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42화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 두 괴물을 능력으로 들어 올려 게이트가 있는 냇가로 온 주현이 천천히 내려놓았다. 입구라는 걸 알았는지 괴물들은 곧장 게이트로 향했다. 그리고 들어가기 전, 돌아선 어미가 물끄러미 주현을 바라보았다. 마치 감사 인사라도 하듯 진득한 시선이었다.
“……뭔가,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네요.”
천천히 물속으로 헤엄치는 괴물을 보며 서찬이 말했다. 범진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면 처벌받을 겁니다.”
“네?”
“괴물을 살려 둔 죄로요.”
옷에 묻은 점액을 최대한 털어 낸 주현이 어느 정도 마른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돌아섰다.
“임무는 끝났습니다.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죠.”
또다시 게이트를 건너는 건 힘들다는 판단하에 세 사람은 산속을 걸어서 이동하기로 했다. 사실 게이트 너머로 가는 게 훨씬 쉽고 빠르겠지만, 능력을 제법 사용한 탓에 불안해서 그럴 수 없었다.
“이제 돌아가면 되는 건가요?”
“네. 가서 보고서만 작성하면 됩니다.”
“직접 작성하시나요?”
“다른 분들은 어떨지 몰라도 폭주 에스퍼는 누구나 스스로 합니다.”
주현이 주로 맡는 암살 임무에는 보고서가 필요 없지만, 게이트 관련 임무는 정보 수집을 위해서 필수적으로 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아까 그 괴물을 살려 주신 이유가 있나요?”
범진의 질문에 주현은 입을 다물었다. 그도 정확한 답을 모르기 때문이다. 단순히 동정심을 느꼈다는 게 이유지만 그것만으로는 처벌까지 감수하기에 조금 모자라다.
그때 문득 고통과 절망에 젖은 붉은 눈이 떠올랐다. 그제야 주현은 이유를 알았다. 동질감.
“……원해서 이곳에 온 게 아닐 테니까요.”
주현의 부츠에 밟힌 나뭇가지가 반으로 부러졌다. 물에 젖어 축축한 신발은 불편했으나 그의 삶이 언제는 편했던가?
“계곡에 있는 게이트는 건너편에서 막아 두는 게 좋겠습니다. 또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되니까요.”
“게이트를 폐쇄하는 게 가능한 건가요?”
“보통은 불가능합니다. 다만 이 게이트는 물속이긴 해도 바닥에 있는 거라 막을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게이트는 허공에 떠 있다. 게이트를 막으려면 건너편에서 가림막을 설치하는 게 최선인데, 그렇게 하면 오히려 이목을 끌어서 가림막을 뚫고 더욱 많은 괴물이 밖으로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게이트에는 손대지 않고 주기적으로 안과 밖을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제대로 된 길조차 없는 산을 오르는 건 힘들었지만, BE-16 게이트에 있는 추적기 덕분에 헤매지 않고 도착할 수 있었다.
게이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행은 풀숲에서 나타난 세 사람에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설명을 듣고 나서야 현실에 괴물이 나와 있었다는 걸 알고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내려가는 게 어째 올라가는 것보다 더 힘드네.”
“원래 산이 그래. 넘어지면 진짜 죽는다.”
워낙 험지를 많이 다닌 덕에 요령껏 내려가던 주현은 뒤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귀를 쫑긋 세웠다. 누군가 미끄러지기라도 할까 집중하며 최대한 천천히 내려가던 그는 제작진의 대화가 어느새 확 작아졌다는 걸 눈치챘다.
보통 남들에게 알리기 싫은 대화를 할 때 목소리를 죽인다. 숨기려는 걸 굳이 엿들을 생각이 없는 주현이 헉헉거리는 서찬에게 도와줄까 물으려던 찰나였다.
“저기, 능력 좀 사용해 주시면 안 될까요?”
아까 얘기를 나누던 제작진 중 한 사람이 주현에게 물었다. 그에 주현뿐만 아니라 가장 큰 가방을 메고 묵묵히 내려오던 범진 또한 고개를 돌렸다.
“다른 에스퍼 분들은 다 그렇게 해 주셨는데.”
“염동력이면 사람 들어 올릴 수 있는 거 맞죠?”
물론 들어 올릴 수 있다. 원하는 대로 허공에 띄워서 간단하게 밑으로 내려가게 해 줄 수 있다.
그러나 주현은 흔쾌히 그러겠노라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폭주 에스퍼고, 곁에 가이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시한폭탄을 자극하는 것은 자살행위고, 이미 충분히 무서워서 가슴이 뛰고 있으니까.
이유가 너무 많아서 하나하나 말하기도 힘들었다. 잠시 망설이던 주현이 천천히 목소리를 뱉었다.
“……제 매칭 가이드가 아주 바쁜 분이거든요. 그런데도 시간 내서 가이딩해 주시는데, 미안해서라도 함부로 쓸 수가 없네요. 죄송합니다.”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는지 요청한 이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그러나 묘한 찝찝함보다 무거운 다리가 더욱 신경 쓰인 한 스태프가 인상을 팍 썼다.
“별것도 아닌 일 가지고 뭘 그렇게 말해요? 그거 조금 더 쓴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겠구먼.”
“야, 그만해.”
