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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52/161)

폭주 에스퍼 47화

방으로 돌아가는 길은 느리고도 아팠다. 야간 경비는 두 시간에 한 번씩 돌고, 아까 한 번 돌았기에 앞으로 약 두 시간 동안 복도엔 아무도 없다. 그걸 알면서도 능력을 쓰기에는 이젠 주현에게 가이드가 없다. 사치를 부릴 여유는 없다는 말이다.

어디 내팽개친 건지 목발조차 없어 벽을 짚으며 느릿느릿 걷던 주현은 어느새 자신이 방을 거쳐 휴게실 앞에 서 있다는 걸 알아챘다. 정확히는 휴게실 복도 벽에 붙어 있는 공중전화 앞에.

고민은 의외로 짧았다. 붕대가 감긴 손으로 수화기를 집어 든 주현은 경비가 그를 발견하지 않을까 기대하는 시선으로 복도 너머를 응시했다.

물론 경비는 없었다. 주현은 어쩔 수 없이 무척이나 익숙한 번호를 천천히 눌렀다. 차인호가 병실을 떠난 후로 그에게 전화하는 건 처음이었다. 안 받을 가능성이 크다는 걸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가 자꾸만 밀어닥쳤다.

수화기 줄을 남은 손으로 비비 꼬며 앞니로 입술을 괴롭히던 주현은 결국 피를 맛보고 나서야 입을 벌려 한숨을 내쉬었다. 신호음이 길어질수록 뜨겁던 가슴이 점점 차게 식어 갔다.

-삐 소리 이후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이렇게 될 걸 알았으면서도 왜 비참함을 느끼는지, 주현은 자신을 꾸짖었다. 차가운 회색 바닥이 발바닥을 시리게 만들었다.

“……있잖아요.”

이토록 어색한 목소리라니. 약간의 부끄러움과 함께 어깨를 움츠린 그가 용기 내어 말을 이었다.

“저보고 목숨 아까운 줄 모른다고 하셨죠?”

C동 동료들끼리 지나가듯 툭 던지는 말이 아닌, 진심으로 그리 말하며 화내는 사람은 차인호가 처음이었다. 두 발로 서 있기 버거워진 주현이 회색 벽에 툭 어깨를 기댔다.

“모르는 거 맞습니다. 제가 죽는다고 울 사람도 없고, 제가 산다고 웃을 사람도 없거든요. 저조차 저의 죽음이 너무 가벼워서 몸 사리는 법을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가끔은 죽기 위해 임무에 나간 적도 있다. 물론 주현을 미워하는 세상은 그의 소망을 들어주지 않았지만.

“그런데 차인호 씨는…….”

주현은 그의 눈물을 봤다. 피투성이가 된 주현을 품에 안고 헐떡이며 아이처럼 우는 차인호를 봤다. 주현은 다시 한번 그때 죽었다면 얼마나 좋았을지 생각했다. 차인호가 눈물로 애도하는 소리를 들으며, 따스한 품속에서 숨을 거뒀다면 얼마나 행복한 죽음이었을지.

이젠 그 기회가 날아갔다. 차인호는 영원히 떠났고, 다시는 그런 다정한 애도를 받지 못할 것이다.

한 번으로 충분하다. 눈을 감은 주현이 슬그머니 입꼬리를 밀어 올렸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저보다 나은 에스퍼와 매칭하시길 바랄게요.”

수화기가 철컹 소리를 내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정적과 어둠만이 가득한 복도에 서서, 주현은 이젠 쓸 일 없는 번호를 잊기 위해 애썼다. 잘되지는 않았으나 계속 시도하다 보면 언젠가는 성공할 것이다. 아마도.

* * *

에스퍼의 폭주에는 필연적으로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가 따른다. 그렇기에 폭주 후에도 살아남은 에스퍼는 죗값을 치르기 위해 평생을 헌신하며 살아야 한다. 다쳤다는 이유로 침대에 누워 오랜 시간을 의미 없이 흘려보내는 건 용납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정이 있어서 당분간 못 온다는 말만 반복하는데 그걸 언제까지 기다릴 수 있겠어?”

인상을 팍 쓰며 투덜거리는 직원에 주현은 바닥만 응시하며 묵묵히 복도를 걸었다.

“애초에 폭주 에스퍼랑 매칭한다고 할 때부터 예상했어, 나는. 오래 못 갈 줄 알았다.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게.”

자신의 안목을 자화자찬한 직원이 목발 없이 걷느라 조금 뒤처지던 주현을 확 잡아끌었다. 비틀거렸으나 넘어지진 않은 주현이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에 직원이 코웃음을 치며 주현의 볼을 툭툭 가볍게 쳤다.

“정신 안 차려? 너 이젠 잘나신 매칭 가이드 없다고. 한 번만 더 노려보면 어떤 가이드 만나게 될지 모른다?”

현재 주현은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 가이드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차인호가 오기 전까지 그랬던 것처럼 사회봉사 명령을 받은 범죄자가 가이딩 룸에서 기다리고 있다.

“알았으면 눈 깔고 빨리 따라와.”

위협과 즐거움이 반씩 섞인 목소리에 반항할 기운도 없던 주현이 조금 더 빠르게 다리를 움직였다.

아직 덜 나은 손을 억지로 등 뒤에서 수갑으로 묶은 터라 손가락부터 팔까지 안 아픈 곳이 없었다. 가이딩이 부족하니 회복이 더뎌 부러진 늑골도 붙지 않아서 숨만 쉬어도 가슴이 찌릿했다.

