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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51/161)

폭주 에스퍼 46화

“그러고 보니 인호 씨가 안 보이시네요? 가이딩해야 한다면서 옆에 딱 달라붙어서 떨어지질 않더니.”

“……앞으로 안 올 겁니다.”

“네?”

의아한 얼굴로 되묻던 서찬은 작은 스피커에서 들려온 면회 시간 끝났다는 알림에 서둘러 일어나서 짐을 챙겼다.

“아무튼 살아남아서 다행이에요. 회복 잘하시고요.”

달칵. 서찬이 떠나자 병실은 침묵으로 가득 찼다. 양손을 묶이고 안대로 눈이 가려진 것도 아닌데 마치 그런 것처럼 고요하고 고독했다.

A동 병실은 C동과는 하늘과 땅, 아니, 우주와 심해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모든 것이 깨끗하고 새하야며 처음 보는 기계가 가득했다. 이런 게 C동에도 있었다면 죽지 않고 살아 있을 동료가 몇 명일지 생각하다 보면 속이 울렁거렸다.

얼른 자리 털고 일어나 일해야 한다는 생각과 좀 더 다쳐서 고통으로 아무 생각도 못 하게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그러나 가장 주현을 힘들게 하는 것은 무력감도 자기 비하도 아닌, 다시는 차인호가 그를 위해 오지 않을 거란 사실이었다. 주현이 아무리 아파도, 설령 죽음이 코앞에 있다 해도.

아. 드디어 죽을 수 있겠네. 주현은 극적으로 생각했다.

1년 후 원래 계획대로 자연스럽게 매칭이 끊어졌다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주현은 어쩐지 길바닥에 버려진 강아지 같은 심정으로 아랫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죽는 건 두렵지 않은데 그에게서 내쳐지는 건 두려운 이유가 뭘까? 그가 본능적으로 가이드에게 집착한다는 에스퍼라서 그런 걸까?

어쩌면 차인호가 이상한 사람이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이상하게 다정하고, 이상하게 주현을 보며 웃어서, 마치 주현을 잘 안다는 듯이 구는 차인호에 저도 모르게 친근함을 가져 버려서.

사실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목숨을 몇 번이나 구해 준 사람에게 호감이 생기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니까.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어찌할 수가 없어서, 주현은 눈을 감았다. 온통 어두운 세상을 방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 * *

주현은 나흘을 더 입원하다가 퇴원하게 되었다. 아직 상처가 다 낫지는 않았지만, A동 측에서 더 이상의 입원은 불가능하다고 못 박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주현은 상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기까지 했다. 가끔 병실에 들어오는 의사와 간호사는 주현이 숨만 쉬어도 두려운 표정을 지었고, 새하얀 공간에 홀로 있으니 자꾸만 나쁜 생각이 들었다. C동으로 돌아간다면 회복이 좀 더뎌질지는 몰라도 최소한 마음은 편하리라.

그러나 집으로 떠나기 직전, 주현은 누군가 면회 왔다는 소식에 다시금 침대에 앉았다. 똑똑. 가벼운 노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오랜만이죠? 많이 나은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범진의 미소에 왜 실망스러운 기분이 드는 것인지, 주현은 답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바로 왔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멋대로 나갔다가 휘말린 거니까요.”

주현은 그날 폭주할까 스스로가 두려워 식당을 빠져나와 멋대로 돌아다닌 것 때문에 다수의 사람이 피해 입었다는 걸 안다.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가 없었다면 더 능력 있고 강한 에스퍼가 괴물을 잡았겠으나 그 전에 어떤 인명 피해가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가 나선 덕에 누군가는 목숨을 구했을 것이라고 주현은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대가 없이 차인호를 잃은 게 되니까.

“오늘 퇴원이라면서요……?”

말끝이 흐려진 범진이 붕대가 여기저기 감긴 주현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의료진들의 두려움, 모니터 감시를 위한 인력 낭비, 에스퍼들의 불편함 등, 하나하나 말하기엔 너무 많아서 주현은 그냥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퇴원 후에 드리려고 했는데, 그때는 못 만날 거라 해서 오늘 급하게 왔습니다.”

범진은 주머니에서 작은 USB를 꺼내 주현에게 내밀었다. 폭주하기 전까지 한 번도 만져 본 적 없는 그것은 폭주 후 여러 불법적인 임무를 하며 제법 손에 익은 물건이 되었다.

매끈한 검은색 USB가 주현의 손바닥에 올라앉았다.

“이 부분은 방송에 안 내보낼 겁니다. 너무 사적인 모습이니까요.”

그리 말한 범진이 손을 뻗었다. 잠시 망설이던 손은 이내 주현의 손등을 부드럽게 스쳤다.

“폭주했다는 이유로 동생마저도 매몰차게 끊었던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범진은 지쳐 보였다. 눈 밑이 새카맣고 턱수염이 돋아 있었다. 그럼에도 두 눈동자에는 총기가 감돌았다.

“주현 씨. 누군가는 당신을 생각한다는 거, 알아주세요.”

그 말을 끝으로 범진은 병실을 나갔다. 홀로 남은 주현은 가만히 손에 들린 USB를 바라보았다. 무엇이 들어 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며칠 만에 돌아온 C동은 늘 그렇듯 칙칙하고 음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래도 주현에겐 가장 익숙하고 집처럼 느껴지는 곳이다.

