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웬즈데이 필름
“그래서 다음 주부터 다시 촬영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붕대를 푼 말끔한 얼굴의 차인호가 말했다.
촬영 중 장비에 깔리는 사고 후, C동에 온 차인호는 그야말로 미라 같은 꼴이었다. 본인은 다 과장이라고 우겼으나 여기저기 많이 다치며 살아온 주현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나을 때까지 접촉 가이딩은 받지 않겠다는 선언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던 그는 오늘에서야 완전히 회복하고 주현의 손을 잡았다.
차인호를 처음 만났을 때는 방사 가이딩만으로도 만족했었는데, 지금은 손을 잡고 나서야 좀 제대로 가이딩을 받는 느낌이 들었다. 이러다 차인호와의 계약이 끝나면 그때부터 어쩌나 싶지만, 지금 고민해 봐야 주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거 잘됐네요.”
“네. 생각보다 빨리 회복해서 다행이에요. 더 늦어졌으면 저 잘렸을지도 몰라요.”
낫기는 했으나 희미한 흉터가 남은 차인호의 손등을 응시하던 주현이 저도 모르게 툭 내뱉었다.
“당신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잘 보이지는 않으나 분명하게 남은 흉이 신경 쓰였다. 연예인은 몸이 자산이라던데 괜찮나 몰라. 그런 생각을 하던 주현은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슬쩍 얼굴을 들었다.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차인호가 주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들과 비슷한 색인데도 그의 눈에 박혀 있으니 꼭 보석처럼 반짝이는 눈동자가 커다래져선 주현을 담았다.
“아니, 그, 당신처럼 실력 있는 배우 중에 시간 비는 사람이…… 그렇게 쉽게 구해질, 까요…….”
어째 말할수록 수렁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한창 잘나가는 인기 배우라고 하도 많이 들어서 그의 자리를 빈틈없이 채울 배우가 쉽게 나타나겠냐는 뜻이었는데, 이게 뭐라고 볼이 뜨거워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거 엄청난 칭찬으로 들리네요.”
예쁜 눈매가 휘어지고 즐거운 숨소리가 차인호의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머쓱하게 시선을 굴린 주현은 문득 단호하게 선을 긋던 차인호가 언제부터 부쩍 가까워졌는지 잠시 생각했다. 명확한 지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고르자면 주현이 정말로 죽을 거라 생각했던 그날인 것 같다.
눈앞에서 다 죽어 가던 에스퍼를 보며 언제 죽을지 모르니 잘 대해 줘야겠다고 생각한 걸까?
남의 속마음 따위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 생각을 털어낸 주현이 맞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 * *
두 번의 전화 후로 주현과 차인호는 가끔 통화하는 사이가 되었다. 공중전화다 보니 주현이 걸면 차인호가 받는 식인데, 그리 바쁜 건 아닌지 단 한 번도 받지 않은 적이 없었다.
아주 작은 변화일 뿐이다. 주현은 사람을 죽이거나 괴물을 죽이고, 차인호는 하던 대로 촬영을 하고. 그러다 가끔 가이드에게 전화를 걸 뿐인 그런 평범한 나날임에도 어쩐지 묘한 활력이 느껴졌다.
그다지 많은 사람과 대화해 본 게 아님에도 주현은 차인호가 좋은 청자라는 걸 깨달았다. 대꾸해 주는 목소리는 부드럽고, 정말로 재밌다는 듯이 웃음소리를 내니까 말주변도 없는데 뭐라도 말하게 된다.
처음에는 수화기를 붙잡고 있는 주현을 장난스럽게 놀리던 동료들도 자연스럽게 지나칠 정도로 익숙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을 보고 있자니 그냥 차인호가 떠올랐다.
새벽부터 이어진 임무는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끝났고, 피가 뚝뚝 흐르던 팔뚝이 어느 정도 지혈되고 나니 가이드의 찌푸려진 미간이 생각났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주현은 차인호에게 전화 걸어 임무가 고됐다고 말하기로 했다. 눈치 빠른 차인호라면 힘든 임무라 어딘가 다쳤다는 뜻이라는 걸 곧장 알아챌 것이다. 한숨은 쉬겠지만 눈앞에서 쉬는 게 아니라 괜찮았다.
그런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는데, 바쁜지 오늘따라 신호음이 길게 울렸다.
끊으려던 찰나에 전화를 받은 차인호는 어쩐지 다급한 목소리였다. 놀란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곤란한 것 같기도 했다.
-일이 있어서 그런데 잠시만 기다려 주실 수 있나요? 아주 잠깐이면 돼요.
“그럼 나중에 다시 걸까요?”
-안 끊으셔도 돼요! 정말 2분이면 되니까…….
말도 채 다 끝내지 못하고 멀어진 목소리가 희미하게 무언가를 소리치고 있었다. 기다려 달라고 직접 말한 이상 끊기도 뭐했던 주현은 뻘쭘하게 수화기를 들고 회색 벽에 난 금을 손끝으로 덧그렸다.
차인호는 체감상 3분 정도가 지난 후에 돌아왔다.
-오래 기다렸죠? 좀 따질 일이 있었거든요.
“괜찮습니다. 일은 잘 마무리됐습니까?”
-아, 그 일 말인데요…….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기라도 하는지 막힌 숨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뭔가 성가신 일이라도 생긴 것 같았다. 연예인 일이 쉽기만 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지만, 차인호가 이럴 정도라면 제법 귀찮은 일일 게 분명했다.
-전화로 이런 말 해서 죄송한데, 저도 방금 알았거든요.
그렇게 말하니 꼭 그 성가시고 귀찮은 일에 주현이 연관되어 있다는 듯이 들렸다.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금을 따라가던 손가락을 들여다보니 먼지가 묻어 새카매져 있었다. 주현이 눈썹을 구겼다.
-아마 나중에 그쪽 직원이 자세한 사항을 설명해 주겠지만, 그래도 미리 말씀드릴게요.
“네.”
-주현 씨, 저랑 같이 방송 나가게 됐어요.
“……네?”
-<웬즈데이 필름>이라고, 아세요?
“예?”
-일상 관찰 예능인데 주현 씨를 가이딩하는 모습이 반드시 나와야 한다고 계약서에 적혀 있거든요.
검붉은 눈동자가 허망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에게 꿈이라고 말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