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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46/161)

폭주 에스퍼 41화

누구에게도 말해 본 적 없었다. 사실 몇 번 말한 적이 있지만 들은 사람은 전부 다 죽었다. 이미 없는 동료들을 잠시 생각한 주현이 몇 걸음 더 걸어 나간 순간이었다.

“그때 심정이 어땠나요?”

범진의 표정은 진지하고 어떠한 조롱이나 호기심도 없었다. 거의 비장하기까지 한 얼굴에 문득 범규를 떠올린 주현이 입을 열었다.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파악한 후, 죽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장면이 방송으로 나간다면 전 국민이 주현이 얼마나 추악하고 비참한 인간인지 알 것이다. 그게 두려운 한편, 머릿속 한구석에는 사람들이 그를 욕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폭주 후에도 살아남은 건 기적이라고들 하는데, 저에겐 죄를 갚으라는 형벌처럼 느껴졌습니다.”

살아갈수록 죄를 갚기는커녕 더욱 쌓이기만 하는 인생에 누군가 돌을 던져 준다면 조금이나마 마음이 가벼워질 텐데.

“그 생각은 지금도 유효합니까?”

주현은 범진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부러진 나무 옆, 물속에서 이상한 걸 발견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주현의 눈빛이 날카롭게 벼려지자 그를 본 범진과 서찬이 몸을 긴장시켰다. 주현은 나뭇가지를 부러뜨려 기묘하게 흔들리는 물속으로 쿡 찔러 넣었다. 깊어 봤자 허벅지를 조금 넘는 물인데 나뭇가지는 끝까지 들어가는 걸로 모자라 팔까지 삼키고도 바닥에 닿지 않았다.

“이게 뭐죠?”

“……지금껏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게이트입니다.”

누군가가 숨을 들이켰다. 누구인지 알 수도 없고 가려낼 마음도 없다. 주현도 같은 심정이었으니까.

“게이트 내부에 또 다른 게이트가 있다는 건가요?”

“흔하지는 않지만 종종 발견됩니다. 쌍둥이 게이트라고 하는데, 보통 현실에서도 가까운 거리에 있습니다.”

세 사람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범진은 고민스러워 보였고, 서찬은 조금 두려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들어가실 건가요?”

“반대쪽으로 어떤 괴물이 넘어갔을지 모르니 가야 합니다.”

게이트가 물속에 있으니 반대편도 물속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쉽게 발견되지 않은 것도 이해가 되었다.

반대쪽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만큼 범진과 서찬이 무작정 들어가는 것은 위험했다. 두 사람을 입구 게이트로 데려다주고 혼자 넘어야겠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서찬아, 카메라 비닐로 감싸라.”

범진은 기어코 따라 들어갈 생각인 것 같았다. 가방에서 커다란 비닐을 꺼내 가방과 방송 장비를 감싸는 그를 보며 주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미리 말해 두는데, 끝까지 따라갈 거예요. 그게 저희 일이니까요.”

“예, 저도 이젠 안 말려요.”

범진과 서찬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 동시에 두 사람은 투명한 막에 감싸여 허공에 떠올랐다. 그리고 무언가 말하기도 전, 물속으로 처박혔다.

게이트를 통과한 주현은 분명 위에서 아래로 들어갔는데 어느새 떠오르고 있다는 걸 깨닫곤 힘껏 헤엄치기 시작했다.

촥- 온몸이 푹 젖어 겨우 물 밖으로 나온 주현이 여전히 둥그런 막 안에 있던 범진과 서찬을 흙바닥 위에 내려놓았다. 어리둥절해 보이던 두 사람은 물을 털어 내기 위해 애쓰고 있는 주현을 망연자실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본인에게는 능력을 사용할 수 없는 겁니까?”

“아뇨.”

“그런데 왜…….”

얼굴에 달라붙는 머리카락이 거슬렸던 주현이 앞머리를 뒤로 확 쓸어 넘겼다. 검붉은 눈동자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피부를 타고 흘러내리는 물방울이 간지럽다는 생각을 하며 주현이 입을 열었다.

“그야, 아까우니까?”

어차피 괴물과 싸우다 보면 폭삭 젖을 텐데 굳이 지금 능력을 쓸 필요는 없다. 최대한 아끼고 사는 것에 익숙해진 주현은 자신의 발언에 대해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주변을 살폈다.

그들이 있는 곳은 제법 큰 냇가가 있는 산속이었다. 정황상 아까 전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왔던 산과 같은 공간일 텐데, 당연하게도 정확한 위치까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쩐지 침묵한 두 사람을 등지고 걸으며 이리저리 둘러보던 주현은 게이트 너머에서 봤던 것과 흡사한 모양새로 쓰러져 있는 나무를 발견했다.

“예상이 맞았네요.”

괴물이 넘어왔다. 주현은 제발 멀리 가지는 않았기를 빌며 이빨 자국이 난 나무를 쓰다듬었다.

다행스럽게도 괴물에 대한 단서는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괴물의 것으로 추정되는 점액질이 길을 따라 이어져서 그들이 빠졌던 것보다 조금 더 큰 냇가에 닿아 있었다.

