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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56/161)

폭주 에스퍼 51화

“……삼촌이 더 맞지 않을까? 나 네 나이 두 배가 넘는데.”

한참을 망설이던 주현이 간신히 뱉은 말이었다. 매칭 어쩌고저쩌고하는 부분은 차마 건들지도 못했다.

“형이면 돼요. 아무튼 알았죠?”

그러고는 주현의 손을 덥석 잡았는데, 부드럽지는 않으나 아주 따뜻한 온기에 폭주 에스퍼가 멈칫했다. 아이의 손을 잡는 건 그야말로 11년 만이었다.

미희조차 어쩌지 못하고 망설이던 상황에서 나선 사람은 차인호였다. 그리 강하진 않지만 단호한 손길로 우주의 손을 털어 낸 그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아이와 시선을 맞췄다.

“꼬맹아.”

“우주.”

“아가야. 이 형아는 형이랑 이미 매칭했어. 아까 못 들었니? 내 매칭 에스퍼라고 했는데.”

“언제든지 끊을 수 있는 거잖아요.”

또박또박 말하는 모습이 기특했다. 말의 내용만 아니었다면 정말로 그랬을 것이다.

“그리 간단한 게 아니야. 그리고 애초에 열여덟 살 미만은 매칭 못 해. 6년은 더 남았네.”

“다른 사람 이름 올려놓고 저랑 하면 되는 거잖아요. 누가 신경 써요? 하루에 처리하는 서류가 수천 개일 텐데.”

아이치곤 구체적이고도 현실적인 범죄 모의였다. 차인호도 그것을 느꼈는지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가 우주의 어깨를 잡으려는 듯 손을 뻗었고, 반사적인 움직임으로 우주가 움찔거렸다. 차인호는 아주 자연스럽게 손을 내렸다.

“일반적인 에스퍼면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이 형은 그게 안 돼.”

“왜요?”

“왜냐하면 나는 폭주 에스퍼거든.”

세 사람의 시선이 주현에게 쏠렸다. 천천히 몸을 낮춘 주현이 우주의 마른 얼굴을 올곧게 응시했다.

주현은 자신이 상당히 위협적인 인상이라는 걸 알고 있다. 차인호처럼 착하게 생긴 것도 아니고, 미소를 자주 짓는 것도 아니니까. 더군다나 머리카락만으로는 가려지지 않는 붉은 눈동자는 늘 검은색만 봐 온 사람들에게 위화감과 두려움을 준다.

“알아?”

그런 주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우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소한 아이는 주현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네가 옆에 있기엔 너무 무서운 사람이야.”

“형은 저랑 별이를 구해 줬는데 왜 무섭겠어요.”

나이보다 훨씬 작은 몸을 가지고, 나이보다 훨씬 깊은 눈을 한 우주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에 멈칫한 주현이 입을 다물자 우주의 시선이 옆에 있던 인호에게로 옮겨 갔다.

“그리고 이 삼촌이랑은 매칭했다면서요. 무서운데 어떻게 했어요?”

어른의 사정을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고민이 길어지기도 전, 옆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너랑 같아.”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차인호는 다시 한번 우주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우주는 움찔했으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조금이나마 익숙해진 어른이라서인지, 혹은 그 미소가 너무나도 따뜻해서인지 주현은 알 수 없었다.

“그럼 지금은 보호소에서 지내는 거네요?”

“그렇죠. 성인이 될 때까지 그럴 거예요.”

“……잘됐네요.”

부드러운 대답에 미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차인호와 놀고 있는 우주를 바라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우주는 유일한 보호자였던 삼촌이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이 끊긴 후로 쓰레기장에서 별이와 둘이서 살았다고 한다.

가이드, 그것도 상당히 높은 등급으로 발현할 가능성이 큰 우주는 별과 함께 협회에서 운영하는 보호소에서 살게 되었다. 그동안 소매치기 등으로 끼니를 해결하던 아이들은 심각한 영양실조 상태였고, 무엇보다 트라우마가 깊었다.

타인을 믿지 못하고 버려질 것을 두려워했다. 폭력을 무서워하면서도 쉽사리 순응하기도 했다.

그런 두 아이를 미희가 돌보며 조금씩이나마 가까워지던 찰나에 우주가 처음으로 한 부탁이 바로 주현을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눈앞에서 괴물과 싸우는 모습이 무서웠을 텐데도 우주는 주현에게 정을 붙인 듯했다.

“착한 아이예요.”

미희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차인호 앞에 쪼그려 앉아 나뭇가지로 바닥에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너무나도 작았다. 차인호가 다른 나뭇가지로 바닥을 긁자 아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제야 좀 나이와 맞게 보였다.

“타인에게 대가 없이 무언가를 받아 본 적이 없어서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주머니에 손을 넣고 라이터를 만지작거리던 주현이 자리를 털며 일어났다.

“잘 압니다. 무슨 기분인지.”

그리고 주현은 우주의 생각이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을 거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아이는 오랜 시간을 보호받지 못하고 발버둥 치며 살아왔다. 매일매일 조금씩 쌓였을 생각과 감정이 괜찮다는 말 몇 마디에 사라질 리가 없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몰라도 의심스럽다는 듯 가늘어진 눈으로 차인호를 바라보던 우주가 문득 주현과 눈이 마주쳤다. 쭈뼛거리면서도 슬며시 미소 짓는 얼굴이 무척 사랑스러워서 주현은 저도 모르게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형! 이 아저씨가 자기가 연예인이라고 하는데 진짜예요?”

