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34화
방송? <웬즈데이 필름>? 예능? 폭주 에스퍼가 방송에 나온다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차인호의 목소리엔 장난스러움이 티끌만큼도 담겨 있지 않았다.
-저는 말렸는데 아무도 안 들어 먹더라고요. 정말 죄송합니다. 괜히 저 때문에 그런 일에 말려들게 해서.
“전 한다고 안 했는데요.”
물론 두 사람 다 주현에겐 어떠한 거부권도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렇기에 차인호는 대답하지 않았고, 주현도 더 따지지 않았다. 그 뒤로 전화가 어떻게 끝났는지 머릿속에 남지 않았다.
멍한 얼굴로 휴게실에 들어서자 주현을 반긴 승철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팔을 잡아끌어 소파에 앉혔다.
“왜 그래? 인호 씨가 이제 매칭 끊는대?”
서보라의 사인을 받은 뒤로 차인호를 ‘인호 씨’라고 부르는 승철이 주현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형……. <웬즈데이 필름> 알아?”
“수요일마다 하는 TV 프로그램 맞지? 그거 세화가 자주 보잖아. 그게 왜?”
뭐라고 말해야 이 소식이 덜 충격적일지 알 수 없었다. 말을 고르던 주현은 결국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으며 들은 대로 말했다.
“나 거기 나갈 것 같아.”
“어?”
“차인호가 거기 나가는 것 같은데, 나 가이딩하는 장면이 나와야 한대.”
“하하, 너 농담 많이 늘었다? 꽤 재밌었어.”
팔짱을 끼고 고개까지 저으며 웃던 승철의 미소는 정적 속에서 서서히 사라졌다. 여전히 고개 숙이고 있는 주현의 모습에 재미있는 농담 따위가 아니라는 걸 안 그가 헉, 숨을 들이켰다.
“아니, 진짜로?”
“나도 가짜였으면 좋겠어.”
“그걸, 그걸 허락했대?”
에스퍼-가이드 협회에서 위험하기 짝이 없는 폭주 에스퍼를 방송에 내보내는 것에 동의했으니 그런 제안이 나왔을 터다. 폭주 에스퍼가 TV에 나온다고 해서 즐겁게 볼 사람이 어딨다고 그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사실 주현도 승철도 알고 있다. 너무 위험해서 보이지 않게 숨겨 둔 만큼, 화면에 나오면 아주 즐겁게 물고 뜯고 씹을 수 있는 오락거리가 되리란 사실을.
“……괜찮아. 욕 좀 먹고 오지 뭐.”
위로할 말이 없던 승철이 주현의 어깨를 강하게 쥐었다가 놓았다. 그것만으로도 제법 위로가 되어서, 주현은 이 또한 거지 같은 임무의 하나라고 생각하며 받아들이기로 했다.
한편으로는 C동의 다른 동료가 아니라 자신이 나가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승철도 세화도 채경도 봄도. 모두 폭주하기 전, 알고 지낸 사람이 많을 텐데 위험인물 취급당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싫을 테니 말이다.
반면 11년 전 주현에 대해 깊게 알고 있던 사람은 이미 죽거나 그에게 아무 관심도 없다. 그러니 폭주 에스퍼 중 누군가가 출연해야 한다면 주현이 가장 걸맞았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음에도 막상 촬영 당일이 되자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웬즈데이 필름>은 출연자의 하루 일상을 따라다니며 찍는 프로그램이다. 이번 출연자는 차인호인데, 일과 중 폭주 에스퍼를 가이딩하는 장면에 주현이 나가게 된다.
물론 촬영은 C동에서 찍지 않는다. 보안 문제라지만 솔직히 열악하고 지저분한 C동의 환경을 밝히고 싶지 않다는 게 진짜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이유로 주현이 도착한 곳은 시내에서 외진 곳에 있는 3층짜리 건물이었다.
“가이딩은 이곳에서 진행하게 될 거예요.”
스태프로 보이는 사람이 직원에게 말하는 게 창문 너머로 들려왔다. 찍히는 사람은 주현인데 모든 주의 사항은 그가 아닌 직원에게 돌아갔다. 물론 안전 수칙 때문이다. 손목에 감긴 수갑을 흔들자 쇠가 부딪히며 나는 찰그락 소리가 차 안을 울렸다.
“말실수 하나라도 해 봐. 어떻게 되나 보자.”
가이딩 룸이라고 안내된 곳에 들어가기 직전, 수갑을 풀어 준 직원이 눈을 빛내며 낮게 속삭였다.
이미 며칠 전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내용이다. 원한다면 줄줄 외워 줄 수도 있었다. 살인 임무, C동의 환경, 가혹한 일과, 인권을 무시한 처우 등. 주현의 일상과 관련된 모든 것을 입 밖에 내면 안 된다.
그렇게까지 문제가 될 생활을 하고 있다고 미처 깨닫지 못했던 주현은 내심 충격을 받았으나 겉으로 티 내지는 않았다.
안전을 위해 건물에는 제압을 위한 C동 직원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다. 곳곳에 카메라가 달린 방은 널찍하면서도 아늑했다. 테이블에 놓여 있는 장식품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문이 열리고 차인호가 들어왔다.
“먼저 와 있었네요.”
어깨를 으쓱이는 걸로 인사를 대신한 주현은 차인호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평소보다 조금 더 공들여서 꾸몄는지 진짜 연예인 같았다. 물론 원래부터 연예인이긴 하지만, 평소에는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와는 달리 조금 풀어진 분위기가 그를 가깝게 느끼도록 만들었다.
“원래 이런 식으로 갑작스럽게 정해지는 게 아닌데, 저번 사고도 있어서인지 소속사에서 제가 멀쩡하다는 걸 알리고 싶었나 봐요.”
