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52화
두 사람이 돌아가고 멀어지는 차를 배웅하던 주현에게 차인호가 가까이 다가왔다.
“아이를 좋아하시나 봐요?”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표정이 부드럽길래요.”
무의식적으로 입꼬리를 매만진 주현이 어느새 저물어 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조금 있으면 하늘은 온통 그가 아주 싫어하는 붉은색으로 물들 것이다.
“어릴 때 아이들과 부대끼며 살았습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지만…….”
처음으로 타인에게 말하는 추억이다. 떠올리기만 해도 너무 아파서 숨쉬기가 힘들 정도라 감히 입에 담을 수도 없었다. 여전히 아프지만, 그때의 즐겁고 행복했던 감정도 함께 떠올랐다. 가이딩은 마음의 상처에도 효과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주현의 눈이 그리움으로 가늘어졌다.
“그거 신기하네요. 저도 그랬는데.”
의외의 사실이었다. 좋은 집에서 사랑받으며 자랐을 거라고 지레짐작했던 주현이 차인호와 시선을 맞췄다.
“그랬습니까?”
“네. 가족이 잔뜩 있었어요. 비록 피는 한 방울도 안 이어졌지만.”
희미하게 끊어진 말끝에서 주현은 많은 걸 읽을 수 있었다.
눈을 내리깐 채 무언가를 생각하던 차인호가 얼굴을 들었다. 그러곤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깨끗하게 웃었다. 화면 너머에서 보던 만들어 낸 미소에 주현은 저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이만 돌아가죠.”
그 말이 왜 그리도 멀게 들렸는지, 주현은 모른다.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 기억을 되짚어 보아도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남들이 본다면 차인호의 기분이 가라앉았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눈칫밥 먹으며 자란 주현에겐 훤히 보였다.
각자의 차로 가는 길엔 정적이 이어졌다. 갑자기 왜 그러는 건지 이유라도 묻고 싶었으나 주현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다음 주 수요일에 갈게요. 화요일엔 일이 있어서요.”
차인호는 C동에 화요일과 금요일에 자주 온다. 본인 말로는 유독 두 요일에 일정이 비어서 그렇다고 하는데, 사실 주현이 너무 오래 기다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물론 추측이 틀렸을지도 모르니 직접적으로 말해 본 적은 없다.
“알겠습니다.”
차에 올라타기 위해 몸을 돌린 차인호는 어째서인지 그대로 멈췄다. 손잡이에 손을 대곤 서서 기절한 사람처럼 그냥 그렇게.
말을 걸까 고민하던 찰나, 그가 돌아섰다. 노을에 잠긴 탓인지 조금 울 것같이 보이기도 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주현 씨는 화요일에 일정 없나요?”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대답하지 못할 것도 없기에 주현은 선선히 입술을 움직였다.
“아직은 정해진 임무가 없습니다.”
사실 일부러 얼마 있지도 않은 휴가를 써 가며 그날을 통째로 비워 두었지만, 차인호가 알 필요는 없다.
“아……. 그런가요.”
묘하게 실망한 듯한 어조였다. 주현이 입을 열기도 전에 다시금 정돈된 미소를 지은 그가 차 문을 열었다.
“저 먼저 가 보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러곤 대답도 듣지 않고 떠나는 그가 조금 수상쩍었지만, 그렇다고 붙잡아서 따져 물을 수는 없었다.
선명하게 그어진 선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차인호는 늘 그랬다. 가까이 다가오다가도 돌아서고, 그러다 또 곁으로 온다. 오늘은 멀어지는 날인 듯했다.
한숨을 삼킨 주현이 경적을 눌러 대는 차에 올라탔다.
* * *
톡, 토도독. 주현은 마치 손톱 끝으로 유리를 두드리는 것 같은 소리에 잠에서 깼다. 낡은 시계는 오전 일곱 시가 넘었다고 알리고 있음에도 하늘은 먹구름 때문에 무척 어두웠다.
마치 몸살감기라도 걸린 듯 온몸이 무겁고 피곤했다. 평소라면 눈 뜨자마자 벌떡 일어났을 주현은 수십 분 동안 뒤척이고 나서야 겨우 침대를 벗어날 수 있었다.
주현은 비척거리며 방에 딸린 화장실로 들어갔다. 개인의 편의를 위해서가 아닌, 각자의 방을 감금을 위한 독방으로도 사용하기 위해 설치되어 있는 화장실이라 작고 볼품없지만 그래도 불편하지는 않았다.
모서리 부분에 금이 간 거울 앞에 선 주현은 오늘따라 더욱 붉게 느껴지는 제 눈을 차마 마주 보지 못했다.
차가운 물로 몇 번이고 세수했음에도 멍한 머리는 맑아지지 않았다. 에스퍼가 감기에 걸렸다는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6월 29일. 오늘은 주현이 폭주한 날이다. 11년 전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 전부 다 죽은 날이기도 하다.
쾅! 폭주 에스퍼의 주먹이 거울 옆 회색 벽을 강하게 때렸다. 이미 몇 번이나 그래 왔기에 흔적은 남았을지언정 벽은 부서지지 않았다. 대신, 주먹에서 피가 송골송골 배어 나왔다.
