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39화
“범규가 폭주한 후로, 한 번도 전화해 본 적 없어요. 부모님과 여동생이 범규가 저와 얘기하고 싶다고……. 기다린다고 했는데도 차마 받을 수가 없더라고요.”
범진의 동생은 죽었다. 범규는 죽었고, 주현이 죽였다. 그의 실수로 범진은 동생을 잃었다. 덜덜 떨리는 손에 힘을 주자 컵이 찌그러지는 소리가 크게 울렸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 같아요. 그저 귀엽고 어린 내 동생이 폭주 에스퍼가 되었다는 사실을요.”
에스퍼가 폭주하는 비율은 무척 낮다. 기본적으로 협회에 등록된 에스퍼라면 누구나 충분한 가이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그렇게…….”
아주 운이 없어야 폭주하고, 거기서 더더욱 운이 없어야만 폭주 후에 살아남는다.
허리를 바짝 숙인 채 끝없이 눈물을 닦아 내던 범진이 고개를 들었다. 잔뜩 붉어져선 헐떡이는 얼굴이 범규가 울던 얼굴과 무척 닮아 있었다.
“범규의 마지막 임무에 주현 씨가 함께 있었죠?”
어떻게 알았을까? 아마 부모님에게 들었을 것이다. 아무리 방송국 PD라고 해도 그들의 임무는 기밀 사항이니까.
눈을 감자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헐떡이는 숨소리와 비릿한 바다 냄새, 아니, 피 냄새. 부서지는 항구와 크고 짧은 총성. 결코 잊을 수 없는 장면을 다시금 되새긴 주현이 입을 벌렸으나 범진이 가로막았다.
“사과하지 마세요. 잘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주현 씨. 범규가 부모님을 만날 수 있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범규가 홀로 죽지 않게 해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그 애가 막내라서 그런지 외로움을 많이 타거든요.”
“……감사 인사를 받을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아뇨. 부모님께 다 들었어요. 주현 씨 아니었으면 평생 엄마 아빠 못 만났을 거라고 범규가 몇 번이고 말했대요.”
확실히 주현이 죽을 거라 생각하고 허락해 주지 않았다면 범규는 가족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주현이 범규의 부탁을 거절했다면 그는 지금도 살아 있었을 터다. 목격자를 살려 주자는 말을 무시했다면, 곧장 C동으로 돌아갔다면. 그러나 후회는 아무리 빨리해도 늦다.
“동생이 죽고 장례식도 마쳤는데 실감이 안 나는 거 있죠? 그러다 주현 씨가 나오는 방송을 봤는데, 그제야 범규도 무서웠을 거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윽, 달래 줄 수가 없네요. 이미 세상에 없으니까.”
좁은 차 안은 온통 울음소리로 가득 찼다.
큰 소리로 우는 법을 모르는 주현은 무릎을 꽉 조이며 이를 악물었다. 너무 화가 나서 당장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으나, 길거리에서 폭주한다면 주현은 죽어도 눈조차 편히 감지 못할 것이다.
“그깟 폭주가 뭐라고 제 동생을 외롭게 만들었을까요?”
범규는 외로웠나? 그 안에서 태어나 평생을 나뒹굴며 사는 중인 주현은 외롭다는 게 어떤 심정인지 잘 모른다. 외롭지 않은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한참을 훌쩍이던 범진이 차에 있던 티슈로 얼굴을 문질렀다. 콧물까지 훔친 그는 입을 다물고 바닥 어딘가를 보며 침묵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주현도 침묵에 동참하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거 아세요? 사실 폭주 에스퍼가 공공장소에 오면 안 된다고 법으로 정해진 건 없어요. 전부 다 협회 내부 규정일 뿐이죠.”
그러나 주현은 에스퍼에게 있어서 협회의 규정은 법과도 같다는 걸 알고 있다. 가이드를 통제하고 장악하고 있는 협회에 반항한다는 건 평생을 가이딩에 허덕이며 살게 될 거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그래도 주현이 시내에 나오는 게 불법을 저지른 건 아니라는 말에 조금이나마 기분이 나아졌다.
“잘은 모르지만 폭주했을 때를 대비한 안전장치가 있다면서요? 그렇다면 숨어 있을 이유가 뭐가 있나요.”
“안전장치라고 해도 폭주한 직후에 곧바로 발동하는 건 아닙니다. 그사이에 피해가 생길 수도 있어요.”
“언젠가 넘어지는 게 무섭다고 평생 일어서지 않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퉁퉁 부은 눈으로 코를 훌쩍이며 말하는 범진에게 주현은 그런 게 아니라고 따지고 싶었다. 넘어져도 혼자 넘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에 다리를 잘라 내는 거라고, 그래야 모두가 안전하다고,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범규와 닮은 얼굴로 웃는 그를 보면 말문이 턱 막혀서.
“후회는 충분히 한 것 같아요.”
차인호는 편집에 참견하면서까지 주현의 이미지를 순화하려고 노력했다. 왜? 그야 주현도 모른다. 주현이 욕을 덜 먹는 게 그와 무슨 관련이 있다고?
머리 위에 간신히 매달려 있던 후드가 기어코 뒤로 넘어갔다. 드러난 폭주 에스퍼의 얼굴은 멍했고, 두 눈은 화면보다 더 예쁜 색으로 빛났다.
다시 한번 코 밑을 훔친 범진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세상에 알려 줍시다.”
내민 손을 잡은 이유는 주현도 모른다. 다만 당장은 폭주하지 않을 거라는 이유 모를 확신이 들었을 뿐이다.
