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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36/161)

폭주 에스퍼 32화

“심하게 다친 건 아닐 거야.”

세화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제야 주현은 자신이 들은 소식이 환청 같은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차인호가 다쳤다. 늘 위험에 처해 있는 에스퍼도 아니고, 가이드로서 임무 현장에 따라간 것도 아니면서 병원에 실려 갔다.

봄도 세화도 승철도. 다친 사람은 차인호인데, 그들은 주현을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다. 왜냐하면 차인호는 신주현의 매칭 가이드니까. 이유가 뭐든 간에 그들은 계약서를 작성했고, 매주 만나 가이딩 룸에서 시간을 보내고 함께 대화를 나눴다.

주현의 손이 입고 있던 새하얀 후드티를 움켜잡았다. 입술을 달싹이며 한참 머뭇거리던 그가 한숨과도 같은 숨결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몇 시간이 지나 완전한 밤이 된 현재, 주현은 아무도 모르게 방에서 나와 휴게실 앞에 서 있다. 그의 손에는 주황색 촌스러운 디자인의 전화 카드가 들려 있었다. 아직 제대로 써 보지도 않았는데 벌써 조금 더러워져 있었다.

달칵, 상처 난 손가락이 회색 전화기에 카드를 집어넣었다. 번호를 누르는 손가락은 조금 느렸으나 거침없었다.

딱 한 번 들었음에도 잊을 수 없는 신호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복도는 새까맸지만 이미 어둠에 익숙해진 주현의 눈에는 사소한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금이 간 벽, 칠이 벗겨진 손잡이, 녹슨 경첩. 시선을 움직여 낡은 슬리퍼를 내려다본 주현이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원해서 새벽에 이러고 있는지 모른다.

보통 사람이라면 잘 시간이라 얼마나 다쳤는지는 몰라도 회복에 방해가 될 게 분명하다. 물론 그 전에 전화를 받지도 못할 만큼 다쳤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애초에 차인호가 다친 게 주현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매칭을 계속할 몸 상태가 되지 않으면 끊으면 된다. 어차피 1년짜리 단기 계약이었으니 시기가 조금 앞당겨졌다고 생각하면 된다.

물론 상세한 일을 주현에게 설명해 줄 만큼 친절한 직원은 없으니 그저 기다려야 하겠지만, 일주일이면 알게 된다. 계약은 일주일에 두 번 가이딩하는 것이고, 차인호가 오지 않는다면 계약이 끊겼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니까.

그러나 그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주현은 수화기를 내려놓지 않았다. 가이드에게 집착하지 않겠다던 결심은…….

-여, 큼, 여보세요?

“…….”

-주현 씨? 맞죠?

전화 너머로 듣는 차인호의 목소리는 조금 낮고, 부드럽고, 웃음기가 스며 있다. 폭주 에스퍼가 구식 공중전화에 이마를 쿵 박았다. 안도가 너무 커서 아프지도 않았다.

-방금 그거 무슨 소리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애써 태연하게 대답한 주현이 몸을 돌려 벽에 기대곤 얼굴을 푹 숙였다. 이제야 욱신거림이 밀려드는 이마를 문지르고 있자니 귓가로 차인호의 목소리가 불쑥 밀어닥쳤다.

-주현 씨. 저 걱정했어요?

수화기를 귀에 바짝 붙이고 있었으니 귓가에서 들리는 게 당연한 일임에도 주현은 깜짝 놀라 어깨를 떨고 말았다.

걱정했냐고? 주현은 안도로 힘이 쭉 빠진 다리를 접어 쭈그려 앉으며 대답했다.

“네.”

어두운 복도에 주현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너무 고요해서 작은 속삭임도 크게 들렸다.

“제 가이드가 죽었을까 봐, 걱정했습니다.”

에스퍼와 가이드가 매칭을 맺으면 호르몬이 변화하고, 그로 인해 애착이 생기기 쉽다는 연구 결과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주현은 자신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난 건지 조금 궁금했다.

이 감정이 매칭으로 인한 거라면 다른 가이드와 매칭해도 같은 기분이 드는 걸까?

-……그렇군요.

소매에 남은 지워지지 않는 얼룩을 손끝으로 문지르던 주현이 차인호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전 괜찮으니 너무 걱정 마세요. 며칠이면 퇴원할 겁니다. 사실 입원도 안 해도 되는데 주변에서 하도 성화라 어쩔 수 없이 여기 있는 거예요.

차인호는 밝게 말하려 했지만 지친 듯 쉰 목소리는 숨기지 못했다.

-다음 주면 가이딩하러 갈 수 있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가이딩을 걱정한 게 아니란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매칭 가이드가 아닌 차인호를 걱정했다는 말은 어쩐지 이상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에스퍼와 가이드라는 관계를 제외하면 둘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왜 주현이 가이딩이 아니라 차인호를 걱정하겠는가. 주현은 가이딩도 아니고, 가이드 그 자체를 원하고 싶지 않았다. 한결처럼, C동의 다른 이들처럼 상실에 고통받고 싶지 않았다.

-아무튼 그래서 심심했는데 마침 주현 씨가 전화했네요. 고마워요.

쉬는 중에 방해해서 미안하다며 끊는다고 말할 수 없게 된 주현이 발 사이 차가운 회색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어쩌다 다쳤습니까?”

