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35화
듣기만 해도 불길한 BGM이 흐르고, 화면이 바뀐 후에 차인호는 한 방 안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어……?”
눈을 조금 가리는 새까만 머리카락. 내리깐 탓에 볼에 그늘을 만드는 속눈썹. 다물린 입술. 널찍한 어깨. 초조한 듯 꼼지락거리는 손가락. 빨간 스카프가 귀여운 처연 미남이 있었다.
은아는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그토록 악마 같다 떠들어 대던 붉은 눈동자는 마치 보석처럼 빛나고, 어색한 듯 금방 시선을 돌리는 것마저 마음을 간질이는 구석이 있었다.
한때 미친 듯이 열중했던 오빠들에게서 7년 전 탈덕하고 쭉 가라앉아 있던 은아의 가슴이 펄쩍펄쩍 뛰기 시작했다.
[-주현 씨, 긴장했어요?]
웃음기 스민 차인호의 말에 주현이라 불린 미남이 눈가를 씰룩였다. 이름도 예쁘네. 어느새 몸을 앞으로 내민 은아가 화면에 집중했다.
[-아뇨?
-그냥 평소대로 하면 돼요.
-긴장 안 했다니까요.]
조금 낮지만 튀는 곳 없이 부드럽게 흘러가는 목소리마저 은아의 취향이었다. 누가 봐도 긴장했으면서 안 했다고 우기는 모습까지 귀여워 보인다면 이미 늦은 걸지도 모른다.
약간 붉어진 뺨이 화면에 고스란히 담겼다. 수줍은 듯 눈썹을 내리는 모습이 어딘가 묘하게 어린 느낌을 주었다.
[“생각했던 거랑은 좀 다르네요?”
“그러니까요. 뭔가 더 무서운 인상일 줄 알았는데.”]
MC들의 말에 차인호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손이 차가운데.]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에스퍼의 손을 잡은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에스퍼와 가이드가 가이딩을 위해 접촉한다는 건 모두가 익히 아는 사실이다. 미디어에도 자주 나오고. 그럼에도 그쪽 세계와 관련 없는 일반인이라 그런지 조금 묘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잠시 주현을 살피던 차인호가 눈을 가늘게 뜨며 이어 말했다.
[-주현 씨 지금 담배 피우고 싶죠.]
놀란 듯 주현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에 따라 오묘한 색의 눈동자가 더욱 많은 빛을 반사하며 별처럼 빛났다.
이런 말을 방송에서 해도 될지 걱정하는 듯 잠시 눈치를 살핀 폭주 에스퍼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이 마친 어른의 눈치를 보는 아이 같아서, 은아는 두 주먹을 꽉 쥐고 죄 없는 쿠션을 두들겨 팼다.
[-제 눈은 못 속여요. 제가 주현 씨를 얼마나 잘 알고 있는데.]
턱을 들며 웃는 차인호의 말이 어쩐지 뽐내는 것처럼 들리는 건 은아의 착각일까?
[-그런데 담배, 몸에 안 좋은 거 알고 있죠?
-네, 네.
-좀 줄일까요?
-네, 네.
-이참에 확 금연하죠.
-네…….]
기죽은 아이처럼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던 주현이 퍼뜩 얼굴을 들었다. 차인호를 노려보는 눈에서 째릿! 하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이봐요. 제가 조금 위축됐다고 해서 놀리지 말아 주실래요?
-이런, 은근슬쩍 약속 받아 내려 했는데 안 통하네요.]
조금 더 차인호를 노려보던 에스퍼는 이내 슬쩍 달아오른 볼을 문지르곤 한숨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미친, 위축됐다고 놀리지 말래!”
카메라가 낯선지 우물쭈물하는 모습에 은아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런데 생각보다 가까워 보이네?”
화제성을 위해서 위험천만한 폭주 에스퍼와 매칭했다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은아 또한 그리 생각했었는데, 화면 너머로 보이는 건 전혀 비즈니스적인 모습이 아니라 놀라웠다. 심지어 차인호는 지금까지 <웬즈데이 필름>에 나온 모습 중 가장 편안하고 즐거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물론 편집된 영상을 볼 뿐인 은아가 자세한 사항까지 알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분명한 건 차인호는 폭주 에스퍼와 손을 잡는 데 아무런 거리낌도 없어 보였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주현이 눈치를 살피며 주춤거렸는데, 키도 크고 어깨도 넓은 폭주 에스퍼이건만 묘하게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 게 정말 방송에 나가도 되는 겁니까? 재미도 없고…… 무섭기만 한데요.
-뭐가 무서워요?]
차인호가 감싸 쥔 에스퍼의 손은 흉터가 많고, 손톱이 짧고, 손가락이 길쭉했다. 접촉으로 가이딩이란 게 되기는 하는 모양인지 주현의 눈매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폭주 에스퍼잖아요. ……눈도 빨갛고.
-전 주현 씨 눈 좋아해요.]
놀랍도록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순간 은아는 이런 게 대놓고 나와도 되냐고 생각했다. 7년 전이긴 하지만 한때 오빠들을 엮어 먹는 것에 너무 빠져 있었던 부작용일지도 모른다.
고개를 내저은 은아가 다시금 화면에 집중했다.
예상치 못한 말인 듯, 폭주 에스퍼가 입을 약간 벌리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검은색과 붉은색이 오묘하게 뒤섞인 눈동자는 빛의 방향에 따라 색의 깊이가 조금씩 달라졌다. 그저 무섭다고 말하기엔 너무 예뻤다.