하지만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더 아팠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내일이면 가이드가 온다. 주현의 매칭 가이드는 상처 하나하나 전부 다 따지며 눈썹을 찡그리기 때문에 더 다칠 수는 없었다.
깊게 숨을 내쉰 주현이 고개를 들었다. 악마 같은 붉은 눈은 여전히 반짝이며 그를 깔보고 있었다.
* * *
C동 에스퍼들은 서로에게 자신이 폭주한 날을 딱히 알려 주지 않는다. 좋은 일도 아니고, 애초에 먼저 C동에 들어온 이들은 말하지 않아도 알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주현은 현재 동료들이 언제 폭주했는지 한 명 한 명 전부 다 알고 있다. 그들 또한 주현이 딱히 말해 준 적 없음에도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렇게 티가 나나 싶어 부끄럽다가도 달리 무어라 말하는 것조차 기운이 빠져서 주현은 침대에 웅크리고 멍하게 허공을 응시했다.
아까 전 채경이 가져다준 도시락이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지만 먹고 싶지 않았다. 쏟아지는 빗물이 폐 속으로 밀어닥쳐 그대로 영원히 숨을 멈추고 싶다가도 그건 너무 편한 죽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열세 명. 그날 주현의 손에 죽은 사람의 숫자다. 애초에 그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살아 있었을 사람들. 애초에 신주현이 혼자 살다 뒈져 버렸다면 지금쯤 행복하게 인생을 살아 나갔을 사람들.
‘애초에 내가…….’
사고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주현의 목에 찌릿한 전기가 통했기 때문이다.
평소보다 훨씬 느린 속도로 일어난 주현이 몸에 박인 손길로 옷을 갈아입었다. 오늘은 쉬겠다고 미리 신청서를 냈지만 폭주 에스퍼의 의사보단 임무가 훨씬 더 중요하다.
여전히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처럼 멍하지만 애써 표정을 갈무리한 주현이 집무실로 들어섰다. 그리고 곧장 날아온 발길질에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대로 한 번 더 날아온 단단한 밑창 때문에 입술은 물론이거니와 볼 안쪽 살도 심하게 찢어지고 말았다.
“어디서 뭘 하고 있었길래 이렇게 늦은 거지? 오늘은 훈련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죄송합니다.”
벌떡 일어난 주현이 코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닦지 않으며 고개 숙였다.
강하게 혀를 찬 태석이 휙 돌아서서 커다란 책상으로 걸어갔다. 체벌이 빨리 끝난 걸 보니 상당히 바쁜 일인 것 같았다.
“지금 당장 CE-33 게이트로 가라. 그곳에 침입한 자가 있다.”
“침입이라면 일반인입니까?”
“아니. 에스퍼다.”
주현의 미간이 티 나지 않게 구겨졌다. 에스퍼가 게이트에 들어간 게 왜 긴급한 일이란 말인가. 임무를 받지 않고 게이트에 들어가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설사 그렇다 해도 딱히 해가 될 일은 없다.
“협회를 배신한 에스퍼지.”
화가 난 듯 이를 악문 태석이 눈에 힘을 주고 주현을 노려보았다.
“잡아서 정보를 빼내고, 상황이 여의찮다면 죽여라.”
“……에스퍼를 말입니까?”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해야 알아듣는 건가?”
여기서 잘못 말하면 태석의 화가 풀릴 때까지 굴려질 것이다. 평소라면 사양이지만 오늘만큼은 죽도록 두들겨 맞고 싶었다. 너무 아파서 아무 생각도 못 할 정도로. 아주 조금이라도 죗값을 치르기 위해.
그러나 정말로 급한지 태석은 주현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그를 쫓아냈다.
1층으로 내려온 주현은 운전사가 내미는 옷을 받아 들었다. 새까만 후드티를 보고 있으니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오늘만큼은 묵묵하게 쓰라린 슬픔을 곱씹으며 주현은 차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 * *
CE-33은 특이하게도 잘 깔린 도로 끝에 있었다. 정확히는 도로를 달리다 철조망이 쳐진 검문소를 두 개나 지나 조금 더 들어가면 있었다. 게이트 입구 주변에는 넓은 주차장도 있었다. 거대한 천으로 커튼처럼 가려 놓은 입구는 다른 게이트보다 확연히 커다란 크기였다.
일반적인 게이트와는 완전히 다른 환경에 절로 어깨가 긴장으로 굳었다. 마지막으로 무기를 점검한 주현이 후드를 뒤집어쓰곤 게이트로 들어섰다.
들어가자마자 건조하면서도 따뜻한 바람이 볼을 스치며 지나갔다. 사방에는 모래가 가득했다.
전형적인 사막 형태의 게이트지만 눈에 띄는 부분이 있었다. 게이트를 넘자마자 그 아래에 깨끗하게 잘린 돌이 놓여 있다는 점이다. 돌계단은 정면에서 이어졌는데, 누가 봐도 사람이 만든 모양새였다.
주변을 살피며 마지막 계단 위로 올라선 주현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말았다. 내려가는 계단이 쭉 펼쳐져 있고, 그 아래에 말 그대로의 낙원이 있었던 까닭이다.
거대한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줄줄이 이어진 아름다운 저택들, 휴양지에서나 볼 법한 선베드, 다이빙대 등등. 저 멀리 아주 높게 쳐진 철조망이 아니었다면 게이트 너머가 아니라고 착각할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