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54화
손바닥에 흥건하게 남아 있는 독을 발견한 주현이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단검을 뽑아 시신의 손바닥에 문질렀다.
“우리 그냥 빨리 해치우자!”
커다란 외침에 검을 집어넣은 주현이 테라스 밖으로 나왔다. 아까 전 주현이 건너온 저택의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던 남자가 피곤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주현도 시간을 끌어 봤자 나아질 게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목에 있는 초커가 그의 생명이 끊겼다는 신호를 보내기 전까지는 어떠한 지원도 오지 않을 것이다. 거기다 옆구리의 상처에선 계속해서 피가 흘러내려 체력도 덩달아 깎이고 있다.
상대의 능력은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했고, 제한 시간은 이쪽에만 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그러나 주현은 폭주한 지 11년이나 된 폭주 에스퍼다. 그동안 훨씬 더 위험한 상황에서도 살아남았다. 설령 살아남지 못한다면, 가족들과 같은 기일을 가지는 것밖에 더 되지 않는다.
물론 그렇게 된다면 주현에겐 일종의 영광이겠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죽을 수는 없었다.
‘우리, 자살만은 하지 말자.’
그 약속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겠다고 맹세했으니까.
휙, 주현이 테라스 아래로 뛰어내렸다. 이번에는 능력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거기서 기다려!”
창문에서 사라진 남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저택 현관을 박차며 달려 나왔다. 주현이 정말로 기다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는지 조금 놀란 듯했던 남자는 이내 웃으며 총을 들었다.
“드디어 포기한 거야?”
“당신 능력, 범위가 어디까지지?”
“뭐?”
“뭔지는 알았어. 어디까지 가능한지는 모르지만.”
처음 대치했을 때부터 희미하게 예상하기는 했으나 아까 전 에스퍼의 시신을 보고 확실하게 알았다. 정확하게는 피만 낭자할 뿐 깨끗한 벽과 바닥을 보고.
죽은 에스퍼의 능력은 독이다. 그것도 사방으로 독을 뿌리며 아군, 적군 할 것 없이 죄다 중독시키는 악질적인 방법으로 싸운다. 그런데 왜 방 안에는 독 한 방울 묻지 않았을까?
“무효화. 맞지?”
남자의 표정은 묘했다. 귀찮으면서도 약간의 흥미로움이 묻어나는 얼굴로 계속하라는 듯 턱짓했다.
“강한 에스퍼가 와서 다행이라는 말도 이해가 돼. 능력이 강할수록 많이 의지하니까 갑자기 쓸 수 없게 되면 당황하겠지. 그런 놈들 쏴 죽이는 건 일도 아니었겠어.”
씨익, 남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다가도 다시금 축 처지는 꼴이 우습기까지 했다.
“어리고. 똑똑하고. 배짱도 있고. 역시 죽기엔 아깝단 말이지.”
“그래도 죽일 거잖아.”
“그래도 죽여야지.”
반란군, 특히 프리 가이딩에 대해 알게 된 이상 남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주현을 죽일 것이다. 그러나 설령 몰랐다고 해도 주현은 남자가 죽든 그가 죽든 둘 중 하나는 꼭 벌어져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이런 극비 임무를 실패하고 살아서 돌아갈 바엔 이곳에서 죽는 게 낫다. 훨씬 인도적인 죽음일 게 분명하니까.
“범위가 궁금하다고 했지?”
능력을 들켰음에도 남자의 여유는 사라지지 않았다. 주현이라도 그랬을 것이다.
“지평선 끝까지.”
“…….”
“내 눈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
거짓말이란 징후는 어디에도 없었다. 남자는 정말로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아까 전 총알이 통하지 않은 것도 남자의 농락이라는 말이다.
“물론 단점도 있지. 능력을 지울 수 있는 사람은 한 번에 한 사람밖에 안 돼. 네가 동료를 데려오지 않아서 다행이야.”
사막의 바람이 눌러쓴 후드를 가볍게 흔들었다. 능력은 완전히 봉쇄됐고, 옆구리에선 여전히 출혈이 있고, 아군은 어디에도 없고. 최악의 상황에 사선 특유의 따끔따끔한 거슬리는 불안감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그러나, 그럼에도 주현은 오늘은 죽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바람도 소망도 아닌, 그저 그렇게 될 거란 예언과 같은 감각이었다. 주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거 알아? 폭주 에스퍼를 가이딩하고 싶어 하는 가이드는 별로 없어.”
“그야 그렇겠지.”
“언제 또 가이딩 받을 수 있을지 몰라서 우리는 최대한 능력을 쓰지 않고 싸우는 법을 배웠다. 한마디로 잔재주가 많다는 말이야.”
“우리?”
그제야 주현이 폭주 에스퍼라는 걸 알아챈 듯 남자의 얼굴이 구겨졌다.
폭주 에스퍼의 손이 옷 아래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끊은 불명예스러운 검이 사막의 태양 아래에 드러났다.
“네 능력은 아무런 리스크도 되지 않아.”
오히려 고맙다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가람처럼 대놓고 강력한 능력은 죽었다 깨어나도 상대하지 못했을 테니까. 능력을 내려놓고 일대일로 목숨을 걸고 싸운다면 솔직히 웬만해선 질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후드 아래로 유일하게 드러난 입매가 씨익 웃었다. 새어 나오기 시작하는 아드레날린에 옆구리의 통증도 점차 잊혔다.
