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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55/161)

폭주 에스퍼 50화

“고마워요. 생각도 못 한 선물 감사합니다.”

살면서 타인의 감사를 받을 일이 거의 없던 주현은 입술을 달싹이다 고개를 숙였다. 희미하게 끄덕이는 고갯짓을 차인호가 봤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머리 위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으니 본 게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C동 가이딩 룸의 의자가 바뀐 후로 달라진 건 없다. 그저 의자를 따르듯 테이블이 바뀌고, 지나치게 푹신한 쿠션을 껴안은 탓인지 그곳에 앉아 있으면 묘한 초조가 주현을 스치는 것밖엔.

“혹시 가공해도 될까요?”

차인호가 앞에 있으면 이상하게 체온이 올라서 목덜미가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 말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마음대로 하세요. 이제 그쪽 건데.”

부드러운 미소를 힐끗 본 주현이 습관적으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앞니에 잘근잘근 씹히는 입술이 아플 만도 했지만, 자꾸만 입이 심심해서 저도 모르게 나오는 행동이었다.

주머니에 들어 있는 담배를 만지작거리던 주현은 체온보다 먼저 가이딩을 느꼈다. 훅 다가온 차인호의 손을 뿌리치지 않은 유일한 이유는 익숙한 가이딩 때문이다.

엄지로 가볍게 눌러 주현의 앞니에서 아랫입술을 구해 낸 차인호가 씨익 웃었다. 그의 미소는 달라지지 않았는데,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일정하게 아름다웠음에도 최근에는 주현의 심장박동을 좀 더 빠르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입술에 상처 나잖아요.”

테이블을 작은 것으로 바꾼 일의 폐해라고 할 수 있었다. 가볍게 뻗었던 팔을 도로 잡아당긴 차인호는 조금의 쑥스러움도 없어 보였다.

상처가 나면 당신이 치료해 주면 되는 거 아니냐고. 차마 주현은 그 말을 하지 못했다. 차인호의 손에 담긴 보석이 반짝이고, 햇살을 비춘 유리 테이블이 빛나고, 차인호의 미소 또한 그렇고.

열이 오를 정도로 눈이 아파서 폭주 에스퍼는 말없이 눈꺼풀을 내렸다. 평범한 화요일이었다.

* * *

“네가 만날 사람이 있다.”

스도쿠에 집중하며 툭 말을 뱉은 두식이 펜 끝으로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그 앞에서 양손을 등 뒤에 둔 채 꼿꼿이 서 있던 주현이 티 나지 않을 정도로 눈썹을 씰룩였다.

“얼마나 귀찮게 하는지, 안 된다고 해도 꼭 만나야겠다며 성화라고 난리가 났다지 뭔가. 하필이면 SS급 가이드의 눈에 띈 녀석이라 그냥 무시할 수가 없구먼.”

“그게 누굽니까?”

“이름이 뭐더라?”

떠올릴 생각조차 없는 게 확실했다. 숫자에 집중한 두식이 잘 풀리지 않는지 손끝으로 책상을 톡톡톡 두드렸다.

“아무튼 가 봐. 적당히 대하면 될 테니.”

“네.”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적당히 대하는 게 가능하겠냐고 따지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른 주현이 짧게 대답했다. 미리 준비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는 사람이니 분명 지금 당장 출발해야 할 것이다.

속으로 한숨을 내쉰 주현이 돌아서서 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이 닫히고, 마침내 딱 맞는 숫자를 알아낸 두식이 펜을 끄적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애들이랑 친한 모습 보여서 나쁠 거 없겠지.”

자동차는 제법 오랜 시간을 달렸다. 주현은 대부분의 상처를 회복했지만, 아직 왼팔에는 깁스를 차고 있었다. 다리와 복부의 상처가 특히 심했기에 그곳을 치료하는 데 가이딩을 집중하다 보니 비교적 상황이 괜찮은 팔은 뒷전이 된 탓이다.

물론 일반적인 매칭 관계처럼 깊은 스킨십을 하거나 관계를 가진다면 훨씬 빠르게 낫겠지만, 두 사람에겐 해당하지 않는 일이다. 신주현과 차인호가 한 가장 깊은 스킨십은 기껏해야 포옹이 전부였으니까.

“…….”

흩날리는 먼지, 울먹이는 차인호, 주현의 볼을 매만지는 손, 주현에게 키스하는……. 자신이 입술을 매만지고 있는지도 모르던 주현은 갑자기 멈춰 선 차에 흠칫 놀랐다.

“저기서 기다리면 돼. 입조심하고, 함부로 떠들지 마.”

마치 그런 적이 있다는 듯 위협적인 어조로 말한 직원이 시동을 껐다. 대답하지 않고 차에서 내리자 나무 사이로 불어닥친 바람 특유의 상쾌함이 느껴졌다.

그가 도착한 곳은 공원이었다. 정확히는 사람이 오지 않아서 풀이 무성하게 자란 공원. 이런 곳에서 만난다는 건 그리 높으신 분은 아니라는 뜻이다.

한결 마음 편해진 주현이 낡은 벤치에 앉았다. 주현이 살고 있는 C동도 온통 풀과 나무에 둘러싸인 곳이라 조금은 아늑한 마음마저 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뜬 주현이 벌떡 일어나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스카프부터 옷에 진 주름까지 탁탁 털어 낸 그가 고개를 들었다.