“애가 걸레짝이 돼서 왔네.”

“살아 돌아왔으면 됐지, 뭐.”

“주현아, 고생했다. 뉴스 봤어. 난리도 아니던데.”

그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세화, 봄, 채경이 주현을 반겨 주었다. 목발을 짚으며 비틀거리던 주현은 흐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뉴스에 어떤 식으로 나왔을지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딱딱하고 좁은 침대에 누운 주현은 이상하게도 여전히 답답하게 느껴지는 가슴팍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A동만 벗어나면 이 원인 모를 증상이 가라앉을 줄 알았는데.

아직 하늘이 새파람에도 할 일 없이 누워 있던 주현은 주머니에서 느껴지는 이물감에 손을 밀어 넣었다. 까만 USB가 붕대 감긴 폭주 에스퍼의 손가락에 걸렸다.

‘주현 씨. 누군가는 당신을 생각한다는 거, 알아주세요.’

그게 무슨 말일까? 답을 알려면 안에 담긴 게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했다.

그날 밤, 주현은 새까만 복도를 지나 센터장인 두식의 사무실에 몰래 들어갔다. 여기저기 다친 데다 목발을 짚어야 하는 탓에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몸이지만, 주현의 능력으론 간단한 일이었다.

앞으로는 전처럼 능력을 아껴 써야 한다는 걸 의식적으로 무시한 주현이 데스크톱을 켰다. 어둠 속에서 갑작스럽게 켜진 빛이 눈을 찔렀지만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었다.

주현이 USB를 꽂아 넣었다. 폴더 안에는 단 하나의 파일만 들어 있었다.

‘동영상?’

소리를 가장 작게 낮춰 영상을 재생하자 익숙한 배경이 보였다. 얼마 전 주현이 깔린 바로 그 건물이었다.

검붉은색 눈동자가 커졌고, 껍질이 일어난 입술 또한 작은 달싹임과 함께 벌어졌다.

영상 속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다. 구경하는 사람, 무너진 건물의 주민, 어린 동생을 끌어안고 있는 아이, 그리고……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단연 차인호였다.

그는 울고 있었다. 새빨간 피투성이가 된 무언가를 끌어안고 서럽게 울며 누군가에게 비는 그가 너무나도 낯설었다.

[제발, 제발. 안 돼, 제발……!]

빨간 무언가의 볼을 매만지고, 이마에 입을 맞추고, 입술 틈새로 숨결을 확인하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옷이 더러워지는 것과 흩날리는 먼지 따윈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그저 시체 같은 사람에게 집중하는 그는 분명 필사적이었다.

[주현아…….]

작게 흘러나온 제 이름에 주현이 흠칫 떨었다. 그제야 주현은 차인호가 안고 있는 게 자신이라는 걸 알아챘다.

차인호의 우는 얼굴은 보는 사람마저 가슴이 저릴 정도로 서럽고 비참했다. 고작해야 폭주 에스퍼가 죽어 갈 뿐인데. 누구도 삶을 바라지 않는 신주현이 드디어 지옥으로 걸어가고 있을 뿐이건만.

“왜…….”

당신은 그리 슬퍼하고 있는 거냐고. 저래서야 마치 주현의 죽음이 아쉬운 것 같다. 저래서야 마치 주현이 살기를 바라는 것 같다. 계약으로 맺어진, 오직 서로의 이득으로만 움직이는 관계인데.

주현이 굳든 말든 영상은 계속 재생되었다. 헐떡이던 차인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주현의 볼을 잡고는 망설임 없이 입을 맞췄다.

피와 먼지로 뒤덮인 입술을 핥고 가이딩을 전하기 위해 애쓰는 그를 보며, 주현은 저도 모르게 까슬한 입술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오늘은 구름 없는 밤이다. 유독 둥그런 달이 창문 너머로 빛을 쏟아냈다. 만일 누군가 센터장의 사무실에 들어왔다면 달빛에 드러난 주현의 불그스름한 볼을 봤겠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곳에는 폭주 에스퍼 한 명 말곤 아무도 없다.

멍하게 영상을 보던 주현은 민감한 청각으로 누군가의 발소리를 들었다. 재빨리 컴퓨터를 끄고 USB를 뽑아 든 그가 책상 밑으로 웅크렸다.

“누구 있어요?”

가벼운 노크와 함께 문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익숙한 직원의 목소리였다. 능력으로 문을 따고 들어왔지만, 다시 잠그지 않았기에 그가 지금 문을 열면 들킬지도 모른다.

“잘못 들었나?”

멀어지는 발소리를 확인한 주현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긴장 때문에 절로 힘이 들어갔던 손을 펼치자 까만 USB가 드러났다.

얼굴을 쓸어내린 주현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게 무슨 의미냐고 묻고 싶었다. 그 눈물에는 어떤 의미가 있고, 소중한 걸 다루는 듯한 손길엔 어떤 의도가 담긴 거냐고. 매칭 가이드란 누구나 당신처럼 행동하는 거냐고.

몇 번 더 따뜻한 볼을 문지르던 주현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영원히 물을 수도 없고 그럴 의미도, 필요도 없다. 다시는 만나지도 못할 사람에게 그런 걸 듣는다 한들 달라질 건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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