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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49/161)

폭주 에스퍼 44화

“왜 그러시죠?”

서찬의 물음에 그에게 시선 한 줌 주지 않은 주현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도망치세요.”

“네? 갑자기 무슨-”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최대한 조용하게 이곳을 벗어나서 즉시 센터에 신고하세요. 옐로급 괴물이 나타났다고. 아마 AN-32 게이트에서 탈출한 놈인 것 같다고 하면 알아서 해 줄 겁니다.”

주현은 저 멀리서 기이한 몸짓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괴물을 똑바로 응시했다. 마치 깨끗한 유리를 보석처럼 세공해서 온몸을 둘러싼 듯한 모습의 괴물은 아직 투명해진 게 아닌데도 서찬은 발견하지 못했을 정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어두웠음에도 주현이 곧바로 알아본 이유는 몇 년 전 지독하게 시달린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저놈들은 소리에 민감해요. 아마 도시의 소음을 견디지 못해 조용한 곳을 찾아 여기까지 왔을 겁니다. 이런 곳에서 마주칠 줄은 몰랐지만.”

신체를 투명하게 바꾸는 괴물은 눈까지 투명해지기에 그 순간에는 앞을 볼 수 없다. 대신 다른 감각이 극대화되었는데, 특히 청각이 무척 예민했다. 작은 바스락거림에도 순식간에 달려드는 통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과거 함께 임무에 나갔던 에스퍼는 음파를 다룰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괴물을 완벽하게 카운터 치는 능력이지만, 당연하게도 그는 지금 이 자리에 없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서찬이 카메라를 괴물 쪽으로 돌렸다. 그러곤 겁에 질리긴 했지만, 생각보다는 침착하게 뒤로 발걸음을 물렸다.

괴물에게서 눈을 떼면 곧장 달려들 것 같다는 두려운 심정은 주현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자기방어적인 그 행동이 지금은 커다란 실수로 돌아왔다. 정리되지 않은 바닥에 움푹 들어가 있던 타일을 밟은 서찬이 큰 소리를 내며 넘어진 것이다.

“아……!”

비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서찬이 입을 막았지만 괴물의 얼굴은 이미 그들 쪽으로 향한 후였다.

주현은 곧장 능력을 사용했다. 보이지 않는 날카로운 창이 괴물을 향해 돌진했다. 예상한 대로 괴물은 순식간에 투명해져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 틈을 탄 주현이 서찬을 일으켜 커다란 쓰레기통 옆에 앉혔다. 안 그래도 어두운 골목이니 쓰레기통의 그림자 때문에라도 웬만해선 그를 발견하기 힘들 것이다.

“말을 바꿔서 죄송합니다. 그냥 이곳에서 최대한 숨죽이며 아무 소리도 내지 말고 버티세요. 신고는 문자로도 할 수 있죠?”

“주, 주현 씨…….”

괴물이 움직일 땐 크리스털로 만든 거대한 컵이 바닥을 두드리는 것과 비슷한 소리가 난다. 챙, 챙챙,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올린 주현이 겁에 질린 서찬에게 말했다.

“반드시 침묵해야 합니다. ……설령 제가 눈앞에서 죽는다 하더라도.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떠날 거예요.”

안심시키듯 웃은 에스퍼가 일어나서 괴물을 향해 걸어갔다. 이미 낮의 임무로 가이딩 수치가 상당히 떨어졌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주현은 물러설 수 없었다.

“둘 중 어떤 괴물이 이기는지 보자.”

괴물이 주현을 찢어 죽이는 게 먼저일까, 주현이 폭주하기 전 괴물을 쓰러뜨리는 게 먼저일까. 곧 있으면 알게 된다. 폭주 에스퍼가 능력을 발동했다.

전투는 당연하게도 게이트 너머가 아니기에 주현이 훨씬 더 불리했다. 사방에 있는 모든 것이 인질이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 비해 덜 튼튼하게 지어진 건물이 가득한 이곳에서 까딱 잘못했다간 큰 인명 피해가 생기고 만다. 그나마 워낙 위험한 동네라 해가 지고 나선 주변을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다는 게 다행이었다.

거기다 또 한 가지 주현에게 믿을 구석이 있었다. 곧 있으면 괴물을 막기 위해 에스퍼들이 달려올 거란 사실이다. 죽든 살든 게이트 안에서 끝을 봐야 하는 게 아닌, 잘 버티면 끝나는 게임이었다.

쾅! 투명해진 상태로 달려드는 괴물을 간신히 피한 주현이 이를 악물었다.

사방이 어둡고 얼기설기 지어진 건물이 늘어서 있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크게 주현의 움직임을 가로막았다. 능력을 사용해 방어막을 두르고 있다면 좀 더 신중하게 움직일 수 있겠지만, 그럴 경우 능력의 낭비가 심하다.

숨죽이고 조용해진 주현에 괴물은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 한순간 모습을 드러냈다. 주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괴물을 붙잡으려 했으나 예상치 못한 방해가 있었다.

“주현 씨! 하나만 나온 게 아니래요!”

서찬의 외침에 오팔처럼 기묘한 괴물의 눈이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순식간에 투명해진 괴물에 욕설을 씹어 삼킨 주현이 서찬이 숨은 골목 앞에 몇 겹의 방어막을 만들었다. 다섯 개 중 세 개의 막이 부서지고, 다행히 괴물은 가로막힌 벽이 아닌 주현에게 다시 달려들기로 결심했다.

