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38화
딸랑- 맑은 종소리에도 놀라 움찔한 주현은 초조함을 숨기려 애쓰며 한 걸음씩 가게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현재 그가 걸치고 있는 건 평소 임무 때 입는 옷이 아닌 흰색 후드티였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폭주 에스퍼라는 걸 알리는 옷을 입으면 어떤 소란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이유였다. 그가 가진 사복은 대부분 낡고 해져서 그나마 멀쩡한 후드티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스카프를 숨기고 모자까지 눌러쓴 주현은 쭈뼛거리며 카운터로 다가갔다.
살면서 처음 들어와 본 카페에선 향긋한 커피 냄새가 났다. 채경에게서 어떻게 주문하는지 미리 배웠지만, 막상 직원 앞에 서니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저기, 손님? 주문 도와드릴까요?”
생각하는 데 시간을 너무 잡아먹었는지 직원의 목소리가 곱지 않았다.
주현은 미안과 당황을 동시에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친 직원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고, 그제야 제 눈 색을 떠올린 주현이 다시금 시선을 내리깔았다.
뭔가 들은 건 많은데 명확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그래서 주현은 채경이 필살기라며 알려 준 걸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요즘 제일 잘나가는 걸로 주세요.”
“네? 아, 아, 네! 요즘 제일 잘나가는…… 아! 피치피치 트윙클 체리 프라페가 많이 나가는데 괜찮으세요?”
“피…… 네, 그걸로 주세요.”
“그럼 결제 도와드리겠습니다.”
피치, 뭐? 한 단어도 기억하지 못한 주현은 도대체 어떤 음료수가 나오는 건지 내심 궁금해하며 카드를 건넸다. C동의 매점이 아닌 다른 곳에서 돈을 주고 물건을 사는 건 말 그대로 11년 만이었다.
앞에 선 직원과 카페에 앉아 있는 손님들 하나하나의 인기척이 주현의 신경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만약 폭주하게 된다면 어디로 달려 나갈지 생각하던 주현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런데 혹시, <웬즈데이 필름>에 나오신 분 아니세요?”
주현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폭주 에스퍼가 이곳에 있다고 비명이라도 지르면 어떻게 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이유는 몰라도 눈을 빛내며 기대감 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직원을 힐긋 살핀 주현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니라고 하면 속을까? 오히려 거짓말이나 한다고 더 못 믿는다 생각하면 상황은 더 나빠지겠지.
고민 끝에 주현이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였다. 공포에 질린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 눈도 감았다.
“와, 역시! 제가 그 편 엄청 많이 봤거든요. 처음엔 긴가민가했는데 눈동자 보고 딱 알았어요!”
볼을 상기하며 조잘거리는 목소리는 높고 즐거움에 가득 차 있었다. 주현으로선 폭주 에스퍼가 눈앞에 있는 게 어째서 즐거운 일인지 영문을 몰랐지만 그래도 비명을 지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비밀로 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무서워하실 분이 많을 것 같아서요.”
모두가 눈앞의 친절한 직원처럼 굴지 않으리란 걸 알고 있는 주현이 불안하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카페 직원인 만큼 소동이 일어나는 걸 원하지 않는지, 직원은 흔쾌히 그러겠다고 말했다.
“이거 가지고 계시다가 진동 울리면 이쪽으로 오시면 돼요.”
동그란 진동벨을 받아 든 주현이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렸다. 일반인과의 대화는 아주 오랜만이었는데, 나름대로 잘 흘러가서 기쁘기도 하고 그를 받아 준 직원이 고마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직원의 표정이 굳어졌다. 어쩌면 뒤늦게 폭주 에스퍼가 얼마나 위험한지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밖에서 기다릴까요? 불안하시다면…….”
“아뇨! 괜찮아요. 안에 계세요.”
다급한 만류에 그냥 밖에 있겠다고 할 수가 없어 주현은 주눅 든 채 구석 자리를 향해 걸어갔다.
아직 약속 시간까지는 10분 정도 남아 있었다. 그냥 PD가 올 때까지 차에 있으면 안 되는 거였냐고 속으로 투덜거린 주현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람들이 저마다 바쁘게 오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치 꿈을 꾸는 기분이 들었다.
몇 달 전에는 차인호가 실수로 누른 버튼 때문에 개처럼 끌려가서 사지를 꽁꽁 묶였는데, 지금은 이토록 자유롭게 카페에 앉아 있다.
문득 두려워진 주현이 가볍게 다리를 떨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주현의 파장을 쉬지 않고 지켜보겠다던 태석의 말이 아니었으면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괜찮아. 괜찮아. 폭주하면 10초도 안 돼서 머리가 날아갈 거야. 아무도 안 죽일 거야. 휘말리는 사람은 없을 거야. 자기 자신을 다독이듯 중얼거린 주현은 손안에서 울리는 진동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피치피치 트윙클 체리 프라페는 연분홍색에 위에 체리가 올라가 있는 음료였다. 주현의 입에는 너무 달았는데, 산 걸 버릴 수는 없으니 꾸역꾸역 입으로 밀어 넣었다.
PD는 프라페가 반쯤 비었을 때 왔다.
