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40화
“……안전장치가 있습니다.”
“안전장치는 어떤 식으로 작동하죠?”
“폭주하게 되면 파장의 변화를 기계가 감지합니다. 24시간 내내 모니터링하기 때문에 빠르게 대처할 수 있어요.”
“기계가 감지한 후에는 어떻게 됩니까?”
폭주가 감지되면 두식이나 태석이 버튼을 누른다. 그러면 목에 달린 폭탄이 터지며 비극이 끝난다.
원래 하던 대로 해야 한다는 범진의 주장에 그들이 타고 있는 차는 강화 유리로 절반이 나뉘어 있고,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 주현의 주머니에는 가이딩 약물이 들어 있다. 부작용이 커서 일반적인 에스퍼는 줘도 거절하는 약물은 그들에겐 구원이었다.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 해당 에스퍼를 사살합니다.”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한 주현이 말했다. 그러니 설령 그가 폭주한다 해도 안심하라는 의미가 잘 전달되기를 바라며.
“원격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누구도 다치지 않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임무지에 도착한 자동차가 멈췄다.
주현이 차에서 내렸고, 서찬이 그 뒤를 바짝 붙었다. 다른 차량으로 쫓아온 범진이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그들 앞에는 인적이 드물어 보이는 높은 산이 있었다.
“여길 올라가야 하는 거예요? 길도 없는 것 같은데.”
“게이트가 있는 곳에 길 만들어서 뭐 하냐. 괜히 일반인들 얼쩡거리다가 사고만 나지.”
서찬을 타박하는 범진의 말을 들으며, 주현은 다시 한번 무기와 응급 도구 등을 점검했다. 마지막으로 스카프 밑 초커가 단단히 고정된 걸 확인한 그가 앞장서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싫은 얼굴을 하면서도 <게이트 데이트> 제작진들은 게으름 없이 주현의 뒤를 따랐다.
처음엔 행동 하나하나를 전부 다 찍고 있다는 사실에 부담되고 불편했으나 금방 적응되었다.
“우왓!”
주현이 미끄러질 뻔한 서찬을 능력으로 들어 올렸다.
“조심하세요. 저 밑으로 구르면 시체도 못 건지니까.”
“고, 고마워요.”
땅에 두 발을 댄 서찬은 여전히 카메라를 놓지 않은 채 가슴을 쓸어내렸다. 제법 놀란 것 같았는데, 회복이 빠른지 금방 또 걷기 시작하는 서찬에 주현도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주현 씨는 능력이 뭡니까?”
얼마나 더 갔을까. 의외로 체력이 좋은 듯 다른 이들보다 확연히 땀을 덜 흘리는 범진이 물었다.
에스퍼가 가지고 있는 능력은 저마다 형태도 범위도 다르다. 그러나 비슷한 계열로 묶이는 능력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염동력은 제법 흔한 능력 중 하나다. 주현처럼 물리적인 형태로 만들어 조종할 수 있는 경우는 드물긴 하나 굳이 그것까지 말할 필요는 없었다.
“염동력입니다.”
“편리한 능력이군요.”
“그럼 밤에 손으로 불 꺼 본 적 없으시겠네요?”
서찬은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도 웃을 힘이 남아 있는지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주현은 능력을 사용해 카메라의 무게를 줄여 줄까 고민했으나 괜히 낭비했다가 폭주라도 할까 두려워 그만뒀다. 대신 속도를 조금 늦춰 허리까지 자란 풀을 헤치며 말했다.
“단 한 번도 그런 사사로운 일에 능력을 사용해 본 적 없습니다.”
“리모컨 가져오는 것도요? 빨래 들고 가다가 양말이 떨어져도요? ……왜요?!”
정말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서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런 서찬을 말리려 손을 든 범진도 내심 궁금하긴 한지 주현을 힐끗거렸다. 심지어는 뒤에서 따라오던 다른 제작진도 그랬는데, 말도 안 된다고 중얼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시선이 모이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주현이 눈을 내리깔곤 나름대로 솔직하게 말했다.
“기껏 받은 가이딩이 아까우니까요.”
담담히 흘러나온 말에 범진도 서찬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주현으로선 너무나도 당연한 이유라 그들의 반응이 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저 말고 다른 동료들도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면 능력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주현을 제외하곤 다들 에스퍼로 발현하고 10년은 지나서 폭주한 터라 일상에서 능력을 자제하는 것을 힘들어하지만, 의외로 금방 적응한다. 폭주했을 때의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은 것도 빠른 적응의 이유 중 하나다.
“여기서부터는 정말로 조심하셔야 합니다. 게이트가 코앞에 있으니까.”
점이 깜빡거리는 탐지기를 주머니에 넣은 주현이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모든 게이트를 에스퍼가 지키고 서 있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비교적 크기도 작고 괴물의 출현도 적은 게이트는 우선순위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고, BE-16도 그런 게이트 중 하나다.
‘에스퍼의 고됨을 알리려면 좀 더 위험한 임무를 맡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주현의 질문에 태석은 미간을 손가락으로 꼬집으며 눈을 꾹 감았다 떴다.
‘그건 다른 에스퍼가 할 일이지. 잊은 건가? 너는 폭주 에스퍼다. 가만히 있어도 무서운데 엉망진창이 되어서 간신히 괴물을 쓰러뜨리는 장면이 나가면 어떤 반응이 돌아오겠나?’
