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45화
“에스퍼한테 이딴 건 다친 것도 아니야.”
“하지만, 피가…….”
괴물이 움직이려는 걸 눈치챈 주현이 능력을 사용해 복부에 박힌 괴물의 발톱을 잘라 냈다. 아직 남은 부분이 있었지만, 무리해서 뽑는 것보다는 그냥 두는 게 나았다.
아이에게선 냄새가 났고 동시에 무척 따뜻했다.
주현은 아이가 가이드로 발현할 거란 사실을 알았다. 아직 완전히 발현한 건 아니라서 가이딩이 되었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주현은 진심으로 미소 지었다.
“고맙다. 덕분에 녀석을 잡을 수 있겠어.”
“네?”
“아이 좀 데려가 주세요.”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임에도 집중하고 있었는지 다급하게 뛰어나온 서찬이 아이를 품에 안고 쓰레기통 뒤로 힘껏 뛰었다. 납치당하는 줄 알았는지 마구 반항하던 아이는 바들바들 떨고 있는 서찬을 느끼곤 이내 얌전해졌다.
괴물이 다시 한번 투명해졌다. 다 잡아가는 상처 입은 먹잇감을 그냥 두고 돌아설 포식자는 없다. 하지만.
“미안한데 다 보여.”
주현이 만들어 낸 보이지 않는 검이 괴물의 팔을 잘라 냈다.
[끼이이익!]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고통에 젖은 괴물의 모습이 잠깐 드러났다. 금세 다시 사라졌으나 상관없었다. 괴물이 투명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신체뿐이다. 그 위에 흩뿌려진 주현의 혈액까지 투명하게 만들 수는 없다는 말이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떠다니는 핏자국을 향해 다시 한번 능력을 발동하자 이번에 괴물의 거대한 머리 일부분이 부서져 내렸다.
끝이 보이고 있었다. 거리는 좀 망가졌지만 다친 사람 하나 없이 이 갑작스럽고 거지 같은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온 세상은 주현을 싫어하고 그가 즐거워하는 꼴을 보지 못한다.
무너져 내린 얼굴 때문에 앞을 보지 못하게 된 괴물이 주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넘쳐나는 엔도르핀 덕에 수월히 피한 주현이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상반신에 제법 큰 구멍이 뚫린 괴물은 죽음을 직감한 듯 마지막 힘을 짜내어 주현의 반대쪽으로 달려갔다. 문제는 그곳에 길 대신 건물이 있다는 사실이다.
쾅! 페인트가 거의 완전히 벗겨진 4층짜리 건물은 네 개의 기둥으로 서 있었는데, 괴물은 기둥 하나를 완전히 부서뜨렸다. 그것으로 힘을 다했는지 괴물은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작은 조각으로 흩어지며 무너져 내렸다.
기둥 하나를 잃은 건물이 앞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그 상황에서 주현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였다.
건물 바로 앞으로 뛰어간 그가 무의식적으로 제어하던 능력을 최대 출력으로 사용했다. 기울던 건물이 누군가 받쳐 들기라도 한 듯 허공에서 멈췄다.
“빨리 대피하라고 해요!”
필사적으로 짜낸 목소리에 쓰레기통 뒤에서 굳어 있던 서찬이 뛰어나왔다.
“다들 나오세요! 건물이 무너져요! 피해야 해요!”
필사적인 외침에 괴물과의 충돌 이후 불이 켜지기 시작한 건물에서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최소한의 짐만 챙긴 채 밖으로 나온 사람들은 코피를 뚝뚝 흘리며 서 있는 주현에 놀란 듯했으나 이내 서찬의 손짓에 황급히 도망쳤다.
한편 주현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능력의 제어를 잃고 건물이 무너질 것 같았다.
두통은 이미 안구까지 내려왔고, 코피는 수도꼭지를 튼 것처럼 툭툭 계속 쏟아진다. 여전히 박혀 있는 발톱 덕분에 출혈은 그리 많지 않지만 그렇다고 오래 버틸 수 있을 정도로 몸 상태가 좋지는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대로 건물이 무너져도 옆에 있는 다른 건물까지 무너뜨리지는 않을 거란 점이었다.
두 눈이 한계까지 붉어졌다는 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온몸이 뜨거우면서 동시에 차갑게 느껴졌다.
문득 주현은 누군가가 보고 싶어졌다. 쫓기듯 사람을 돕는다던 남자는 지금 주현을 보고 자랑스러워할까? 어쩌면 웃으며 잘했다고 말해 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다정한 가이딩으로 주현의 두통을 가라앉혀 주겠지.
“다 나왔나요? 안에 아무도 없어요?”
“우리 층에는, 3층엔 없어요!”
“1층도 다 나왔습니다.”
“2층은요?”
서로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주민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저기, 창문에!”
겨우 눈동자를 굴려 바라본 2층 창문에는 어린아이가 울먹이며 창가에 달라붙어 있었다. 기울어진 건물이 무서워 나오지 못하는 것 같았다.
“별아!”
서찬의 뒤에 서 있던, 아까 전 주현이 구해 줬던 아이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외쳤다. 아이가 건물로 들어가려는 걸 사람들이 막아 세웠다.
주현은 이미 한계를 훌쩍 넘었다는 걸 알았으나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이를 보면 과거의 자신이 생각나서 어쩔 수가 없었다. 미약하게나마 힘을 짜내 별을 잡아당기자 아이는 의외로 순순히 몸을 맡겼다.
“오빠…….”
제 오빠의 품에 안긴 아이가 안도한 듯 울음을 터뜨렸고, 모두가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린 순간이었다. 콰르릉- 건물이 제법 큰 소리를 내며 크게 기울었다.