“안녕하세요. 제가 좀 늦었죠? 차가 너무 막히더라고요.”
“아, 네.”
“이 앞이 원래 자주 막히긴 하는데 오늘따라 좀 심했네요.”
물론 주현은 이 앞 도로가 막히는지 안 막히는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 어색한 주현의 대답에도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은 PD가 주문하고 오겠다며 자리를 떠났다.
긴장으로 저릿저릿한 손을 주무르며, 주현은 PD가 최대한 늦게 돌아오길 바랐다.
그의 바람을 무시하고 1분 만에 돌아온 PD는 의자에 앉아 밝은 얼굴로 명함을 건넸다. 깔끔한 명함에는 ‘구범진’이라고 적혀 있었다. 어딘가 낯익은 눈을 가진 범진이 주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심장이 빠르게 뛰고 목덜미가 서늘하게 식었다. 당장 일어나 자리를 뜨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일반인과 닿아도 되는 건가? 폭주 에스퍼인데?
악수에 응하지 않고 침묵하는 주현이 무례해 보일 법했지만 범진은 어깨를 으쓱이곤 가볍게 넘어갔다. 이야기는 천천히 진행되었고, 주현은 조금도 집중하지 못했다. 카페에 있는 사람들을 신경 쓰느라 너무 긴장했기 때문이다. 그걸 알아챈 건지, 말을 끊은 범진이 물었다.
“자리가 불편하시다면 제 차로 가실래요?”
불특정 다수와 널찍한 실내에 있는 것과 한 사람과 아주 좁은 공간에 있는 것. 범진에겐 미안하지만, 희생자는 적을수록 좋다. 주현이 말없이 일어났다.
범진은 정말로 안전불감증인 건지 아니면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건지, 아무튼 주현을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다리를 꼬고 있으면 빨리 도망가지 못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범진의 다리를 노려보던 주현은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저희 프로그램의 취지가 뭔지 아시나요?”
“에스퍼가 맡는 임무를 보여 줌으로써 시민들의 인식을 개선하는 거 아닙니까?”
“잘 알고 계시네요.”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신 범진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미소를 지우고 진지한 낯으로 말했다.
“그런데 과연 폭주 에스퍼에 대한 인식도 개선할 필요가 있을까요?”
후드 아래에서 검붉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전혀 겁먹은 기색이 없는 범진이 검지를 까딱였다.
“사실 협회 입장에서는 그럴 필요가 하나도 없거든요. 폭주 에스퍼는 위험하다는 인식을 그대로 둬야 일반 에스퍼에 대한 목줄이 되니까.”
반면교사로 이용된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직접 듣는 건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주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웬즈데이 필름> 편집할 때, 인호 씨가 엄청 참견했다는 거 아세요? 최대한 무해하게 보여야 한다면서요.”
주현은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멈칫하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범진이 안경을 추켜올렸다.
“폭주 에스퍼를 미디어에 노출하는 건 협회에도 저희에게도 큰 도전이었어요. 저희야 시청자들의 호불호가 갈리긴 하겠지만 사실 화제성은 보장된 거나 마찬가지니까 무조건 좋다고 밀어붙였는데, 협회 쪽에서는 왜 허락해 줬는지 아직도 모르겠네요.”
흉터투성이 손가락이 차가운 플라스틱 컵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저 차인호의 곁다리로 잠깐 얼굴을 비췄다고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복잡한 사정이 있는 듯했다.
“첫 이유야 어쨌든 지금은 홍보 효과가 있어서 그런지 협회에서도 충분히 협력해 주고 있어요. 처음에는 아주 소극적이었지만.”
“……그렇습니까.”
“네. 그리고 저는 방송국에서 몇 안 되는 반대파였죠.”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매가 어디선가 본 것 같다고, 다시 한번 같은 생각을 한 주현이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았다.
“그렇지만 어쩌다 보니 인호 씨께서 물꼬를 텄고, 지금은 제가 그 길을 더 넓히려 하고 있네요.”
“이유가 뭐죠?”
“글쎄요. 왜일까요.”
차가운 물방울이 바지 위로 떨어졌다. 거의 다 녹은 음료수 위를 동동 떠다니는 체리를 바라보던 주현이 손톱으로 제 살갗을 꾹 누른 순간이었다.
“……못난 형의 속죄일까요?”
작은 속삭임은 에스퍼의 귀에 똑바로 틀어박혔다. 그제야 주현은 아까부터 느껴지던 기시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방송 봤어요. 웬즈데이 피디 놈한테 욕이라도 한바탕해 주려고 봤는데, 주현 씨, 겁에 질려서 불안해하고 있더라고요. 사람들이 무서워할까 봐 무서워하고 있더라고요. 그 무섭다는 폭주 에스퍼인데, 하나도 무섭지 않아서…….”
안경을 벗은 범진이 손바닥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잘 웃고 잘 우는 것은 역시 이 가족의 공통적인 부분인가 보다.
“제 동생은, 범규는 어땠습니까? 그 아이도 두려워했나요?”
동생과 똑 닮은 눈을 가진 범진이 간절하게 물었다. 주현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가슴이 아프고, 이미 없는 사람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고, 후회와 죄책감이 온몸을 꽁꽁 감싸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