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48화
“항상 이랬습니까?”
“……뭐가요?”
“항상 저런 놈에게 가이딩 받은 거냐고요.”
차인호는 조금 화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분노가 향하는 곳이 주현이 아니라서 그런지 두렵지는 않았다.
“네.”
“…….”
“저 사람은 그래도 나은 편입니다. 뼈가 부러질 정도로 때리지도 않고.”
변명하듯 덧붙인 말에 차인호의 표정은 더욱 안 좋아졌다. 낮게 혀를 찬 그가 조심스럽게 주현을 일으켜 세웠다.
이곳에 오기 전보다 훨씬 아파진 다리로 간신히 일어서자 차인호가 부축하며 침대에 앉혔다. 그러곤 주현 앞에 앉아 다리를 매만지며 가이딩하는 모습에 어쩐지 아까와는 반대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웃어요?”
차인호가 힐끔 올려다보며 묻자 주현은 황급히 입술에 힘을 줘 다물었다. 그는 자신이 웃고 있는지도 몰랐다. 딱히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이 아니었는지 차인호는 추궁하지 않고 가이딩을 계속했다.
“수갑은 이따가 풀어 줄게요. 직원한테 받지도 않고 들어온 거라.”
잠시 고민하던 주현은 능력을 사용해 가볍게 수갑을 풀었다. 달그락 소리가 등 뒤에서 울렸다.
보통 사람들은 폭주 에스퍼가 묶여 있을 때 안도하고는 한다. 에스퍼라면 누구나 힘으로 잡아 뜯어도 이상하지 않을 얇은 쇳조각으로 자신이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차인호는 주현의 사지가 자유롭다고 무서워하지 않을 거란 묘한 확신이 있었다. 주현은 역시나 움찔하지 않은, 오히려 어딘가 홀가분해 보이는 차인호를 바라보았다.
“여기 왜 온 겁니까?”
차인호의 손이 멈췄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움직이는 손은 어쩐지 조금 더 부드럽게 느껴졌다.
“글쎄요.”
지독하게 아프던 다리가 점차 낫고 있었다. B급 가이드치고는 속도가 빨랐다.
“원래는 매칭 끊으려고 왔어요.”
“…….”
“계속 옆에 있다간 내가 화병으로 죽을 것 같아서.”
마치 쉽게 깨지는 유리 조각이라도 대하듯 다리를 매만지는 손길이 간지러웠다. 가이딩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건지 차인호는 주현의 무릎에 입술을 문질렀다.
그걸 보자 며칠 전 두식의 컴퓨터로 몰래 봤던 영상이 떠올랐다. 피투성이 주현과 울부짖으며 그에게 입 맞췄던 차인호. 흩날리는 먼지 속에서 축 늘어진 몸을 끌어안으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끊을 겁니까?”
의도한 건 아닌데 기죽은 개처럼 힘없는 목소리가 나왔다. 차마 얼굴을 볼 수가 없어서 무릎을 감싼 차인호의 예쁜 손에 시선을 고정했다.
“모르겠어요.”
차인호의 손에는 반창고가 몇 개나 붙어 있었다. 미처 다 덮이지 못하고 반창고 밑으로 드러난 상처는 무언가에 강하게 쓸린 듯한 모양새였다. 마치 무너진 콘크리트 잔해를 파헤치기라도 한 것처럼.
“저도 모르겠어요.”
다시 한번 중얼거리며 고개 숙인 차인호가 주현의 다리에 얼굴을 묻었다. 우나 싶었는데 물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항상 어렵네요, 주현 씨는.”
얼굴을 든 차인호는 웃고 있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체념과 애정이 뒤섞인 미소는 주현이 받기엔 너무 눈이 부셔서.
“마음대로 하셔도 됩니다.”
웃는 것처럼, 혹은 울음을 참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뜬 주현이 창살로 갈라진 하늘을 응시했다.
“제가 성가신 것도 당연하고, 미래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으니까, 그냥…….”
손끝을 스치는 차인호의 머리카락은 상당히 부드러웠다. 이젠 잘 기억나지 않는, 오래전에 쓰다듬곤 했던 고양이의 털이 이것과 비슷했을지 잠시 생각했다.
주현은 이미 체념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는 자존심이 아주 강해서 가이딩을, 차인호를 원한다는 걸 대놓고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좀 더 과감하게 부드러운 머리칼을 헤집었다. 손의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 가이딩을 얻으려는 시도로 보이길 바라며.
그 염원이 통했는지 차인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현의 손길을 털어 내지 않고 그저 다시금 무릎에 얼굴을 묻었을 뿐이다.
지금껏 그와 이토록 친밀하게 서로를 매만진 적은 없다. 이게 차인호를 만나는 마지막 날이라는 게 웃기기까지 했다. 다시 한번 머릿속에 떠오른 영상을 무시한 주현이 손끝으로 차인호의 두피를 가볍게 건드렸다.
“일단 오늘은 그냥 가이딩만 하고 돌아갈게요.”
30분은 분명히 넘지만 한 시간은 채 안 되는 시간이 지난 후, 웅얼거리듯 말한 차인호가 바닥에서 일어났다. 그는 몇 번 더 주현의 볼을 매만지곤 천천히 돌아섰다.