“커헉!”
폭주 에스퍼의 입에서 검붉은 핏물이 터져 나왔다. 이제는 정말로 한계였다. 그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챈 사람들이 멀어지기 시작했고, 주현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신주현!”
분명 가만히 서서 숨 쉬는 것마저도 힘들었는데 어떻게 고개를 돌린 건지는 주현도 모른다.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서는 거친 숨을 토하는 차인호가 그곳에 있었다. 어째서인지 두려움과 분노가 반쯤 뒤섞인 것 같은 얼굴을 한 그가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어쩌면 세상이 그렇게까지 주현을 미워하는 건 아닌가 보다. 폭주 에스퍼가 새빨간 눈을 접으며 웃었다. 건물이 쏟아져 내렸다.
* * *
온몸이 답답했다. 눈을 뜨기 전 가장 먼저 느낀 감각이었다. 머리, 몸, 심지어는 손가락 하나까지도 덥고 답답했다.
이상할 정도로 무거운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천천히 눈을 뜨자 보인 것은 모르는 천장이었다. C동의 회색 천장이 아닌, 새하얗고 깨끗한 천장은 주현에게 상당히 낯설었다.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널찍한 병실에 홀로 누워 눈만 굴리던 주현은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거의 현대판 미라와 같았다. 붕대가 안 감긴 곳을 찾기가 더 어려울 정도로 온몸이 새하얬다. 4층짜리 건물에 깔렸으니 당연하다 싶다가도 결국 또 살아남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창살 하나 없는 깨끗한 창문 너머 파란 하늘을 보고 있자 병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세수라도 했는지 턱을 타고 물방울이 똑 떨어졌다. 차인호는 깨어난 주현을 힐끗 보곤 소파에 놓여 있던 가방을 뒤적였다.
“저, 큼, 저기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깁스에 감긴 팔로 침대를 짚어 일어나려 했으나 실패한 주현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차인호 씨?”
탁. 조금 강하게 가방을 내려놓은 차인호가 돌아섰다. 벌겋게 부은 눈은 주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타인의 적대적인 시선에 익숙한 주현은 왜 가슴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것인지, 정말로 모른다.
“왜 그렇게 사람이 멍청해요?”
차인호의 목소리는 부드럽지도 다정하지도 않았다. 상대를 상처 입히기 위해 뾰족하게 갈아 낸 음성이 주현을 찔렀다.
“같은 일을 왜 이렇게 반복하는 겁니까?”
“…….”
“살려 주면 죽어 가고, 살려 주면 죽어 가고. 이걸 얼마나 더 해야 하는 거죠?”
아무리 일반인보다 튼튼한 에스퍼라 해도 큰 상처를 입으면 죽음에 이른다. 비록 완전히 낫지는 않았지만, 건물에 깔린 주현을 이 정도로 회복시키기 위해 차인호도 제법 고생했을 것이다.
그의 말대로 주현은 벌써 몇 번째 차인호에게 구해졌다.
자꾸만 큰 상처를 입는 주현 때문에 불시에 불려 와야 하는 게 성가시고 힘든 건 당연했다. 차인호 입장에서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비슷할지도 모른다. 폭주 에스퍼는 원래 좀 힘든 임무를 맡는다고 하기엔 이번 일은 그의 임무조차 아니었다.
“저한테 그러셨죠. 무모한 짓 하지 말라고. 그런데 당신은 왜 매번 사지로 뛰어드는 겁니까?”
어쩔 줄 몰라 하며 입술만 괴롭히던 주현이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앞으로는 좀 더 조심하겠습니다.”
“앞으로?”
그 짧은 물음에 담긴 비소는 마치 고드름처럼 차갑고도 날카롭게 주현에게 내리꽂혔다.
“이렇게 자기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에스퍼와 어떻게 매칭을 유지하겠습니까?”
차인호는 휙 돌아 망설임 없이 병실을 나갔다. 주현이 꼴도 보기 싫다는 듯 매정한 태도였다.
홀로 남은 주현이 그의 속도 모르고 그저 해맑은 하늘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차라리 거기서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 * *
“근처에 살던 은퇴한 에스퍼 분이 아니었으면 진짜로 죽었을 거래요.”
그렇게 말하며 사과를 깎은 서찬이 포크로 찍어 주현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받을 생각조차 없이 멍하니 누워 움직이지 않는 주현에 머쓱하게 사과를 제 입으로 밀어 넣었다.
주현이 깨어난 곳은 무려 A동의 의무실이었다. 폭주 에스퍼인 주현은 A동 출입이 불가능함에도 며칠째 그곳에 누워 있었다. 서찬의 말로는 차인호 덕분이라고 했다.
“인호 씨가 안 따졌으면 다른 곳으로 이송하다가 큰일 났을걸요. 상태가 너무 안 좋았거든요.”
“……그랬습니까?”
“네. 지금이야 주현 씨도 괜찮으니까 웃을 수 있지만, 그때는 안 된다고 막는 사람들이 얼마나 밉고 답답하던지……. 딴말이긴 한데 인호 씨 화내는 거 진짜 무섭더라고요.”
차인호가 뭐라고 했는지는 몰라도 그가 아니었다면 주현은 C동으로 가는 길에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폭주 에스퍼가 A동에서 치료받는 것은 아주 이례적인 일이다. 물론 폭주를 대비해서 24시간 파장을 감지하는 기계를 달고 있어야 하지만, 그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태석이 차인호가 귀찮은 연줄을 가지고 있다 말한 적이 있다. 이번 일도 그 영향이 있는 걸까?
“…….”
뭐든 상관없는 일이다. 그야 이젠 주현에게 차인호는 아무 관련 없는 타인일 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