시한폭탄의 숫자가 급속하게 줄어든 것처럼 보일 터다.
그러니 폭주 에스퍼인 주현은 그저 평온하고 순조롭게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그래야 세간의 호의적인 관심이 유지된다. 혹은 폭주 에스퍼가 그리 위험하기만 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닫거나.
태석도 범진도 그리 말했으나 주현은 실제로 위험한 사람을 위험하게 생각하는 건 당연하지 않냐는 입장이다. 폭주 에스퍼에게 호의적인 관심은 없으니만 못하고. 여러 사람의 노력이 모여 이렇게 촬영하고 있는 만큼 하기 싫다고 내뺄 생각은 없지만, 이 기획에 회의적인 건 어쩔 수 없다는 말이다.
* * *
BE-16는 나무 사이에 있는 작은 원형 게이트다.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작은 게이트는 주변에 괴물이 나온 흔적이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부터 안으로 들어갈 건데 이곳에서 대기하고 계세요.”
“촬영하러 왔는데 어떻게 주현 씨 혼자 보내겠어요? 당연히 같이 들어갈 겁니다.”
범진의 말에 가장 먼저 반박한 사람은 주현이 아니었다. 묵묵히 따라오던 제작진들이 경악한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피디님, 폭주 에스퍼에게만 의지하며 들어가기엔 너무 위험해요!”
“맞아요. 지금까지는 가이드도 있었고, 다들 높은 등급의 에스퍼였는데 오늘은 아니잖아요.”
바로 옆에 그 폭주 에스퍼가 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충분히 이해되는 반발이었다. 그러나 범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안경 너머로 비치는 눈이 무척 차가웠다.
“게이트 들어갈 거 알고 여기까지 온 거 아니야?”
“그렇긴 한데……. 이 정도로 아무것도 없을 줄은 몰랐죠.”
다른 에스퍼에게는 당연하게 붙어 있던 가이드나 의료진, 하다못해 비상시에 나서 줄 동료도, 아무것도 없었다. 홀로 서 있는 주현만을 믿고 게이트를 넘기란 솔직히 힘든 일이다.
범진은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으나 그건 제작진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죽고 싶은 마음은 없다며 차라리 돌아가겠다는 사람까지 나오자 범진이 커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나 혼자라도 간다. 너희는 여기 있어.”
“저도 갈게요.”
불쑥 끼어든 사람은 침묵하며 묵묵히 카메라를 들고 있던 서찬이었다. 그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완전히 지운 채 굳은 얼굴로 서서 범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조금 놀란 듯했던 범진은 고개를 끄덕이곤 다른 이들도 훑어보았지만, 더 이상의 지원자는 나오지 않았다.
주현은 그냥 다 밖에 있으라고 말했으나 둘은 완강했다. 그렇게 결국 범진과 주현, 서찬. 셋이 게이트를 넘게 되었다.
<게이트 데이트>를 찍으며 지금껏 아홉 번이나 게이트를 넘은 만큼, 범진과 서찬은 제법 능숙하게 게이트를 넘어섰다. 저번에 가람과 함께 들어갔던 ES-23은 처음 발견된 게이트라 어떤 환경인지 몰랐지만, BE-16은 충분히 파헤쳐진 게이트라 누구도 당황하지 않았다.
주현은 발목에서 찰랑이는 물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사방에 보이는 것이라곤 물과 그 안에서 불쑥 솟아오른 이름 모를 연두색 나무들뿐이었다.
게이트를 넘기 전 챙겨 온 장화로 갈아 신은 범진과 서찬은 주현보다 훨씬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곳곳에 구멍이 있으니 조심하면서 따라오세요.”
구멍은 성인 남성의 주먹 정도 크기라서 발이 푹 빠지지는 않겠으나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을 수도 있었다. 침을 꿀꺽 삼킨 범진과 서찬이 고개를 끄덕이곤 주현의 뒤를 따랐다.
“주현 씨는 몇 살 때 폭주했나요?”
괴물은 나타나지 않고, 세 사람이 물을 찰박이는 소리만 일정하게 울렸다. 긴장이 조금 풀렸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범진이 물었다.
“열네 살이요.”
탐지기로 게이트의 위치를 다시 한번 확인한 주현이 눈을 가늘게 뜨며 사방을 살폈다. 사전 정보에 따르면 이렇게까지 조용한 게이트는 아니었는데. 어딘가 이상했다.
“발현한 직후 아닙니까?”
“발현과 동시에 폭주했습니다.”
“그게, 그게 가능해요?”
“저도 몰랐는데 가능하네요.”
주현의 걸음이 멈췄다. 두 팔을 벌려도 다 끌어안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란 나무가 기묘한 모양으로 부러져 있었다. 마치 삐죽삐죽한 도끼로 베어 밑동을 조금씩 갉아 낸 것 같은 모양이었다.
“휘말린 사람이 있습니까?”
진지하게 나무를 살피던 주현이 휙 고개를 돌렸다. 곧장 시선을 마주친 범진은 물러서지 않을 기세였다.
동그란 보름달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붉게 물든 밤은 눈꺼풀 안쪽에 달라붙어 눈을 깜빡거리는 찰나마다 그의 죄를 상기시킨다. 주현은 패배한 개처럼 힘없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 가족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