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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58/161)

폭주 에스퍼 53화

주현은 계단 옆으로 박아 놓은 난간을 손으로 훑으며 밑으로 내려갔다. 파란 하늘과 더욱 새파란 오아시스는 무척 아름다웠지만, 감상할 틈 따위는 없었다.

주현은 깨끗하게 관리되어 있으나 인기척은 없는 저택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정확히는 별장이라고 부르면 딱 맞을 저택들 사이를 천천히 지나던 그는 순간 스쳐 지나간 적의에 곧바로 한 걸음 물러섰다.

1초라도 늦었다면 주현은 그대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위에서 뛰어내린 사람은 에스퍼 제복을 입은 남자였는데, 그는 주현이 피할 것을 예상했는지 아쉽다는 티를 내지 않았다.

“미리 말해 두는데, 네가 네 번째야.”

주현은 말없이 자세를 잡았다. 당장에라도 능력을 쓸 수 있도록 손끝에 힘을 주었지만 남자는 개의치 않았다.

“날 죽이러 온 에스퍼 말이야.”

“세 명은 어디 있지?”

“근처에 있어. 시체 끌고 다니는 취미는 없어서.”

조금 더 경계를 올린 주현이 여유로운 남자의 태도를 의심스럽게 생각하며 어떤 공격이라도 반응할 수 있도록 온몸을 긴장했다. 세 명을 죽였다는 게 거짓말은 아닌지, 남자의 몸에는 핏자국과 모래 먼지가 잔뜩 묻어 있었다.

그냥 죽이는 게 다라면 당장에라도 달려들었겠지만, 임무에는 정보를 빼내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내심 한숨을 내쉰 주현이 남자의 말에 집중했다.

“높으신 분들도 애가 탔는지, 하나같이 대단한 에스퍼들을 보냈더라고. 그래서 다행이었지.”

“어째서?”

남자가 씨익 웃었다. 30대 초반 정도 되었나 싶은 얼굴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능력이 강할수록 방심이 크거든.”

어쩌면 상대의 능력을 카운터 치는 능력일지도 모른다. 일단 정보를 더 모으기로 결정한 주현이 대화를 잇기 위해 입을 열었다.

“듣기로는 네가 배신했다고 하던데?”

“배신이라니. 애초부터 협회 소속이 아니었던 거지. 집으로 돌아가는 게 어떻게 배신이겠어?”

“집이 어디길래?”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은 남자가 뒷짐을 지며 주현에게서 돌아섰다.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여기를 봐. 뭐라고 생각해?”

넓게 펼쳐진 팔이 사방을 가리켰다. 아름다운 오아시스와 늘어선 저택들. 돈 있는 이들의 휴양지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곳이 게이트 너머만 아니었다면 이렇게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뻔하지. 협회 고위급 임원과 부자들의 놀이터다.”

“…….”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에스퍼는 죽어라 구르고 일반인은 근처만 어슬렁거려도 체포되는 게 게이트인데, 부자들은 개인 별장까지 짓고 멋대로 게이트를 사용한다는 게?”

화가 안 난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주현은 이미 오래전에 인생에서 일어나는 불합리함에 체념했다. 이제 와 하나 더 늘어난다고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 지르진 않는다는 뜻이다.

“내 집은 이런 놈들을 처단하려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목소리엔 자랑스러움이 가득했다. 어깨를 펴며 당당하게 외치는 남자는 자신이 하는 일에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사람을 설득하는 건 힘든 일이다. 주현은 남자를 회유한다는 선택지를 머릿속에서 지웠다.

“이곳의 영상을 가져가서 사람들에게 알리는 게 우리 계획이다. 돈을 받고 제 것인 양 부자들에게 게이트를 내주는 협회. 얼마나 재미있는 기사야.”

협회에서 눈에 불을 켜고 이 남자를 죽이려는 이유가 밝혀졌다.

세금 일부는 괴물에게서 지켜 준다는 명목으로 부과하는데, 부자들의 놀이터를 정리하고 점검하는 데 쓰였다는 걸 알게 되면 난리가 날 것이다. 그러면서도 많은 에스퍼를 CE-33으로 보내지 못한 이유는 이곳의 정보가 빠져나가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돌아가서 주인님에게 칭찬받으려나? 응? 협회의 개야?”

“아직 모자라. 개껌이라도 하나 받을 수 있게 좀 더 말해 줘.”

“자존심이라곤 없는 모양이군.”

남자가 품에서 권총을 꺼내 들었다. 주현을 가리키는 총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미안하지만 넌 못 돌아가.”

괴물이 아닌 같은 인간을 상대하는 것은 언제나 싫은 일이다. 특히 오늘은 더더욱. 폭주 에스퍼의 붉은 눈동자가 후드 아래에서 빛났다.

“왜 주절주절 말해 줬는지 알아? 내 마음이 약해져서 너를 돌려보내고 싶어지는 걸 막기 위해서야.”

“정보를 인질로 내걸었다는 건가? 그렇다기엔 이미 협회에서 알고 있을 내용 같은데.”

어깨를 으쓱인 남자가 방아쇠를 당겼다. 미리 쳐 놓았던 방어막에 공격이 막혔지만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점점 더 남자의 능력이 수상해지고 있었다.

“몇 살이야?”

“……스물다섯.”

이쪽의 정보는 최대한 숨기는 게 좋지만, 얻기 위해서는 주는 것도 있어야 상대의 마음속 장벽을 낮출 수 있다.