“아니, 그렇잖아. 안 그래도 오기 싫은 거 여기까지 와 줬는데 이 정돈 바랄 수 있는 거 아냐?”
다른 스태프의 만류를 뿌리친 남자와 주현의 시선이 맞닿았다. 머리가 젖은 탓에 온전하게 드러난 검붉은 눈동자가 나뭇잎 틈새로 빠져나온 햇살을 담고 번뜩였다.
“사람 무안하게 뭘 그렇게까지 말하, 냐고…….”
인상을 쓰지도, 이를 드러낸 것도 아니건만 거대한 들짐승을 앞에 둔 사람처럼 움츠러든 남자가 말끝을 흐리기 시작했다. 눈앞에 있는 이가 일반적인 에스퍼가 아닌, 폭주 에스퍼라는 걸 새삼 깨달은 게 분명했다.
명백하게 겁에 질린 낯을 보고 있자니 주현의 머릿속에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붉은 눈동자를 보고도 시선을 피하거나 온몸을 긴장시키지 않는 남자. 오히려 올곧게 시선을 건네며 씨익 웃어 버리는……. 최근 들어 곁에 없는데도 차인호를 생각하는 횟수가 늘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남몰래 한숨을 삼킨 주현이 몸을 돌려 다시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상당히 가라앉은 채로 힘든 산행을 하게 된 게 미안했지만, 안타깝게도 주현은 사람들의 기분을 즐겁게 만드는 방법을 모른다.
결국 대기하고 있는 자동차에 도착했을 때는 모두가 흙먼지로 더러워져 있었다.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서찬과 함께 차에 올라탄 주현은 유리 막을 두드려서 운전석에 누워 곤히 자는 직원을 깨웠다.
돌아가는 길은 노을로 가득 차 있었다. 창밖을 보며 얼른 집에 도착하길 기다리던 주현의 귀로 서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부터 할 질문이 불쾌하실 수도 있는데, 그냥 적당히 대답해 주세요. 위쪽에서 꼭 하라고 난리여서요.”
서찬은 얼굴을 찌푸린 채 제법 걱정스럽게 주현을 살폈다. 위에서 까라면 까야 하는 입장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는 주현이 괜찮다는 뜻으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인호 씨와 매칭하게 된 과정에 대해 알려 주실 수 있나요?”
이런 질문이 왜 안 나오나 했다. 사실상 여럿 있는 폭주 에스퍼 중 주현이 유명해지게 된 유일한 이유인데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땐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폭주 에스퍼와 매칭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냐고요.”
주현을 포함한 C동 에스퍼 모두가 오랜만에 웃음이 나올 정도로 재미있는 헛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말도 안 되는 일은 헛소문이 아니었고, 기어코 실제로 일어나고 말았다.
“그런데 차인호 씨가 왔고, 뭐, 어쩌다 보니 계약서에 사인했네요.”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보았다든가 차인호가 실수로 호출기를 눌러서 주현이 피를 질질 흘리며 끌려 나갔다든가. 그런 이야기는 굳이 할 필요 없었다. 두 사람만의 추억이라는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누구나 숨기고 싶은 것 정도는 있으니까.
“두 분 사이는 좋으신가요?”
“나쁘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뒷말은 꿀꺽 삼킨 주현이 새침하게 발끝을 까딱였다.
“배우 차인호 씨는 어떤 가이드입니까?”
힘들 텐데도 일정한 높이로 카메라를 들고 있는 서찬이 대단해 보였다. 그와는 별개로 질문은 대답하기 곤란한 것들뿐이긴 했지만 말이다.
어떤 가이드냐고? 주현은 못 해도 다섯 개 정도 선택지를 받고 싶었다. 그가 알고 있는 가이드는 쓰레기 무더기와 차인호. 둘뿐이기 때문이다. 쓰레기에 비하면 차인호는 아주 괜찮은 가이드다. 그러나 서찬과 윗분들이 원하는 대답은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아주 따뜻한 가이딩을 하는 분입니다.”
지금껏 주현이 받아 왔던 차갑고 고통스러운 가이딩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따스하고 부드러운 가이딩. 저도 모르게 입술을 끌어 올린 주현이 시선을 가볍게 내리깔았다.
“다치면 왜 다쳤냐고 잔소리하면서도 결국 가이딩해 줘요. 만날 때마다 부족하지 않냐고 묻고, 제가 모르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이 해 줍니다. 가끔 짓궂기도 하지만.”
창문을 통과해 들어온 노을이 폭주 에스퍼의 얼굴을 비췄다. 주홍빛 황혼을 담은 눈동자가 작은 등불처럼 반짝였다. 무엇을 생각했는지 웃음 섞인 숨결을 뱉어 낸 주현이 서찬을, 정확히는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그 사람이 제 매칭 가이드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잠시만요. 지금 이 말은 편집해 주세요.”
순식간에 정색한 얼굴에 서찬이 어색하게 웃었다.
다시 생각하니 제가 뱉은 말이 무척 부끄럽다는 걸 깨달은 주현은 목덜미를 넘어 볼까지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편집해 주겠다는 확신을 받고 싶었으나 야속한 서찬은 눈조차 마주치지 않고 손바닥을 펼쳤다.
“죄송하지만 그건 제 권한이 아니라서요.”
절망한 주현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떨궜다. 역시 방송 같은 건 정말로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