떨어진 곳에 두 사람을 둔 주현이 그들 주위로 보이지 않는 방어막을 만들곤 물속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다른 세상에서 온 괴물이 현실에 잘 융화되기는 힘들다. 기이할 정도로 새파란 피부가 냇가의 가장 깊은 곳에 잠겨 있었다. 어떤 괴물인지 확인하기 전에는 무작정 공격할 수 없었다.

주현이 능력을 사용해서 조심스럽게 괴물을 건드렸다. 침입자가 있다는 걸 알았는지 괴물이 빠른 속도로 물 밖으로 기어 나왔다.

참방참방, 도롱뇽을 닮은 새파랗고 거대한 괴물이 천천히 다가왔다. 옆구리에 한 쌍의 다리가 더 달려 있다는 사실만 빼면 일반적인 괴물에 비해 좀 친숙한 모양새였다.

괴물이 입을 벌리자 삐죽삐죽한 이빨이 가득 들어차 있는 게 보였다. 나무를 쓰러뜨린 게 이 녀석인 듯했다. 피부가 부드러워서 주현의 능력이라면 단숨에 해치울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곧장 능력을 사용하지 못했다.

[그으으-]

괴물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굵고 날카로운 나뭇가지가 괴물의 입천장을 뚫고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다친 건가?”

서찬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괴물의 보라색 피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게이트 너머의 무른 나무가 주식인데, 이곳에 와서 단단한 나무를 먹으려다 다친 모양이에요.”

상처로도 충분히 지쳤는지 괴물은 숨을 빠르게 내쉬며 몸을 떨었다. 괴물의 눈은 붉은색이었다. 주현보다 훨씬 밝은 루비색으로 빛나는 눈은 어쩐지 슬퍼 보였다. 분명 주현의 감정이 그런 환상을 만든 것일 터다.

“…….”

단번에 숨통을 끊기 위해 주현이 최대한 날카로운 모양을 상상하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어? 한 마리 더 있는데요?”

눈앞에 있는 괴물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튀어나온 또 다른 괴물은 기껏해야 대형견 정도의 크기에다 옅은 하늘색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새끼였다.

새끼는 제 어미를 지키겠다는 듯 괴물과 주현 사이를 가로막았다.

의외의 상황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주현은 이를 드러내며 높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는 괴물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작고 어려도 괴물은 괴물이다. 게이트 너머로 나온 이상 죽여야 하는 게 당연하다.

“새끼를 데리고 나온 걸까요?”

“아마 실수로 새끼가 게이트에 빠져서 어미가 따라 나온 걸 겁니다. 어미가 먼저 들어오기에는 입구가 작아요.”

그렇게 나왔는데 돌아가는 길을 찾지 못하고 굶주림을 채우려 나무를 씹었다가 다친 것일 터다.

그러나 주현은 다친 후에도 어미가 멈추지 않고 나무를 씹었다는 걸 알고 있다. 잘린 나무 밑동에 보라색 피가 묻어 있었는데, 그 아래로 잘게 잘린 나뭇조각이 곳곳에 있었다.

[그르르…….]

새끼를 먹이기 위해 고통을 참으며 나무를 씹은 어미 괴물이 새끼를 감싸듯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이 장면이 방송으로 나간다면 주현은 처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무능하다는 딱지도 붙고, 잘못하면 그의 동료들도 욕먹을 수 있다.

그러나 주현은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순간 정도엔 마음대로 하고 싶었다. 뒤이어 밀어닥칠 후폭풍이 아무리 거세다 해도 스스로 고른 것이기에 후회도 원망도 없다.

주현의 오른손이 허공을 가볍게 갈랐다. 그와 함께 거대한 도롱뇽의 몸이 떠올랐다. 약간의 발버둥이 있었지만, 지친 몸으로는 주현의 능력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새끼 괴물이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떠오르는 어미 아래를 맴돌았다.

손가락이 까딱 움직임과 동시에 거대한 파란색 괴물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범진과 서찬이 움찔 떨었을 정도였다. 아래를 기던 새끼가 비명 지르듯 울며 주현을 향해 빠르게 달려들었다.

“주현 씨!”

범진의 외침이 귀를 날카롭게 쏘았다. 주현은 온몸을 덮은 차갑고 미끌거리지만 부드러운 피부를 쓰다듬었다.

“걱정 마. 네 엄마는 살아 있어.”

다른 곳은 다 연해도 두 눈만은 제 어미와 똑같이 붉었다.

[그우우…….]

씨근덕거리며 주현을 깔아뭉갠 새끼가 어미의 울음소리에 위를 바라보았다. 보라색 피로 흠뻑 젖은 기다란 나뭇조각이 허공에 떠 있고, 그 옆에서 온전히 입을 닫은 어미가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왔다.

새끼는 상황을 파악하는 듯 여전히 가쁜 숨을 쉬며 멍하게 어미를 바라보았다. 어미가 한 번 더 울고 나서야 새끼는 곧장 주현에게서 내려와 어미에게로 달려갔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본 주현이 뻐근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집으로 돌려보내 줄게.”

두 쌍의 붉은 눈이 주현에게 닿았다. 괴물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어쩐지 다시 달려들지는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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