* * *
-정말로 제가 없어도 괜찮겠어요? 지금이라도 갈까요?
“괜찮다고 말했잖습니까. 그다지 어려운 임무도 아니고, 애초에 바로 올 수 있는 거리도 아니잖아요.”
차인호는 현재 촬영을 위해 기차로 몇 시간은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지역에 있다. 그러면서도 계속 오겠다고 말하는 그가 어이없는 한편, 누군가 신경 써 주는 게 기분 나쁘지만은 않았다.
오늘은 <게이트 데이트> 촬영 날이다. 다른 에스퍼들의 촬영은 끝났고, 벌써 주현의 차례가 되었다. 어제 5편이 방송되었다고 했으니 제법 빠듯한 일정이었다.
C동 동료들과 나란히 앉아 함께 봤는데, 5편의 주인공은 가람이었다. 언제나 그랬듯 화려한 날개를 펄럭이며 재치 있는 말을 던지는 가람은 확실히 카메라에 익숙한 티가 났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화의 에스퍼도 각자 인지도가 있어 주현의 걱정은 높아져만 갔다.
그러나 고민해 봤자 이미 정해진 걸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최대한 빠르게 임무를 마치는 것뿐이다.
-가이드도 없는데 너무 무리하지는 마세요. 만약 가이딩이 필요할 것 같다 싶으시면 언제든 연락하시고요.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차인호의 목소리는 늘 그렇듯 부드럽다. 수화기를 들고 회색 벽에 기대 있던 주현은 고작 그 정도로 불안이 잦아드는 자신을 꾸짖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촬영 열심히 하세요.”
전화가 끊긴 후에도 그대로 서서 눈을 감고 있던 주현이 깊은숨을 내쉬곤 걸음을 내디뎠다.
* * *
주현을 태우고 산길을 내려간 차는 한참을 달려 주변에 나무 말곤 아무것도 없는 도로에서 멈췄다. 민가가 없는 곳에 약속 장소를 잡은 게 주현을 위한 것인지는 몰라도 그로서는 좋은 일이었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범진이 활짝 웃으며 주현을 반겼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이쪽은 오늘 하루 주현 씨를 찍어 줄 김서찬이라는 친구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야구 모자를 쓴 서찬이 씨익 웃었다. 가무잡잡한 피부와 앳된 미소가 잘 어울렸다. 그 외에도 음향이니 뭐니 몇몇 사람을 소개받았으나 범진이나 서찬만큼 그를 달가워하는 이는 없었다.
“사람이 좀 적죠? 다큐멘터리라 최대한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최소한의 인원으로 촬영하고 있습니다.”
안경을 추켜올린 범진이 말했다. 그러나 주현은 그것 말고 또 다른 이유도 있다는 걸 눈치챘다.
“뭐, 그렇다고 해도 다른 분들 촬영에 비해서 유독 적기는 하지만요.”
왜냐하면 주현이 폭주 에스퍼니까. 시한폭탄 옆에 머물고 싶은 사람은 없다. 죄인이 된 주현이 부끄러움을 느끼며 바닥을 응시했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괜히…….”
“죄송할 거 없어요. 덕분에 제가 보너스를 왕창 받으니까.”
불쑥 끼어든 서찬이 말했다. 주현이 움찔거리며 반사적으로 물러섰으나 서찬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 후 일정에 대해 몇 마디 더 나눈 후, 본격적으로 촬영이 시작되었다. 뒷좌석에 서찬과 함께 탄 주현은 긴장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솔직히 주현은 폭주 에스퍼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싶다는 범진의 소망이 그다지 현실성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에스퍼의 폭주는 쉽게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일반인은 휘말리는 순간 죽은 목숨이라고 보면 될 정도인데, 그런 위험을 어떻게 좋게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어쨌든 높은 분들이 주현의 촬영을 허락했고, 그가 벗어날 방법은 없다. 이왕 하기로 한 거 원하는 대로 굴어 주기로 한 주현이 힐끗 서찬을, 정확히는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그거 안 무겁습니까?”
“익숙해져서 괜찮아요.”
그러고 보니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있는 팔뚝이 제법 튼실했다. 본인이 괜찮다는데 더 말 붙이기 힘들었던 주현이 고개를 돌렸다.
“지금 어디 가는 건가요?”
이미 목적지를 알고 있는 서찬이 물었다. 시청자들에게 상황 전달을 위해 여러 질문이 오갈 거라던 범진의 말을 떠올린 주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BE-16 게이트로 가는 중입니다. 게이트 내를 둘러보고 괴물을 토벌하는 게 이번 임무입니다.”
BE-16은 주로 그린과 블루 등급 괴물이 나오는 게이트라 주현 혼자서도 쉽게 처리할 수 있다. 평소 맡는 것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로 간단한 임무였다.
“가이드 없이 가도 되는 겁니까?”
미리 들었던 질문임에도 순간 말문이 막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주현은 침착하게 정해져 있던 대사를 뱉었다.
“가이드의 안전을 위해서 폭주 에스퍼는 원래 가이드 동행 없이 임무에 갑니다.”
“그렇다면 폭주에 대한 위험이 더 커지지 않나요?”
이건 미리 듣지 못했던 질문이었다. 주현은 스카프 아래에 숨겨져 있는 초커를 말해도 될지 고민했다. 사람에게 달려드는 맹견처럼 목줄을 차고 관리되고 있다는 사실을 떠벌리는 건 죽어도 싫었으나, 그로 인해 시민들의 불안이 가라앉는다면야 감수해야 할 수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