차인호에게 쫓겨난 가이드는 이미 돌아간 건지 문 너머에서 보이지 않았다.
“그럼…… 몸 좀 챙기세요.”
다음에 온다든가 매칭을 확실히 끊는다든가. 아무런 확답을 주지 않고 떠난 차인호는 사람을 초조하게 만드는 법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홀로 남은 주현은 아까보다 훨씬 좋아진 몸을 느끼며 멍하게 숨을 내뱉었다.
주현이 엉망진창이 되지 않은 게 아쉽다는 듯 뚱한 표정으로 들어온 직원은 그를 이끌고 나와 방으로 돌려보냈다. 이젠 완전히 익숙해진 하얀 후드티를 껴입은 주현이 침대에 누웠다.
차인호가 왔고, 여전히 상처는 다 낫지 않았고, 다음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고, 주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우리에 갇혀 주인이 오길 기다리는 개처럼 처량하게 웅크리는 것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다시금 먼지가 흩날리는 콘크리트 더미 너머에서 차인호가 울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타인의 슬픔에 기뻐하는 주현은 나쁜 사람일까?
살면서 좋은 사람이었던 적 없는 주현이 모자를 덮어쓰며 아늑함을 만끽했다. 몸을 감도는 가이딩이 다 떨어지기 전까지는 매칭 가이드가 있는 척할 수 있다는 걸 위안 삼으며 불그스름한 눈을 감았다.
* * *
마지막 가이딩으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주현은 가이딩 룸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는 채 직원을 따라 복도를 걸었다. 지금 그를 이끄는 직원은 무뚝뚝하고 표정 변화도 거의 없어서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주현은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희망은 더욱 큰 절망과 같은 말이고, 희망은 언제나 늪에 숨어서 주현의 발목을 잡아당기려 기회를 노리는 나쁜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희망의 가장 잔인한 점은, 쫓아내려 할수록 더욱 끈질기게 들러붙는다는 것이다.
간절한 사람을 한입에 집어삼키곤 날카로운 이로 마구 씹어 대는 감정이 주현의 가슴속에 차올랐다.
그래서 주현은 최악을 상상했다. 문 너머에 그를 가장 아프고 두렵게 했던 가이드가 있다고. 그러자 희망이 조금 발을 빼는 게 느껴졌다.
직원이 문을 열었다. 주현은 혀끝을 깨물며 바닥을 응시했다.
‘때리는 걸 즐기던 가이드가 소식을 듣고 왔을지도 몰라. 유독 날 좋아했던 그 사람이 돌아왔을지도 몰라. 날카로운 채찍이…….’
“일주일 만이죠?”
주현은 고개를 들었다. 차인호는 처음 보는 크고 푹신해 보이는 의자에 앉아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탁. 주현을 가볍게 밀어낸 직원이 문을 닫고 나갔다. 방에 남은 건 에스퍼와 가이드, 두 사람뿐이다.
희망이 그저 희망으로 남은 건 처음이라, 주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멍하게 서 있었다. 그런 주현에 무언가 생각난 듯 눈을 깜빡인 차인호가 노란색 의자의 팔걸이 부분을 툭툭 두드렸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의자가 너무 불편해서요. 앞으로도 계속 올 건데 이왕이면 편안한 게 좋잖아요.”
1인용 소파라고 해도 손색없는 의자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가지고 올라오느라 제법 고생했어요.”
수더분하게 웃는 차인호는 어쩐지 쑥스러워 보였다.
천천히 걸음을 옮긴 주현이 제 몫의 의자 앞에 멈춰 섰다. 차인호에겐 없는 갈색 쿠션을 집어 든 그가 푹신하고 두툼한 솜을 손바닥으로 주물렀다.
“어제 방송했는데, 봤어요?”
<게이트 데이트> 10화가 어제 방송했다. 다른 동료들이 같이 보자 했으나 주현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말로 거절했다. 허술한 변명에도 누구 하나 주현을 붙잡고 닦달하지 않았다.
주현은 화면 속에서 어설프게 행동하는 자신을 보고 싶지 않았다. 특히 편집됐는지는 모르겠으나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채 차인호와 매칭해서 좋다고 말하는 자신은 더더욱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방송을 보지 않은 주현이 고개를 저었다.
“……주현 씨가 절 그렇게 생각하는지 몰랐어요.”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은 폭주 에스퍼가 차인호를 바라보았다. 그는 은근히 볼을 붉히고 있었는데, 확실히 이렇게 커다란 의자를 이곳까지 가져오는 건 제법 힘든 일일 게 분명했다.
그러나 주현은 차인호의 상기된 뺨이 그저 힘들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의심이 고개 드는 걸 느꼈다. 다른 이름으론 희망.
“매칭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도록 열심히 해야겠네요.”
차인호는 이를 보이며 수줍은 아이처럼 웃었다. 그 미소에는 어딘가 추억을 자극하는 구석이 있어서, 여러 감정이 동시에 치밀어 올랐다.
주현은 처음으로 차인호에게 제대로 된 미소를 돌려주었다. 가이드가 놀라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다가오는 여름이 선명했다. 주현은 덥다는 생각이 그 혼자만의 감상인지 조금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