모습 또한 무척이나 닮아서 무작정 적이라고 목을 조를 수가 없었다.
“나를 어떻게 믿어?”
바람이 오아시스 위로 지나갔다. 잔잔한 물결이 파동을 만들며 퍼져 나갔다. 후덥지근한 바람은 주현의 마른 볼을 스쳤다. 구둣발에 차여서 아직도 퉁퉁 부어 있는 볼을 물끄러미 보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네가 아니라, 그 녀석을 믿는 거야.”
그 녀석이 누구냐고 묻지는 못했다. 남자가 거친 기침과 함께 쓰러졌기 때문이다.
얼떨결에 남자를 품에 안은 주현이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입술을 짓씹었다. 지금껏 사람을 죽인 적은 많지만 이런 식으로 끝을 기다리는 건 처음이었다. 죄책감이 너무 커서 숨이 막혔다.
“혹시라도 누가 묻거든…… 내가 자살했다고 해.”
거의 속삭이는 목소리였다. 어느새 입술은 파랗게 변했고, 눈에도 생기가 없었다. 무효화해서 독을 치료하기엔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주현은 단검에 독을 묻힌 걸 후회하는지 생각해 보았으나 정확한 답을 알 수 없었다.
“그런 걸 누가 물어?”
“내 동료.”
반란군 동료를 주현이 만날 날이 오기는 할지조차 모르겠지만, 주현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숨이 아주 가늘었다. 본인 때문에 죽어 가는 사람을 두 눈 뜨고 끝까지 지켜보는 건 무척 힘들고 괴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곁에 붙어서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애도였다.
“당신 이름이 뭐야?”
“……도해, 산.”
남자가, 해산이 눈을 감았다. 6월 29일에 주현의 손에 죽은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났다. 그 사실이 죽을 만큼 끔찍하게 느껴졌는지는 모른다. 다만 사는 게 더욱 괴로우니 주현은 계속 숨쉬기로 했다.
* * *
“정말로 아무것도 듣지 못했나?”
“네. 제가 갔을 때는 이미 독에 중독되어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것치곤 임무 시간이 너무 긴 것 같은데.”
“저택 구석에 숨어 있어서 찾느라 시간이 걸렸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 총을 쏘곤 숨을 거뒀습니다.”
거짓말은 쉬지 않고 술술 나왔다.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덕에 더욱 쉽게 나왔을지도 모른다.
“시신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이유를 알고 있나?”
“뭐가 나와야 합니까?”
해산에게서 건네받은 통이 든 주머니가 갑자기 묵직하게 느껴졌다.
주현은 자신이 왜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반란군과 그들의 정체를 알린다면 태석은 크게 만족하겠지만, 주현은 살면서 그의 만족을 바란 적이 한 번도 없다. 그걸 제외하더라도 지금 주현이 하는 행동은 명백한 불복종이자 들키면 두들겨 맞는 정도로 끝나지 않는 사안이다.
어쩌면 게이트 너머에서 그토록 화려한 저택을 봐서 그럴지도 모른다. 어쩌면 해산의 말이 틀린 게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단순한 죄책감 때문일지도 모르고.
“CE-33 너머에서 무엇을 봤지?”
태석의 얼굴은 평온했다. 말을 잘못하면 곧장 주먹을 내지를 사람으로는 결코 보이지 않았다.
“……넓은 사막과 모래밭 말고는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만족스러운 대답인지 태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곧장 내려진 축객령에 주현은 지체 없이 방을 나섰다.
방으로 돌아온 주현은 옷을 갈아입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미 하늘은 새까매진 후라서 앞이 하나도 안 보일 정도로 어두웠다.
눈이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린 그가 베개 밑에서 작은 통을 꺼내 들었다. 조심스럽게 연 상자 안에는 작은 SD 카드가 들어 있었다. 주현은 그것의 이름을 몰랐지만, 아무튼 조금만 잘못 만져도 부서질까 봐 무서울 정도로 작았다.
다시금 통을 닫은 주현이 천장 쪽으로 몸을 돌려 똑바로 누웠다.
이것은 해산의 유품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어쩐지 가슴이 찌릿했다. 그의 가족들은 유품 하나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심지어는 유언조차 모른다.
다들 무슨 말을 했을까? 비명을 질렀을까. 왜 그러냐고 물었을까. 제발 살려달라고 했을까.
이왕이면 죽는지도 모르게 순식간에 죽었기를 바란다.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미친 것 같으면서도 그렇다고 죽을 수는 없어서, 몸을 뒤척인 주현이 비가 그친 뒤의 유난히 밝은 달을 올려다보았다.
내일이면 차인호가 온다. 그의 가이드가 와서 입안도, 옆구리도, 전부 다 치료해 줄 것이다. 주현은 아주 오랜만에 내일을 기대하며 잠들었다.
* * *
“상태가 안 좋아 보이시네요.”
약간 흐린 목요일, 푹신한 의자에 앉은 차인호가 말했다. 수요일에 온다더니 건너뛰고 목요일에 온 차인호는 여전히 부어 있는 주현의 볼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그 손길 하나로 약속을 어긴 것도, 주현의 전화를 받지 않은 것도, 전부 용서되었다.
“그쪽도 만만치 않은데요.”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주현이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차인호는 아주 피곤해 보였다. 눈 밑도 어둡고 안색도 창백했다. 약속을 어긴 것에 대해 퉁명스러운 마음을 품었던 게 미안할 정도였다. 어느 정도 치료된 볼을 확인한 그가 손을 거두었다.
“……어제 아는 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거든요.”
마른세수와 함께 흘러나온 목소리에 주현의 움직임이 멈췄다. 생각보다 심각한 사안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탓이다.
“인망이 두터운 사람이라서 다들 슬퍼하고 있어요. 그만큼 빈자리가 커서 더 바빠지기도 했고요.”
누군가에게 위로를 건네 본 적이 거의 없는 주현이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차인호가 새로 바꾼 테이블은 깨끗하고, 예쁘고, 팔만 뻗어도 건너편에 닿을 정도로 작아서.
“그렇다 해도 개인 사정으로 가이딩을 뛰어넘어서 죄송합니다.”
고개를 든 차인호는 그린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늘도 밀어내는 날인 것 같았다.
황급히 손을 거둬들인 주현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에도 차인호는 입술을 매만지며 그만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전보다 크고 높아진 벽을 내세웠다.
“저희가 이렇게 마주 보고 있는 건 계약서에 따른 일이니까요. 사적인 감정을 끌고 오면 안 되죠.”
너무 티를 냈나? 단순한 계약 이상의 것을 바랐다는 게 들통난 걸까?
“저도, 주현 씨도. 그렇죠?”
주현은 차인호가 왜 전보다 깊은 선을 긋기로 결정했는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 질문 자체가 선을 넘어서는 일이 되리라.
어차피 끝이 정해진 관계를 더욱 짧게 줄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건 그의 특기였고, 상처받지 않은 척하는 것도 무척 잘했고, 원하는 것에서 눈 돌리는 건 살면서 매번 해 온 일이기에 이제 와 못할 것도 없었다.
“네.”
미소도, 분노도, 슬픔도, 감정이 완전히 사라진 얼굴로 폭주 에스퍼가 가이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테이블 위에서 가볍게 꼼지락거리는 차인호의 손가락에 어떤 감정이 담겨 있는지, 주현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