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43화
다른 에스퍼들 편에서는 임무 준비부터 임무가 끝나고 숙소로 돌아가는 것까지 촬영하는 듯했으나, C동은 보안 때문에라도 그럴 수 없었다. 보랏빛 하늘 아래, 두 차가 인적 드문 도로 갓길에 세워져 있다.
C동 직원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범진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주현이 홀로 서 있었다. 그는 펜스에 기대어 담배를 입에 물고 멍하니 저물어가는 태양을 응시했다.
방송이 나가고 난 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해 곱씹으면 한숨만 푹푹 새어 나왔다. 타인을 위해서 능력을 쓰지도 않고, 괴물은 풀어 주고, 폭주 에스퍼 주제에 차인호와 매칭해서 다행이라는 망언이나 하고. 이쯤 되자 얼마나 욕먹을지 궁금하기까지 했다.
꽁초를 비벼 티슈에 감싸 주머니에 넣은 주현이 옆으로 다가온 사람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에 인호 씨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다 같이 식사라도 하자고 하시는데 어떠세요?”
멀끔하던 아침과는 달리 지치고 지저분한 범진이 휴대전화를 든 채 물었다.
“그럼 여기서 헤어지면 되겠네요.”
“주현 씨도 함께요.”
주현과 범진의 시선이 마주쳤다. 조금 더러워진 안경 너머로 보이는 범진의 두 눈은 가볍게 웃고 있었는데, 물러설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고기 사 주신대요! 당연히 가야죠.”
서찬까지 불쑥 다가와 하는 말에 주현은 쉽사리 거절할 수가 없게 되었다.
“주현 씨 없으면 인호 씨도 안 오신대요.”
그 말이 결정타였다. 오늘 하루 무척 고생한 사람들의 간절한 시선을 뿌리칠 수 없던 주현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껏해야 밥 한 끼 먹는 건데 뭐 얼마나 걸리겠냐는 생각이 있기에 가능한 동의였다. 불안하고 무섭기는 해도 그 짧은 시간 만에 폭주할 것 같지는 않았다.
거기다 만약에 정말로 차인호가 온다면 가이딩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렇게 된다면 이번 주에는 가이딩을 세 번이나 받게 되니 주현에게는 상당한 이득이었다.
생각할수록 이 결정이 옳게 느껴졌다. 차인호의 미소를 떠올리며 주현은 조금 전보다 강하게 고개를 까딱였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현재 주현은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고급스러운 식당 구석 자리에 앉아 이름 모를 음식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30분 전의 자신을 마구 욕했다. 이렇게 되리란 걸 미리 알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에 속이 쓰렸다.
차인호가 예약했다는 식당에 들어가자 곧장 방으로 안내받았는데, 미리 준비된 널찍하고 고풍스러운 방이었다. 방에는 창문이 하나도 없었다. 어쩌면 주현을 위한 배려일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그게 기뻤다. 누군가 밖에서 보고 폭주 에스퍼가 있다고 신고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러나 그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문제가 있었으니. 방 안에 있는 게 주현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 함께 식사하러 왔으면서 그게 무슨 말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주현은 11년 동안이나 폐쇄된 곳에서 지내며 도시락을 받아 방에서 홀로 밥을 먹었다. 가끔 시간이 맞으면 동료들과 먹기도 했지만, 그것과 지금 상황을 비교하는 건 의미 없는 짓이다.
“입맛에 안 맞아요?”
“아뇨, 먹고 있습니다.”
서찬에게 대답한 주현이 젓가락을 들어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반찬을 조심스럽게 집었다. 그가 먹는 것을 확인한 서찬이 다시금 몸을 돌려 동료들과 큰 소리로 웃으며 떠들었다.
사방이 막힌 방에 있는 사람은 주현과 일반인 여럿뿐이다. 주현을 임무에 데려다준 운전수가 있기는 하지만, 그는 에스퍼가 아니고 무장도 하지 않았다.
카페에서는 그나마 괜찮았다. 한 면이 커다란 통유리라 일이 생기면 바로 박차고 나갈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곳은 사방이 막혀 있고, 창문도 없고, 주현을 막을 수 있는 사람조차 없다.
숨이 막혔다. 이토록 가까운 거리에 있다면 목에 달린 폭탄이 터지기도 전에 이 안에 있는 모두가 죽는다.
고작 반나절 함께 다니며 익숙해졌다고 이런 곳에 무작정 따라온 자신을 때리고 싶었다.
그는 폭주 에스퍼다. 그걸 잊으면 안 되는데 자꾸만 깜빡하는 순간들이 늘어 가고 있다. 그 시작은 분명 차인호가 주현의 앞에 나타난 후부터다.
“아, 방금 인호 씨에게서 연락 왔는데, 차가 많이 막혀서 조금 늦으신대요. 게이트 관련인지 에스퍼가 잔뜩 있다고.”
범진은 그렇게 말하며 휴대폰을 들어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다. 차인호가 찍은 듯한 사진 속에는 통제된 도로와 제복을 입은 에스퍼들이 분주한 얼굴로 흩어져 있었다.
“이 근처에 게이트가 있던가요?”
“제법 있을걸요? 공개되지 않은 것도 많으니까.”
“사진 속 도로에서 가장 가까운 건 폐쇄된 터널 안에 있는 AN-32입니다.”
낮은 속삭임에 방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주현에게로 향했다. 그에 은근히 긴장되었으나 주현은 티 내지 않으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시선이 몰려서 좋았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정확히는 게이트의 출현 후 폐쇄한 터널이죠. 도심지와 너무 가까워서 불안감을 조성한다고 알려지진 않았지만.”