반짝반짝 빛이 나는 차인호가 건너편에 앉았다. C동과는 달리 푹신하고 튼튼한 의자에선 삐걱거리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직원은 차인호와 너무 가까워 보이게 행동하지 말라고 했었다. 차인호의 이미지에 좋지 않다고 하는데, 무슨 상관인지는 몰라도 주현은 알겠다고 했다.
주현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던 차인호가 설핏 웃으며 그를 불렀다.
“이리 와요. 마이크 채워 줄게요.”
폭주 에스퍼에게 마이크를 채워 줄 간 큰 스태프는 없었다. 주현은 순순히 일어나 매칭 가이드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붙은 차인호에게선 부드럽고 아늑한 향이 났다. 말하자면 비가 온 다음 날의 숲속 같은 냄새.
“너무 긴장 안 해도 돼요. 제가 있잖아요.”
“…….”
“무슨 일 나도 제가 수습할 테니 안심하세요.”
차인호가 있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건데 안심하라니. 웃기다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정말로 마음이 조금 놓이는 자신이 있어서 주현은 거칠한 입술을 혀로 문지르며 의자에 앉았다.
짝! 차인호가 박수를 쳤다.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으나 평소와 다른 그린 듯한 미소를 짓는 얼굴을 보고 곧장 깨달았다. 주현이 주먹을 꾹 쥐었다가 펼쳤다. 촬영이 시작했다.
* * *
“아, 시원해.”
뜨끈한 김과 함께 욕실에서 나온 은아가 젖은 머리를 가볍게 털며 곧장 냉장고로 향했다. 망설임 없이 캔 맥주를 꺼내 한 모금 들이켠 그녀가 목구멍을 긁으며 캬- 하고 외쳤다.
“역시 하루 끝에는 이걸 먹어 줘야 한다니까.”
마른안주를 집어 들고 소파로 간 은아는 테이블에 발을 올리곤 드러눕듯 소파에 몸을 기댔다. 집이었다면 그게 무슨 꼴이냐고 부모님이 혀를 찼겠으나 그녀는 벌써 자취를 시작한 지 2년이나 지났다. 잔소리할 사람이 없다 이 말씀이다.
벌써 반이나 빈 캔을 들고 리모컨을 누르던 은아의 손가락이 멈췄다.
<웬즈데이 필름>은 수요일 오후 9시에 하는 예능으로, 스타의 하루 일상을 공개한다는 점에서 인기가 많은 프로그램이었다.
출연자는 하루 동안 돌아다니며 일상을 보내고 중간중간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다. 마지막에 그중 하나를 골라 일상 중 최고의 장면을 고르는 것으로 끝나는데, 오늘 나오는 사람은 무려 차인호였다.
은아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인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야야야, 웬필 보고 있어?
“어. 네가 보라며. 근데 광고 왜 이렇게 기냐?”
-몰라. 인호 나온다고 평소보다 길게 하나?
이런 말을 태연하게 할 정도로 은아의 친구는 차인호의 엄청난 팬이었다. 육포를 질겅거리고 있자 전화 너머로 친구의 화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드디어 나와.
“뭐가?”
-뭐기는, 폭주 에스퍼! 저번 주 예고에 나온다고 했어. 어떤 놈인지 얼굴 기억해 둘 거야.
제법 무서운 기세로 말한 친구가 코로 킁 숨을 내쉬었다.
<웬즈데이 필름>은 원래부터 시청률이 좋은 프로그램이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좀 더 높을 게 분명하다. 친구의 말대로 폭주 에스퍼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 무섭고 위험하다는 폭주 에스퍼가 뉴스가 아닌 방송에 나오는 건 은아가 알기론 처음 있는 일이다.
-내가 폭주 에스퍼 싫어하는 거 알고 있지?
“당연히 알지. 차인호가 폭주 에스퍼랑 매칭한다고 기사 떴을 때 너 새벽 내내 술 마시면서 울었잖아.”
-인호 죽을까 봐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 시작한다! 그럼 끊을게. 보고 나서 후기 좀!
다행히 안 죽고 살아 있는 차인호가 화면에 나왔다. 팬은 아니지만 그가 눈부시게 잘생겼다는 걸 부정할 수 없는 은아가 맥주와 함께 잘게 부서진 육포 조각을 꿀꺽 삼켰다.
역시나 비싸 보이는 아파트에서 일어난 그가 하루 일과를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막 자고 일어났음에도 무서울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여성스럽지는 않지만, 전형적인 미남이라기엔 지나치게 화려한 얼굴이 아침 햇살에 반짝였다.
손꼽히게 잘나가는 톱배우는 역시 게으르면 안 되는 것인지, 차인호는 여기저기 많이도 돌아다녔다.
[“고양이 좋아하시나 봐요?”]
차인호가 <웬즈데이 필름>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길고양이를 찍던 화면이 전환되고, 스튜디오에 있던 MC가 물었다. 그 옆의 다른 게스트들 또한 몸을 내밀며 차인호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차인호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쉽게 곁을 내주지 않는 만큼, 나에게 다가올 때 날아갈 듯 행복해지잖아요.”
“인호 씨가 뭘 좀 아시네요. 그렇죠. 그게 바로 고양이의 매력이죠.”]
예전에 고양이 카페에 갔다가 고양이에 푹 빠진 은아가 맞는 말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디 가시는 거예요?”
“가이딩하러요.”]
MC의 질문에 대답한 차인호가 슬쩍 웃었다. 곁에 있던 이들은 높은 소리를 내며 큰 리액션을 보였으나 차인호는 대꾸도 하지 않으며 화면에 집중했다.
은아는 빈 캔을 내려놓고 제대로 자리 잡으며 앉았다. 드디어! 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