물론 우주가 집에 TV를 가지고 있거나 영화관에 가 봤을 리는 없다.

“너 아까는 나보고 삼촌이라더니 지금은 또 아저씨야? 이 형은 형이면서?”

장난기가 은근히 서려 있는 말이었음에도 위협으로 느꼈는지 우주가 벌떡 일어나더니 차인호에게서 멀어졌다. 문제는 그렇게 도망간 곳이 주현의 뒤라는 사실이다. 에스퍼 특유의 검은색 제복을 꼭 잡은 우주가 고개를 빼꼼 내밀어 차인호를 살폈다.

“그거야 우주 마음이죠.”

“이런, 주현 씨까지 배신할 줄이야.”

차인호가 고개를 내저었지만,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주현이 변호해 줄지 몰랐다는 듯 우주의 시선에는 놀람이 선명하게 담겨 있었다. 고작해야 이런 말 한마디로 놀라는 아이가 너무나도 안쓰러워서, 주현은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우주의 어깨를 토닥였다.

우주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멀어져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 이토록 살갑게 다가오는 아이는 11년 만에 처음이라서. 하필이면 그 아이가 과거를 떠올리게 해서. 우주의 눈에는 반짝이는 희망이 담겨 있다. 주현은 어른으로서 차마 그 빛을 꺼뜨릴 수가 없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주현은 미희에게서 보호소 전화번호를 얻었다. 그녀 또한 주현이 가끔이라도 전화 걸어 준다면 아이들이 아주 기뻐할 거라며 웃었다. 처음엔 무서워하더니 이젠 그의 곁에서도 편안하게 웃는 얼굴에 주현은 은근슬쩍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친해졌는지 차인호의 곁에서 종알거리던 우주는 미희의 손짓에 얌전히 돌아갈 준비를 했다. 티는 안 나지만 흐뭇하게 그 모습을 보던 주현이 입을 열었다.

“우주야. 삼촌한테 지갑 돌려줘.”

눈을 동그랗게 뜬 차인호가 주머니를 뒤적였다. 물론 지갑은 나오지 않았다.

“언제 가져간 거야? 전혀 몰랐어.”

“들키면 맞아 죽는데 당연히 몰라야죠.”

우주가 지갑을 던졌고, 가볍게 잡아챈 차인호는 재밌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어머! 죄송해요. 우주야, 훔치는 건 나쁜 거라고 했지?”

“……죄송합니다.”

불퉁한 표정으로 고개를 꾸벅이는 우주는 자신이 왜 사과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게 분명했다. 살기 위해 훔쳐야 했던 아이는 죄책감을 느낄 틈도 없었을 것이다.

주현은 그게 어떤 기분인지 알고 있다. 물론 알고말고. 폭주 에스퍼가 또래에 비해 지나치게 작은 아이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작고 가는 어깨는 무언가를 생각나게 한다. 눈을 감았다 뜬 주현이 단호하고도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갈 곳이 없어지면 나한테 말해. 너랑 별이 굶기지는 않을 테니까.”

에스퍼는 등급과 임무의 위험도, 그리고 성공한 임무의 양에 따라 지급되는 액수가 달라진다.

주현은 폭주 에스퍼고, 따라서 온갖 위험하고 거지 같은 임무를 수도 없이 처리한다. 비록 상당한 부분을 기부란 목적으로 뜯기지만 그동안 모아 온 정도면 아이 두 명 먹여 살리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곁에서 일상을 함께하며 지켜 주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물질적인 부분은 채워 줄 수 있다는 말이다.

미희의 표정이 굳어졌다. 성인이 될 때까지 보호소에서 살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왜 그런 말을 한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이었다.

“……정말로요?”

“난 거짓말 안 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머뭇거리던 우주가 돌연 인상을 찌푸렸다. 눈썹이 구겨지고, 이를 꽉 깨물고. 상대를 위협하는 살쾡이 같은 모습은 쓰레기장의 전형적인 방어기제였다.

“왜요? 왜 우리를 그렇게 신경 써요?”

어른으로서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말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우주의 인생에서 당연한 건 없었을 테니까. 그래서 주현은 우주가 이해하지는 못해도 납득은 할 변명을 뱉었다.

“내가 살린 목숨이니까 책임져야지.”

만약 그 시간에 주현이 없었다면 별이는 몰라도 우주는 분명 죽었으리라. 이렇게나 어린 목숨이 이유 없이 스러질 뻔했다는 사실에 새삼스럽게 가슴이 서늘해졌다.

물론 우주는 아무리 사고를 쳐도 웬만해서는 보호소에서 계속 살 수 있다. 그러니 주현의 말은 보험과도 같다. 지금 얻은 아늑한 집과 충분한 음식이 사라질까 봐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믿음을 주기 위해 한 말인 셈이다.

이런 확신이 얼마나 큰 안도를 주는지, 결핍이 없는 사람은 결코 알지 못한다.

이제 우주의 마음속 빚은 주현의 것이 되었다. 그걸 알아챈 듯 아이의 입술이 벌어졌다.

우주는 깊은 고민 끝에 팔을 뻗어 주현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순식간에 물러난 아이의 볼은 복숭아처럼 예쁘게 물들어 있었다. 처음 만난 날처럼 강한 힘으로 끌어안은 건 아니지만 그 온기만큼은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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