“주현 씨야 그렇다 쳐도 피디님은 어떻게 아세요?”
“동생이 알려 줬어.”
쓰게 웃은 범진이 빈 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의 말대로 AN-32는 수많은 차가 오가던 터널 한가운데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게이트로, 어쩔 수 없이 터널을 폐쇄하고 새로운 도로를 만들게 한 주범이었다. 위치가 좀 안 좋았을 뿐이지 일반적인 게이트와 다를 거 없는 AN-32가 협회의 주목을 받게 된 건 그곳에서 출현하는 괴물 때문이다.
“나도 자세히 들은 건 아닌데, 거기서 나오는 괴물이 좀 성가시대.”
다른 괴물에 비하면 크기도 작은 편인데다 독이나 불을 뿜지도 않지만, 대신 그들은 은신이 뛰어났다. 단순히 숨는 게 아니라 몸을 투명하게 만들 수 있는 괴물은 눈을 깜빡이는 찰나의 순간에 사라진다.
몇 년 전 다른 게이트에 임무를 나갔다가 주현도 만난 적 있는 괴물이다. 당시 함께 파견되었던 에스퍼의 능력 덕에 크게 힘들이지 않고 잡을 수 있었는데, 주현 혼자 있었다면 상당히 힘들었을 것이다.
“아, 이거 기밀이니까 어디 가서 말하면 안 된다?”
장난스러우면서도 진지한 말에 사람들은 침을 꼴깍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주현은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에스퍼가 도로를 통제하고 있다면 괴물이 게이트를 통과한 게 분명했다. AN-32는 에스퍼가 상시 대기하며 관리하는 몇 안 되는 게이트 중 하나인데도 괴물을 놓쳤다면, 보초를 서던 에스퍼는 중상을 입었거나 사망했을 가능성이 컸다.
괜히 씁쓸해진 주현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각자 보거나 들은 신기한 게이트에 대해 떠들어 대느라 아무도 그런 주현을 알아채지 못했다.
범진이 빌려준 겉옷을 걸친 주현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밖으로 나왔다. 꽉 막힌 듯 답답했던 가슴이 조금이나마 풀렸다.
회식이 처음인 주현은 단순한 밥 한 끼가 아니라는 걸 처음 알았다. 다들 먹는 것보단 술을 마시고 대화하는 일에 훨씬 더 관심이 깊어 보였다. 그 안에서 명백하게 외부인인 주현은 시간이 지날수록 도심지에서 폭주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잠식되었다.
‘차인호가 있으면 좀 나을 것 같은데.’
제가 떠올려 놓고 괜히 민망해 돌멩이를 걷어찬 주현이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했다.
“산책 가세요?”
다가오는 인기척을 진작에 느끼고 있던 주현이 천천히 돌아섰다. 카메라를 짊어진 서찬이 씨익 웃었다.
“……더 드시지 않고.”
“에스퍼의 산책도 좋은 장면이 될 수 있잖아요.”
폭주 에스퍼가 무섭지도 않은지, 그는 성큼 다가와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한결같은 태도에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은 주현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없어도 책임 안 져요.”
“다큐는 재미없어도 돼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게 두려워서 도망친 주제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에 위로받는 자신이 웃겼다. 냉소적으로 입술을 씹은 주현이 밤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어디 가시는 거예요?”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갑니다.”
“왜죠?”
밝은 상가를 지나 기어코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선 주현이 힐끗 서찬을 바라보았다. 그의 어깨에는 여전히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이 장면도 방송으로 나가는 걸까? 너무 사소하고 재미없는 장면이라 아무도 보지 않을 것 같았다.
“늘 그래 왔으니까요.”
모두가 말했던 것처럼 그는 숨어서 살아야 하는 시궁쥐니까. 더럽고 위험한, 그러면서 하찮은 생명.
길을 외우며 걷던 주현은 점차 가로등이 드물어지고 거리가 지저분해진다는 걸 깨달았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게 당연하듯, 도시에는 음울한 뒷골목이 있다. 통칭 ‘쓰레기장’은 사회에서 내쳐진 사람이나 범법자가 모여들어 만든 질 낮은 동네다. 순진한 타지인이 함부로 들어섰다간 순식간에 몸뚱이 빼고 모든 것을 털린다. 물론 몸뚱이까지 털리는 경우가 없지는 않다.
도시 경관을 해치고 너무 위험하다는 이유로 여러 정책을 펼쳤지만, 쓰레기장을 깨끗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너무나도 긴 시간 동안 방치한 탓에 이미 뿌리부터 썩어 버렸기 때문이다.
아직 쓰레기장에 완전히 들어온 것도 아닌데 벌써 인적이 드물었다.
“이 근처 지리를 잘 아시는 것 같네요?”
“……어릴 때 몇 번 와 봤습니다.”
다른 곳은 11년 전과 비교했을 때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로 바뀌었지만, 쓰레기장과 그 주변만큼은 예전 그대로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밝고 시끄럽던 거리는 어둠에 잡아먹힌 것처럼 고요했다. 낡고 더럽고 녹슨 거리는 향수를 느낄 정도로 많이 와 본 것도 아닌데 어쩐지 그리운 기분을 느끼게 했다.
제법 산책이 길었다. 더 들어가기엔 서찬이 위험할 수도 있기에 이만 식당으로 가려고 돌아선 주현이 우뚝 멈춰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