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37화
6장 게이트 데이트
<웬즈데이 필름>에 나온 걸 후회하는 마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만 갔다.
원래 인기가 많은 프로그램인지는 몰라도 TV만 틀면 주현의 멍청한 얼굴이 화면에 나왔다. 그것만 해도 짜증 나는데 주변인들의 반응 때문에 더더욱 심기가 나빠지는 중이었다.
C동 동료들이야 몇 번 놀리다가 말았는데 직원들의 시선이 집요해졌다. 한 번씩 방송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아주 순화돼서 나왔다는 둥 그래 봤자 넌 폭주 에스퍼라는 둥 시비를 걸 때는 욕이라도 시원하게 해 주고 싶었다. 처벌을 감수할 정도는 아니라 참았지만.
심지어는 센터장인 두식에게도 불려 갔는데, 그는 세간의 관심이 기쁜 모양이었다. 어깨를 툭툭 치기까지 한 걸 보면 확실했다.
반면 부센터장인 태석은 앞으로도 입단속 잘하라고 못을 박았다. 꼭 다른 방송에도 나가게 될 거라는 암시 같아서 주현은 저도 모르게 두려움에 조금 떨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주현의 곁에 있는 사람들이 아주 한정적이라는 사실이다. 친하게 지내는 건 기껏해야 같은 처지인 폭주 에스퍼들뿐이고, C동 직원들은 일하느라 바빠서 대화를 나눌 시간이 거의 없다.
그러나 유일하게 이 모든 걸 비껴간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모든 일의 원흉인 차인호였다.
“요즘 주현 씨 난리인 거 아세요? 저한테 주현 씨 귀엽고 멋지다고 여기저기서 엄청 말해요.”
차인호는 어째서인지 뿌듯한 표정으로 자랑스럽게 말했다. 꼭 장난감을 자랑하는 아이 같기도 했다.
그의 말이 진짜인지 주현은 모른다. 그야 밀폐된 곳에 갇혀 있는데 남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렇기에 주현은 차인호의 말이 그저 입에 발린 거짓말이라고 의심하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웬즈데이 필름> 속 자신이 썩 호감 가는 모양새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움츠러들어선 음침한 얼굴로 투덜거리는 꼴을 보고 있자면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심지어 차인호와 함께 있으니 안 그래도 못난 얼굴이 더더욱 못나 보였다.
주현은 차인호를 잠시 노려보다가 홱 시선을 돌렸다. 껍질이 일어난 거친 입술 틈새로 담배 연기가 훅 뿜어져 나왔다.
“못난 놈 가이딩하느라 고생한다고는 안 해요?”
“안 그러던데요. 주현 씨 잘생겼다고는 많이 해도.”
“당신 앞에서 제가 잘생겼다는 말이 나온답니까?”
누가 봐도 감탄할 외모의 차인호에게 어떻게 주현이 잘생겼다고 말할 수 있을까? 주현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고개를 내젓고 다시 담배를 입에 문 주현은 문득 대답이 돌아오지 않은 걸 깨닫고 차인호를 바라보았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굳이 넘겨짚자면 꼭 주현이 뱉은 말이 진심인지 가늠해 보는 것 같았다.
“아무튼, 폭주 에스퍼라 신기하다고 잠깐 그러는 걸 테니 금방 가라앉을 겁니다.”
주현의 예상이자 바람이기도 했다. 차인호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듯 작게 웃었지만, 주현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역시 그 미소는 어딘가 짜증 나서 보란 듯이 꽁초를 팔에 문질렀다. 곧장 구겨지는 미간에 성격 나쁜 폭주 에스퍼가 씩 웃었다.
* * *
“……죄송하지만 한 번 더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평소였다면 바로 인상 쓰며 잔소리를 늘어놓았을 두식은 푸근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게이트 데이트>에 나가게 되었다고 했네.”
물론 주현의 의사는 조금도 들어가지 않은 결정이었다. 크고 푹신한 의자에 앉아 있던 두식이 벗겨진 이마를 쓰다듬으며 활짝 입을 벌렸다.
“이야, 사람들이 폭주 에스퍼를 이렇게 좋아할지 누가 알았겠나?”
주현도 똑같은 심정이었다. 무섭고 위험한 폭주 에스퍼 한 번 봤으면 됐지, 왜 부르는지 정말 조금도 알 수가 없었다.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던 주현이 주먹을 움켜쥐며 물었다.
“그게 무슨 프로그램입니까?”
“그러니까…… 뭐였더라?”
두식의 눈짓에 옆에 서 있던 태석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에스퍼의 임무 현장을 찍으며 그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일반인들이 어떤 희생 위에서 평화를 만끽하고 있는지 알리기 위한 방송이다.”
주현은 눈을 감고 머리를 부여잡고 싶었으나 간신히 참았다. 임무 현장에서 카메라와 그걸 든 일반인을 신경 쓰며 능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피곤했다.
“KSC 방송사와 에스퍼-가이드 협회가 함께 만든 기획성 프로그램이다. 특별히 네가 나가게 되었으니 영광으로 알도록.”
말을 마친 태석은 주현의 거절은 고려조차 하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얼굴이었다.
“사람 죽이는 걸 방송에 내보내도 됩니까?”