“밖에서 보니까 반갑네요.”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햇볕이 차인호의 머리카락을 금색으로 물들였다. 그러고 보면 파란 하늘 아래에 선 차인호를 본 건 처음이었다.

생각보다 옅은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차인호가 다가와서 방금까지 주현이 쉬고 있던 벤치에 앉았다. 옆자리를 두드리는 손길이 자연스러웠다.

잠시 머뭇거리던 주현은 약간의 틈을 두고 페인트가 벗겨진 나무에 앉았다.

“왜 여기 계신 겁니까?”

“그쪽에서 요청했어요. 안전을 위해서 매칭 가이드가 있어야 한다고.”

주현은 누군지도 모르는 상대방을 차인호는 알고 있는 듯했다. 그가 중심인 일에서 제외되는 건 익숙한 일임에도 늘 불편했다. 거기에 더불어 주현이 위험하다는 이유로 차인호에게 연락이 갔다는 사실이 그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손가락의 거스러미를 쥐어뜯으며 바닥을 바라보던 주현의 귓가로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한 세트로 취급받는 것 같아서 꽤 기분 좋았어요.”

이를 보이며 웃는 얼굴이 장난스러웠다. 저도 모르게 따라서 입꼬리를 올린 주현이 무언가 말하기 위해 입을 벌린 순간이었다.

“잠깐, 우주야!”

걱정이 담긴 날카로운 목소리에 두 사람의 고개가 돌아갔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다가 벤치로 달려온 이는 아주 작은 몸을 가지고 있었다. 주현은 그를 만나고 싶다며 끈질기게 연락했다던 사람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

“…….”

“음, 안녕?”

정적을 끊은 차인호의 인사는 깨끗하게 무시당했다.

전과는 달리 짧게 잘린 차분한 머리카락, 여전히 마르긴 했으나 아주 조금 통통해진 뺨, 끝이 조금 올라간 커다란 눈. <게이트 데이트>를 촬영하던 중 쓰레기장에 나타난 괴물에게서 주현이 구해 준 아이였다.

“오랜만이네.”

속삭이듯 뱉은 말에 잠시 눈을 크게 뜬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또래에 비해 확연히 마른 팔다리가 안타까웠다.

“우주야!”

아까 전 들렸던 목소리가 다시금 울렸다. 황급히 다가온 이는 단발머리의 중년 여인으로, 우주를 보자마자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두 사람, 정확히는 주현을 보자마자 놀란 듯 흠칫했으나 이내 침착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안녕하세요. 우주 보호자로 온 안미희라고 합니다.”

벌떡 일어난 주현은 따라서 인사하려 했으나 어쩐 일인지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두려움을 참고 있는 게 분명한, 가늘게 떨고 있는 손을 보고 있자니 당장에라도 도망가고 싶었다.

그녀가 가이드거나 직원이라면 아무렇지 않게 대할 수 있었을 터다. 그러나 명백하게 겁에 질린 일반인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하든 더욱 큰 두려움만 줄 게 뻔했다.

어색한 시간이 흘러가고, 의아한 시선을 느낀 주현이 주먹에 힘을 준 찰나 따뜻한 손이 어깨를 감싸 쥐었다.

“저희가 누군지는 아실 거라고 믿습니다.”

“네, 네. 물론이죠.”

“어떠세요, 실물이 더 낫나요?”

차인호의 능청스러운 말에 미희의 얼굴에도 미소가 피어났다. 한순간에 풀린 분위기에 주현이 눈을 깜빡였다.

“전 차인호라고 합니다. 이분은 제 매칭 에스퍼인 신주현 씨예요.”

자연스럽게 이어진 소개에 주현이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제 매칭 에스퍼. 그런 식으로 소개된 건 처음이었다. 위험한 폭주 에스퍼가 마치 평범한 에스퍼처럼 들리는 게 신기했다.

“우주야, 인사해야지.”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는 그 순간에도 아이의 시선은 오로지 주현에게만 박혀 있었다. 주현 또한 남몰래 우주의 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빠르게 훑어보았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는 모양이었다.

“날 만나고 싶었다며?”

두식이 귀찮다고 말할 정도로 연락한 것치곤 반응이 시원찮았다. 미희도 그것을 느꼈는지 우주의 옆으로 바싹 붙어선 등을 가볍게 문질렀다.

“올해 열두 살이 된 송우주라고 합니다. 우주야,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지? 지금 해 볼까?”

주현은 내심 깜짝 놀랐다. 너무나도 작아서 열두 살로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열 살은 되었나 했었는데.

우주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러고는 허리를 깊이 숙이며 외쳤다.

“저랑 제 동생을 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충족감이 주현의 가슴으로 밀려들었다. 이 자그마한 아이가 그런 곳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아야 했다는 사실에 화가 나면서도 올바른 일을 했다는 생각이 아주 오랜만에 떠올랐다.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던 주현은 아이를 안아 주고 싶었으나 차마 그러지 못했다. 우물쭈물하는 손가락과 왼팔을 감싼 깁스를 바라보던 우주는 또렷하고 철이 빨리 든 눈으로 말했다.

“형. 나중에 저 발현하면 저랑 매칭해요. 매칭 가이드 해 줄게요.”

당돌한 말에 세 어른이 딱딱하게 굳었다. 미희 또한 놀라서 숨을 들이켜는 것으로 미루어 미리 합의된 말은 아닌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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