-한 스태프분이 물건을 옮기다가 뭘 잘못했는지 와르르 무너졌지 뭐예요. 저도 모르게 뛰어들어서 어쩌다 보니……. 하하.

“그게 웃을 일입니까?”

생각보다 강하게 나온 말투에 스스로도 놀랐으나 주현은 도로 주울 마음이 없었다.

“무슨 영웅 콤플렉스 있습니까? 그러다 큰일 나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고요? 에스퍼도 아니면서 그런 무모한 짓을 왜 한 겁니까?”

수화기 건너편에서는 말이 없었다. 희미한 숨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끊은 건 아닌데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어떤 기분인지 알 수 없어 불편했다.

-……다들 멋지다고만 하던데.

“그건 멋진 게 아니라 만용이죠. 그러다 당신이 죽기라도 했으면 그 사람은 평생 죄책감 속에서 살았을 겁니다. 거기 있는 사람들 트라우마는 어쩌고요.”

화내려고 전화한 게 아닌데. 이런 말을 하려고 수화기를 든 게 아니었는데 멋대로 움직이는 입을 막을 수가 없었다.

숨을 고르던 주현이 눈을 꾹 감았다. 이래서야 다시는 전화하지 말라고 욕먹어도 할 말이 없다. 주현이 뭐라고 차인호에게 설교를 늘어놓을까. 주제넘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속이 시원하다는 생각이 분명히 있어서, 주현은 잠자코 차인호의 대답을 기다렸다.

-주현 씨.

높지도 낮지도,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목소리는 무척 평온하게 들렸다. 주현이 작은 숨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제가 죽었을까 봐 무서웠어요?

창문 하나 없는 복도는 완전한 어둠에 싸여 있다. 그 속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폭주 에스퍼의 검붉은 눈동자가 눈꺼풀에 숨었다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주현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죽음조차 두렵지 않은 내가 왜 타인의 죽음을 두려워하겠느냐고, 그리 외치고 싶었다.

굳은살이 박이고 흉 진 상처가 남은 손바닥이 마른 얼굴을 문질렀다.

차인호는 에스퍼가 아니다. 가이드, 그것도 매칭 가이드지만 주현의 임무에 따라오지 않는다. 물론 게이트와 동떨어진 일반인의 세계라고 늘 안전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갖가지 사고가 매일, 매 순간 일어나고 누군가는 목숨을 잃는다.

그러나 차인호의 죽음을 예상한 적은 없다. 그런 까닭으로 주현은 그를…….

‘어디서부터 꼬인 거지?’

폭탄이 달렸다는 걸 알면서도 손을 뻗은 때? 주현의 목숨을 구해 주었던 날? 어쩌면 실수로 호출기를 누르곤 안절부절못하며 직원들을 말리던 얼굴을 본 순간일지도 모른다.

마른세수를 마친 주현이 눈을 번뜩였다. 분노는 없지만, 미소도 없다. 굳이 말하자면 체념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감정을 담고 주현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어쩔 건데요?”

겁 많은 개가 크게 짖는다. 주현은 겁이 많지도 않고, 개도 아닌데 지금은 꼭 그런 기분이 들었다.

고개 숙여 뒷머리를 콱 움켜잡은 주현이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차인호가 어쩔 수 있는 게 뭐가 있다고 그런 말을 했을까. 그것도 아픈 사람한테. 그러나 이제 와 솔직해지기에는 너무 늦었다. 역시 괜히 전화했다는 생각이 슬금슬금 기어올랐다.

-걱정을 그런 식으로 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아, 네. 이런 식으로 해서 미안합니다. 싫으면 앞으로 그런 무모한 짓 안 하시면 됩니다.”

-싫다고는 안 했어요.

“…….”

-오히려 되게…… 기쁜데.

누군가를 기쁘게 만들 일이 거의 없는 주현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주현은 지금 전화 중이며 복도에는 그밖에 없다는 걸 깨닫고 다시 얼굴을 숙였지만, 조금 달아오른 목덜미는 숨기지 못했다.

“수백만 명이 다 당신 걱정하고 있는데 기쁠 게 뭐가 있습니까.”

-주현 씨는 남들한테 휩쓸려서 걱정하는 성격 아니잖아요. 자존심이 엄청 강하니까. 희소성이 있다고 해야 할까요?

“놀리는 거면 끊겠습니다.”

-하하, 놀리는 게 아니라 진심이에요.

가벼운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아까만큼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자세를 바꾼 주현이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다리를 접어 무릎에 턱을 올리니 한층 아늑해졌다.

-아까 영웅 콤플렉스라고 했죠?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거 맞는 것 같아요.

차인호의 목소리는 작고 부드러우며 어딘지 조금 불안하게 들렸다. 몸이 아프니 마음도 약해져서 속내를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늘 들어서……. 주현 씨도 그렇지 않나요?

솔직히 말하자면 정말로 의외였다. 차인호는 당당하고, 조금 재수 없고, 걱정거리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곁에서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며 마냥 가벼운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긴 했으나,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저야 지은 죄가 많으니까.”

주현은 어디 아픈 곳도 없는데 왜 숨겨 뒀던 약한 부분이 새어 나온 건지 답을 알 수 없었다.

죗값을 치르고 싶은데 살아갈수록, 산소를 탐할수록 어째서인지 죄악은 늘어만 간다. 엄마의 말처럼 절망 속에서 태어났으니 그 안에서 살다 죽는 게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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