빈정거리는 말투에 태석의 눈이 가늘어졌다. 두식만 없었다면 곧장 발길질이 날아왔을 것이다.
“……임무는 적당한 걸로 배치해 주겠다.”
그런 보여 주기식 임무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지만 차마 그리 외칠 수는 없었다. 남에게 휘둘리기만 하는 인생에 지쳤으나 달리 방법이 없어서, 주현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별걸 다 시키네.”
<게이트 데이트>라는 방송에 나가게 됐다는 소식을 알리자 세화가 한 말이었다.
“몇 번 이러다 말겠지.”
“안 그럴까 봐 걱정인 거 아냐.”
세화의 날랜 주먹에 샌드백이 터지며 모래가 바닥으로 쏟아졌다. 주먹으로 이마의 땀을 훔친 세화가 다른 샌드백 앞에 섰다. 마찬가지로 땀에 푹 젖은 주현은 훈련장 바닥에 대충 드러누워서 파이프가 그대로 보이는 천장을 응시했다.
“안 그러면 어떻게 되는데?”
주현이 계속 미디어에 노출되고 여러 프로그램에 끌려가면 결국 사람들이 질리는 것 외에 무엇이 있을까.
“자기가 보고 싶은 모습만 보면서 멋대로 판단하다가 우리나 다른 누가 폭주하기라도 하면 욕은 네가 다 먹을걸.”
“…….”
“나는 그게 걱정이다.”
팡, 샌드백을 때리는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울렸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로 지쳐 있던 주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되면 나 오래 살겠네.”
욕을 많이 먹을수록 오래 산다는 속설이 진짜라면 말이지만. 주현이 걱정 말라는 듯 씨익 웃자 세화는 한숨을 내쉬곤 다시 한번 주먹을 휘둘렀다.
“우리가 오래 살아서 뭐 해.”
그 말에 동의했지만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 * *
<게이트 데이트>는 방송사 KSC와 에스퍼-가이드 협회가 함께 제작 중인 다큐멘터리로, 총 10편이며, 편마다 다른 에스퍼가 나온다고 한다.
그리고 주현이 나가게 될 화는 마지막 편인 10화다. 원래 9화 제작으로 기획했는데 갑작스럽게 주현을 끼워 넣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너무 부담 가지지 않으셔도 될 거예요. 빼고 싶은 장면은 얼마든 편집해 달라고 할 수도 있고요.”
위로라도 하는 듯 차인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러나 주현의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편집이 문제가 아니라 하루 종일 일반인이 옆에서 얼쩡거린다는 그 자체가 문제였기 때문이다.
위험하다는 이유로 가둬 두고 폭탄을 목에 달고 다니게 하면서도, 정작 협회의 높으신 분들은 폭주 에스퍼를 사람들 옆으로 보내는 걸 반대하지 않았다.
주현은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사람인지 알고 있다. 폭주는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모르고, 누구도 예측하지 못하기에 일종의 천재지변이라고 볼 수 있다. 그로 인해 휘말린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목숨을 잃는지 싫을 정도로 잘 알고 있는 터라 주현은 이 상황이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를 제외한 누구도 진지하게 위험성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심지어 차인호도 그랬는데, 그는 느긋하게 주현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괜찮아요. 주현 씨 폭주 안 할 거니까.”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당연히 알죠. 매칭 가이드인데.”
말도 안 된다고 따지기엔 그의 얼굴에 담긴 감정이 무엇인지 가늠할 수가 없어서, 주현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떨궜다.
멈추길 바랐던 시간은 순식간에 밀어닥쳐 주현을 C동에서 끄집어냈다.
며칠 전부터 대본이니 뭐니 하면서 귀찮은 일에 시달렸던 주현은 벌써 지친 기분으로 차에 올라탔다. 앞 좌석과의 분리가 없는 일반 차인 걸 보고 문을 닫았던 주현은 직원의 짜증 어린 성화에 겨우 다시 문을 열었다.
평소에 타는 것보다 깨끗하고 덜컹거림이 적은 차에 탄 주현은 단두대에 끌려가는 심정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임무에 갈 때는 늘 황량한 도로만 달렸는데 오늘은 갈수록 건물과 사람이 늘어났다.
주현은 가늘게 떨리는 손가락으로 스카프 아래에 숨겨진 초커를 매만졌다. 얼마 전 전체적으로 수리받았으니 폭탄은 잘 작동할 것이다. 그걸 위안 삼은 폭주 에스퍼가 옅게 심호흡했다.
“괜한 말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차에서 내리기 전, 역시나 빠지지 않는 신신당부에 고개를 끄덕이자 조용히 잠금이 풀렸다. 뒷좌석 문에 잠금 조절 장치가 없다는 것 또한 괜한 말일 터다. 헛웃음을 지은 주현이 땅에 발을 디뎠다.
사전 미팅은 시내에 있는 방송국 건물 앞 작은 카페에서 진행되었다. 방송국 건물은 주현이 출입을 거부당했고, 보안 때문에 C동은 안 되니 카페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주현은 차라리 전화로 하면 안 되냐고 물었으나 PD가 거절했다. 심지어는 직원이나 경비도 없이 오직 주현과 둘이서 만나고 싶다는 요청까지 했다.
안전불감증이 심각한 인간인 것 같다고 속으로 욕하며, 주현이 미리 이름을 들었던 카페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