“도시 쪽에도 괴물이 있어서 에스퍼가 다 그쪽에 파견돼 당장 이곳에 올 수 있는 에스퍼가 없대요……!”

서찬의 목소리는 비통했다. 괴물의 시선을 끌기 위해 박수를 두어 번 친 주현이 눈썹을 구겼다.

번화한 도시와 악취가 가득한 쓰레기장. 어느 쪽이 우선순위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곳에도 많은 사람이 살고 있다. 열악하고 비좁아도 열심히 가꾸고 살아온 둥지에서 내일을 위해 웅크리고 잠든 이가 가득한데.

[끼이이-]

괴물의 울음소리는 마치 유리를 닦을 때 나는 높은 마찰음과 비슷했다. 귀를 따갑게 하는 소리에 주현이 주춤했다.

바닥이 패고 큰 소리가 오가는 중에도 누구 하나 창문 열고 나와 보는 사람이 없었다. 이곳에서는 타인의 일에 간섭했다가 나쁜 꼴을 당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물론 주현에겐 다행인 일이었다. 서찬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힘들었다.

간신히 발견한 괴물을 능력으로 감싸 들어 올렸지만, 유리로 된 칼날처럼 길고 날카로운 발톱에 막이 부서져 놓치고 말았다.

주현은 다른 일반적인 염동력 능력자에 비해 할 수 있는 일이 훨씬 많다. 그러나 대가를 치르듯 명백한 약점 또한 존재한다. 물리적이기 때문에 강한 힘에 부서지고 찢어지는 것이다.

사실 일반적인 에스퍼라면 딱히 약점으로 보지도 않을 터다. 그야 부서지면 괴물의 힘이 빠질 때까지 계속 능력을 사용하면 되니까. 그러나 주현은 폭주 에스퍼고, 능력을 마구잡이로 사용할 수 없고, 운 좋게도 매칭 가이드가 생겼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힘을 아껴야 한다.

이런 곳에서 폭주했다간 괴물이 두 마리로 늘어난다는 최악의 상황이 펼쳐진다. 주현이야 곧 폭탄이 작동되어 죽겠지만 그 전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누가 알겠는가.

“젠장…….”

콰당탕! 괴물의 발소리에 재빨리 반응했지만 꼬리는 미처 피하지 못한 주현이 담벼락에 강하게 부딪혔다. 물론 고통에 몸을 맡기고 아파할 틈은 없었다.

바닥으로 허리를 숙임과 동시에 위쪽 담벼락이 큰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이기지 못하는 적과 마주쳤을 때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다. 하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덤벼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도망쳐서 지원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지원은 언제 올지 모른다. 그렇다고 죽음을 각오해서 모든 걸 쏟아부었다간 시한폭탄의 숫자를 줄이는 꼴이 될 것이다. 진퇴양난의 막막한 상황이지만 물러설 수는 없다.

주현이 겁먹고 도망친 탓에 선량한 누군가가 죽는 건 딱 질색이다. 퉤, 피가 섞인 침을 뱉은 주현이 괴물의 발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이렇게나 까다로운 괴물임에도 레드가 아닌 옐로 등급인 이유는 잡기만 한다면 죽이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온몸이 단단하지만 그게 전부다. 압도적인 힘에 부서지고 산산조각이 난다.

투명해진 녀석을 잡을 수만 있다면 싸움은 쉽게 끝날 것이다. 물론 그게 어려우니까 이렇게 바닥을 뒹굴고 있지만.

“윽, 아직도 멀었대요?”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듯 쓰레기통 뒤쪽에서 희미한 빛이 보였다. 슬쩍 얼굴을 내민 서찬이 울상을 지으며 고개 저었다.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삼킨 주현이 지끈거리는 두통을 무시하며 다시금 능력을 발동하려던 순간이었다.

“흑……!”

작은 돌무더기가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높다란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주현의 시선이 틀어박혔다. 무너진 담벼락 너머에 작은 아이가 입을 틀어막은 채 바짝 굳어 있었다.

마지막 목욕이 언제인지 모를 정도로 지저분한 몰골, 더러운 옷, 테이프가 칭칭 감긴 신발. 명백하게 쓰레기장의 주민인 꼬마는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괴물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일단 몸을 숨긴 것 같았다.

겁에 질린 눈동자와 시선을 맞춘 주현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이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아이를 옮길 만한 안전한 장소라든가 그사이에 괴물의 시선을 어떻게 끌어야 하는지 등등.

물론 괴물은 적이 괜찮은 계획을 세울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 주는 법이 없다. 잠깐의 침묵이 지나고, 사라졌던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갤 돌려 정확하게 아이를 응시하는 괴물에 주현은 생각하기도 전에 먼저 움직였다.

“쿨럭…….”

아이가 천천히 눈을 떴다. 마주친 눈은 두려움에 먹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아이의 인생을 다 아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 평생을 그 안에서 살아왔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마음을 놓았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주현이 입꼬리를 밀어 올렸다.

“큽…….”

괴물의 발톱에 복부가 꿰뚫린 상태로는 그마저도 힘겨운 일이었다. 주현의 품에 꽉 안긴 아이는 천천히 흘러내리는 피와 그 원인이 되는 상처를 바라보았다.

점점 거칠어지는 숨결에 주현은 저도 모르게 아이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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