방금까지 웃던 남자의 얼굴이 굳기 시작했다. 잘못 걸렸다는 듯 난처해 보이기도 했다.
오늘만큼은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았는데. 단검을 내지르기 전, 그런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잠, 깐만! 우리 대화 좀 할까?”
“이미 충분히 하지 않았나?”
주현의 단검을 간신히 피한 남자가 바닥을 굴렀다. 곧바로 일어나서 덤벼드는 모습을 보니 육탄전도 제법 훈련한 티가 났다. 그래도 주현의 상대는 되지 않았다. 상대가 에스퍼라는 말에 총을 가져오지 않은 게 실책이었다.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밭이라 움직임이 평소보다 훨씬 둔했지만, 그것은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폭주 에스퍼라고 했지? 그럼 협회에 충성심 따위 없을 거 아냐!”
“시킨 일을 할 뿐이다.”
“그게 말이 안 되는 거라고!”
총구를 밀쳐 총알이 날아오는 걸 막은 주현이 남자에게 단검을 휘둘렀다. 칼을 피하느라 휘청인 남자의 팔을 잡고 바닥으로 내던진 주현은 곧장 그를 걷어찼다.
풍덩! 남자는 오아시스에 빠지고 말았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주현이 뒤따라서 거대한 물웅덩이로 뛰어들었다. 따스한 물이 몸을 적심과 동시에 후드가 벗겨지며 따가운 태양 빛이 눈을 찔렀다.
허리까지 오는 깊이에 중심을 잡기 위해 애쓰던 남자는 주현과 시선을 마주치자마자 어째서인지 아주 놀란 표정을 지었다. 눈이 커다래지고 입이 벌어졌다.
이상하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주현의 단검이 곧장 남자의 볼을 스쳤다. 죽은 에스퍼의 독은 아주 극소량이라도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목숨을 앗아 갈 정도로 치명적이다.
물론 남자는 무효화할 수 있겠지만, 한 번에 한 사람의 능력만 없앨 수 있다면 주현의 능력이 돌아오는 셈이다. 그렇다면 주현이 이긴 것이나 다름없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볼에서 가느다란 핏줄기를 흘린 남자가 멍하게 중얼거렸다.
“그 녀석이 엄청 싸고도는…….”
그러곤 대놓고 커다란 한숨을 내쉬며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도망치는 건가 싶어 잡아 올려도 아무 반응 없이 얌전히 끌려 나오는 게 수상했으나 이미 이긴 승부라 상관없었다.
“내 손에 죽을래, 아니면 중독돼서 죽을래? 항복하고 따라온다는 선택지도 있어.”
그야말로 목숨을 쥐고 흔들고 있음에도 남자는 정신 차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능력을 지우지도 않는지 허공에 들려 오아시스 밖으로 끌려 나온 남자가 모래밭에 누워서 웅얼거렸다.
“하필이면 너야, 하필이면 너…….”
“당신 나 알아?”
“알지 그럼.”
방송을 봤을지도 모른다. <웬즈데이 필름>인지 <게이트 데이트>인지는 모르지만 뭐든 부끄러운 건 같았다. 지금은 임무 중이라며 스스로를 다독여서 감정을 털어 낸 주현이 남자를 심문하기 위해 입을 연 순간이었다.
고뇌하듯 눈을 감고 있던 남자가 번쩍 눈꺼풀을 올리곤 주현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너도 반란군에 들어와라.”
남자의 볼에 난 상처가 까맣게 물들기 시작했다. 괴사하고 있다는 증거로, 얼른 해독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고통이 심할 텐데도 남자의 눈은 경련 한 번 없이 주현만 바라보았다.
“폭주 에스퍼 취급 개 같은 건 모르는 사람이 없어. 반란군에 와서 인간답게 살아.”
“헛소리하지 말고 독부터 무효화해. 진짜 죽고 싶은 거야?”
남자는 멱살을 잡아 드는 손길을 털어 내며 비틀비틀 일어섰다.
“결정했어. 난 여기서 죽는다.”
“……뭐?”
“협회에 끌려가면 고문받고 정보나 술술 불게 될 게 뻔한데 왜 가겠어?”
맞는 말이었다. 그래도 너무 쉽게 자신의 죽음을 입에 담는 모습에 주현의 가슴이 선뜩해졌다. 방금까지만 해도 목숨을 걸고 싸웠는데 정작 상대가 죽을까 봐 걱정한다는 게 대단한 모순이지만, 그렇다고 걱정이 사라지진 않았다.
고문받고 정보를 빼앗길 게 걱정이라면 서로가 살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었다. 주현이 남자를 놓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남자는 살고, 주현은 끔찍한 벌을 받겠지만…… 그래도 높은 확률로 살아남을 터다.
처음 본 사람을 위해 그렇게까지 할 의리는 없지만, 오늘은 가족들의 기일이니까. 웬만해선 살인 따위 하고 싶지 않았다. 거기다 비록 적이라고 해도 남자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걸 확실하게 느낀 탓도 있다.
남자는 그런 주현의 고민을 눈치채곤 슬그머니 웃었다.
“날 풀어 주면 네 입장이 난처해질 거 알아. 난 이미 각오하고 이곳에 온 거야. 어린 녀석에게 감정에 호소해서 살아나는 것만큼 부끄러운 일은 없지.”
“……살 수만 있다면 더한 것도 한다는 인간들이 널렸는데.”
“그런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반란군에 들어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