살면서 누군가 그런 말을 해 준 적이 없는지,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입술을 깨물던 주현이 고개를 기울이며 작게 웃었다. 에스퍼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날카로운 눈매가 곡선을 그리며 휘고, 창백한 볼이 느슨해졌다.
“미쳤나 봐, 진짜…….”
작은 미소로도 확 달라진 인상에 은아가 손끝으로 입을 가렸다. 어디서 이렇게 취향의 한가운데를 후벼 파는 남자가 나타났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 말 하는 사람은 세상에 당신밖에 없을 겁니다.]
여기 또 있는데요?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은아의 목소리가 거실을 울렸다.
농담이라고 확신한 건지 가볍게 웃은 폭주 에스퍼의 어깨에서 조금이지만 힘이 빠졌다.
상당히 날카로운 인상이던 에스퍼는 미소를 짓자마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저 눈매가 둥글게 휘고, 입꼬리가 슬쩍 위를 향했을 뿐임에도 인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달콤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다 큰 성인 남성에게 할 말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은아는 그렇게 느꼈다.
[-그럼 뭘 해야 할까요?
-말했잖아요. 평소처럼 하면 된다고.]
보통 <웬즈데이 필름> 같은 일상 관찰 예능에서는 나오는 사람 모두가 촬영 중이라는 걸 티 내지 않는다.
하물며 갑작스럽게 초대했다는 친구들조차 곳곳에 놓인 카메라를 신경 쓰지 않으며 본 시늉조차 하지 않는데, 미디어에 잘 노출되지 않는 폭주 에스퍼라서 그런지 두 사람은 촬영 중이라는 걸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게 싫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렇기에 안전 조치가 되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나라한 일상을 보여 준다는 콘셉트는 벗어났지만, 워낙 화제성이 큰 폭주 에스퍼라서 편집 없이 그대로 방송한 듯했다.
차인호에게 붙잡힌 손가락을 조금 꼼지락거리던 에스퍼가 조금 곤란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책을 안 가져왔는데.
-며칠 전에 새로 얻었다는 그 책이요? 제목이 뭐였죠?
-<오만과 편견>. 벌써 잊었습니까?]
새침한 핀잔에 차인호가 어쩐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한편 은아는 몰아치는 갭모에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저 상처투성이 손으로 고전 로맨스 소설을 한 장 한 장 넘길 걸 생각하니 절로 주먹이 꽉 쥐어졌다.
[“<오만과 편견> 재밌죠. 전 영화로만 봤는데도 설레더라고요.”
“의외로 로맨스 장르를 좋아하시나 봐요?”
“그냥 책이라면 안 가리고 다 좋아하세요. 책갈피 대신 나뭇잎 같은 거나 끼워 놓기는 하지만.”]
스튜디오에서 그리 말한 차인호는 무척 즐겁게 웃었다. 흡사 낮에 길고양이 사진을 찍으며 웃던 얼굴과 비슷했다. 한마디로 주현이란 이름의 폭주 에스퍼를 무척 귀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몇 달간 옆에 있었던 사람이 저렇게 구는 걸 보면 화면 속 에스퍼는 그리 위험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오만과 편견>에 대해 떠드는 미남 둘은 이상한 광경 같으면서도 눈에 좋았다. 서로 존댓말을 쓰기는 하지만, 오가는 대화가 스스럼없고 편안해서 제법 가까운 사이라는 게 한눈에 보였다.
[-이번에 찍고 있는 거 개봉하면 보러 와 줄래요? 제가 말하긴 뭐하지만 재밌을 텐데.
-농담이시죠?]
영화 홍보구나, 하며 은아가 남몰래 웃은 순간이었다. 조금 날카롭게 돌아온 물음에 움찔 어깨가 떨렸다.
[-폭주 에스퍼가 영화관을 어떻게 가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은아는 그들의 위험성에 대해 다시금 떠올렸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니만큼 사람이 많은 곳에 가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영화관은 물론이거니와 수영장, 도서관, 하다못해 동네 마트라도 갈 수나 있나?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었다.
제 말투가 차가웠다는 걸 아는지 주현이 시선을 내리깔며 덧붙였다. 제법 긴 속눈썹이 빛을 가리며 눈가에 작은 그늘을 만들었다.
[-애초에 그런 거에 관심 없습니다. ……그래도 권유해 줘서 고마워요.
-거짓말하지 마세요. 얼마 전에 TV에서 해 준 영화 재밌다고 좋아했잖아요.
-제가, 제가 언제요?
-나흘 전에 전화로 그렇게 말했어요.
-아닐 텐데?]
진심으로 당황한 듯 높아진 목소리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뒤로 소소하고 유쾌한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과 스튜디오 MC들의 리액션이 번갈아 나왔다.
그러다 가이딩 시간이 끝나갈 무렵 차인호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처음에 비해 상당히 긴장을 푼 주현이 안 그런 척하면서도 호기심을 숨기지 못했는데, 그 모습이 은아의 눈에는 귀를 쫑긋 세운 강아지처럼 보였다.
그녀와 같은 생각을 했다고 의심되는 차인호가 주현을 향해 셔터를 눌렀다. 찰칵 소리와 함께 밀려 나오는 사진에 폭주 에스퍼의 눈이 동그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