“어려. 이런 곳에서 죽기엔 너무 어리잖아.”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 남자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눈까지 감은 채 한참을 말이 없던 남자가 돌연 고개를 들었다. 새까만 눈동자가 오아시스를 비추는 뜨거운 햇볕을 반사했다.

“난 반란군이다.”

“반란군?”

“우리 반란군은 봉사 단체의 탈을 쓰고 활동하지. 너도 들어 봤을 거야. 프리 가이딩.”

프리 가이딩은 에스퍼와 가이드의 인권을 위해 활동하는 가장 큰 봉사 단체 중 하나였다. TV 광고에도 자주 나오는데, 적어도 이틀에 한 번은 보는 단체였다.

생각보다 반란군의 규모가 컸다. 거기다 일부 고위 임원이 그 단체에서 반란군으로 활동한다면? 사태가 제법 커진다.

그러나 지금 당장 걱정해야 할 것은 반란군이 아니다.

주현은 남자가 굳이 그런 큰 정보를 선뜻 내준 이유를 알고 있다. 마음이 약해져서 주현을 죽일 때 망설이지 않기 위해서. 확실하게 널 살해하겠다는 뜻이다.

“이제 너에 대해서도 말해 보지 않을래? 이름이라든가, 싸우기도 전부터 얼굴이 피범벅인 이유라든가? 개한테 입술을 물리기라도 했어?”

주현은 대답하지 않으며 능력을 날카로운 송곳 형태로 만들어 남자를 향해 내질렀다.

“……!”

이윽고 주현의 눈이 커다래졌다. 투명한 송곳은 남자에게 꽂히지 않았다. 어딘가에 막히거나 피한 게 아닌, 말 그대로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놀랐어?”

탕,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한번 총알이 날아왔다. 이번에도 주현의 방어막에 막혔지만 남자는 계속해서 방아쇠를 당기며 주현을 향해 걸어왔다.

“능력은…… 염동력 계열? 좋지. 강하고. 쓸모도 많고.”

남자가 총알을 장전하는 틈을 타서 몇 번이고 공격했으나 번번이 사라졌다.

‘일정 범위로 들어가면 공격이 통하지 않는 능력인가?’

그렇다면 물리적인 공격까지도 막을지 모른다. 까다로운 능력에 주현이 혀를 찼다. 장전을 끝낸 남자가 총을 들었고, 주현은 익숙하게 방어막을 세웠다.

“뭐, 나한테는 소용없지만.”

탕. 사막의 바람을 가르며 총알이 다시금 날아왔다.

주현이 살아 있는 유일한 이유는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전장을 떠돌며 갈고닦은 직감 덕분이다. 꿀렁거리며 피가 흘러나오는 옆구리를 움켜쥔 주현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상황이 안 좋았다. 상대의 능력은 너무나도 성가시고, 공격은 하나도 안 통하는데, 주현은 벌써 제법 큰 부상을 입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총알이 몸에 남아 있지 않고 관통했다는 사실이다.

총상은 언제 입어도 적응되지 않는다. 심지어 아직 아드레날린이 나오지도 않은 상태라서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안 피했으면 덜 아팠을 텐데. 이번에는 피하지 마.”

“원래 그렇게 말이 많나?”

“말하라고 달린 입인데 다물고 있어서 뭐에 쓰겠어?”

총구가 주현을 똑바로 가리켰다. 방벽이 사라지는 타이밍을 모르기에 지금 상태로 싸우는 것은 자살과 다름없었다.

판단을 빠르게 끝낸 주현은 곧장 뒤돌아 바로 옆에 있던 저택 창문으로 뛰어들었다.

“나 술래잡기할 시간 없어!”

뒤에서 남자가 소리치는 게 들렸으나 그런 말에 멈춰 설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예쁘게 꾸며진 집을 둘러볼 새도 없이 2층으로 올라가서 문을 닫은 주현이 푹신한 이불을 찢었다. 후드를 걷어 강하게 동여맸으니 조금 정도는 시간을 벌어 줄 것이다.

“나 정말로 바쁘거든? 형님이 갈 길이 멀어요. 그냥 순순히 나오지 않을래?”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얼른 죽으러 나오라 회유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현은 조용히 창문을 열어 아슬아슬하게 기어올라 지붕 위로 올라갔다. 능력을 사용하면 편하겠지만 싸움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이상 아끼는 게 최선이었다.

높은 곳에서 보는 광경은 아래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 바람에 표면이 일렁이는 오아시스. 파란 점박이가 있는 코코넛이 달린 야자수. 그 너머로 펼쳐진 모래.

게이트 입구와 오아시스를 둘러싸는 형태로 세워진, 최소 10m는 넘을 높이의 단단한 강철 철조망만 아니었다면 더욱 아름답다 여겼을 것이다.

물론 감탄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주현은 발끝에만 간단히 능력을 사용해서 옆에 있는 저택으로 건너갔다. 테라스를 통해 집 안으로 들어간 주현은 곧바로 눈에 들어온 광경에 눈썹을 찌푸렸다.

가슴팍에 뚫린 구멍으로 아직도 마르지 않은 피를 흘리고 있는 이는 주현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예전에 두어 번 임무를 함께한 적 있는 에스퍼였다. 독을 사용하는 능력을 가진 그는 유독 주현을 싫어해서 대놓고 괴롭혔다.

썩 호감 있는 사람은 아니어도 죽은 게 기쁜 정도는 아니어서 주현은 가볍게 애도한 후 시신을 살폈다. 가슴을 꿰뚫은 총알 말고 다른 상처는 없었다. 성격은 나빠도 실력은 있는 에스퍼였음에도 저항다운 저항조차 못 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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