붕대투성이 환자를 거칠게 다룰 정도로 쓰레기는 아니길 바라며, 주현은 천천히 가이딩 룸 안으로 들어섰다.

“오랜만이네?”

곧장 마주친 얼굴에 주현은 반사적으로 눈을 찡그렸다. 직원은 그런 주현을 신경조차 쓰지 않으며 강하게 밀친 후 문을 닫았다. 가이딩 룸 구석에 놓인 침대에 앉아 있던 남자가 히죽거리며 웃었다.

차인호는 한 번도 침대에 앉은 적 없는데. 문득 떠오른 생각을 털어 낸 주현이 천천히 가이드에게 다가갔다.

“너 매칭 가이드 생겼다는 소식에 아저씨가 얼마나 아쉬웠는지 알아?”

볼을 쓰다듬는 손길에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으나 늘 그렇듯 무표정으로 참아 낸 주현이 슬그머니 얼굴을 움직였다.

짝! 그 순간, 두툼한 손이 주현의 뺨을 강하게 후려쳤다. 단 한 번의 타격으로 혈관이 터졌는지 코피가 인중을 타고 흘러내렸다.

“피하지 말라고 했잖아. 응? 처음부터 다시 교육해야 하나?”

수갑으로 묶인 손이 강하게 주먹 쥐었다. 눈앞의 남자를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죽일 수 있는 주현이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주현을 품평하듯 훑어본 남자가 씨익 웃으며 제 앞, 다리 사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리 와.”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그가 무엇을 명령하고 있는지 깨달은 주현은 혀를 깨무는 심정으로 다가갔다.

“앉아.”

거부할 권리는 없다. 가이딩 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 호출기가 눌리기 전까진 누구도 개입하지 않는다. 망설여 봤자 고통스러운 시간만 늘어난다는 걸 알고 있는 주현이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부러진 다리에서 불길할 정도의 통증이 느껴졌다. 절로 식은땀이 흘렀으나 아파한다면 남자가 더욱 즐거워할 걸 알기에 주현은 손톱을 손바닥에 박으며 참았다.

“그래. 차인호는 어땠어? 연예인답게 침대 매너도 끝내주나?”

주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이런 짓 따윈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간 더욱 수치스러운 모욕을 늘어놓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입을 다물게 할 목적으로 남자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에 만족한 듯 남자는 웃으며 주현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TV에서 널 보고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아? 지금까지 가이딩 부족으로 안 죽고 살아 있게 한 사람이 누군데!”

당신 말고도 수많은 가이드가 있었다고 말해 줄 필요는 없다. 주현은 얌전히 눈을 감으며 입을 벌렸다. 희미하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지만, 머리를 잡아 누르는 손 때문에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 자식은 내 걸 훔치려 했어.”

“걔가 왜 네 거지?”

남자의 거칠고 탁한 목소리 틈으로 듣기 좋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퍽, 무언가를 때리는 소리와 함께 주현은 뜨겁고 무거운 손길에서 해방되었다.

“크윽, 뭐, 뭐야!”

얼마나 집중했는지 누군가 들어왔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한 남자가 부어오른 볼을 움켜쥐며 벌떡 일어났다.

코피를 툭툭 흘리며 바닥에 앉아 고개 든 주현은 차인호가 정말로 화나면 어떤 얼굴을 하는지 알게 되었다. 살벌하게 일그러진 눈이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 사나운 기세에 덤빌 듯이 일어났던 남자가 주춤했다.

“내 매칭 에스퍼가 왜 네 거냐고 물었어.”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음성이 차인호의 목에서 흘러나왔다. 남자를 두렵게 만든 그 목소리는 반대로 주현에겐 깊은 안도를 주었다. 주현의 매칭 가이드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마치 주현을 지키듯이.

주현은 차인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 그런데 왜 그의 등 뒤에서 안전하다는 기분이 드는 것인지, 그는 모른다.

“매칭 에스퍼? 웃기고 있네! 어차피 필요할 때 잠깐 쓰다 버릴 거면서 생색-”

남자는 말을 다 끝내지 못했다. 차인호가 그의 멱살을 강하게 잡곤 문으로 끌고 가 밖으로 내던졌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힘이 강한지 덩치가 작지 않은 남자가 순식간에 복도 바닥을 나뒹굴었다.

찰칵, 남자가 일어나기도 전에 문을 잠근 차인호는 주먹으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거친 욕설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그 앞에 서 있던 차인호가 빙글 뒤로 돌았다.

그에 주현이 움찔했고,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

“…….”

“하아…….”

주현의 인중과 입술을 더럽힌 피, 부어오른 뺨, 여전히 붕대로 칭칭 감긴 몸을 차례차례 훑던 차인호가 커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빠르게 다가와 주현의 앞에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며 쪼그려 앉았다.

“당신을 어쩌면 좋을까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든 그가 주현의 코피를 부드럽게 닦아 냈다. 잠시 입술을 열었던 주현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냥 침묵했다.

“옆에 있어도 난리, 없어도 난리. 안 다치고 살 수는 없는 거예요?”

이상하게도 피가 말라붙은 인중보다 입술을 더욱 꼼꼼하게 닦아 낸 차인호가 부드럽게 주현의 볼을 매만졌다. 부드러운 가이딩에 곧바로 뺨을 관통하던 통증이 가라앉았다.

며칠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아주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지는 온기에 주현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손바닥에 기댔다. 잠시 멈칫한 손은 이내 피부를 덮듯이 감쌌다. 손가락 끝이 귓불을 스쳤고 엄지가 입술 근처를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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